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7화 (7/112)

7. 내가 애냐2016.10.08.

보충수업을 마친 후 자리로 돌아온 낙원은 책상을 정리했다. 서랍을 잠그고 동료 교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오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은유를 발견했다. 웬일인지 항상 붙어 있던 다현은 보이지 않고 은유 혼자였다.

천천히 그 방향으로 걸어가던 낙원과 은유가 복도 가운데에서 마주쳤다.

“지금 퇴근하세요?”

“어. 가방 챙겨서 주차장으로 와.”

“아, 아니에요. 주차장은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 시간엔 없어. 빼놓지 말고 잘 챙겨와.”

“네. 그럼 저 빨리 챙겨서 갈게요.”

낙원이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고 교무실로 들어간 은유는 부랴부랴 제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왼쪽에 위치한 주차장은 시간이 시간인지라 다행히도 한적했다. 두리번거리는 은유의 앞에 낙원의 차가 멈췄고 또 다시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후다닥 차에 올랐다.

“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너도.”

오늘도 여전히 퇴근길은 험난한 여정이었다. 긴 시간에 걸려 집에 다 와갈 때쯤 은유가 급히 낙원을 불렀다.

“아. 낙원씨. 저 저기 앞쪽에 좀 내려주실래요?”

“왜.”

“장을 봐야 해서요. 금방 보고 들어갈게요.”

은유의 부탁에 낙원은 대답 대신 차를 마트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은유가 깜짝 놀라 혼자 가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여느 때처럼 ‘됐어’라는 말 한마디로 은유의 입을 꾹 다물게 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마트에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마트로 들어가 카트가 놓여있는 곳에 동전 하나를 집어넣은 은유는 제 가방을 카트 안에 넣고 입구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낙원과 함께 장을 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을 하는 그가 피곤할까 봐 항상 평일에 그가 퇴근하기 전에 혼자서 장을 보곤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품을 보랴, 카트 챙기랴 혼자 바쁘던 은유의 옆으로 낙원이 다가왔다.

“내가 할 테니까 장 봐.”

“네? 아니에요! 저 괜찮아요!”

더 말하지 않고 저를 쳐다보는 낙원의 눈빛에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마음 놓고 상품을 확인했다.

작은 몸으로 어찌나 이리저리 잘 다니는지. 낙원은 은유가 참으로 신기했다. 물건 하나를 고르면서도 가격과 질을 다 따져보고 고르는 게 야무져 보였다.

“새댁 왔어?”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유제품 코너를 지나던 은유를 발견한 한 직원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시음중인 요구르트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다 옆에 있는 낙원을 발견하곤 눈이 커다래졌다.

“새댁 신랑이야?”

처음 듣는 호칭에 은유뿐만이 아니라 낙원까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직원의 질문에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맨날 혼자 오더니 오늘은 어떻게 같이 왔대? 자. 이거 하나 드세요.”

낙원은 자신에게 건네는 요구르트 한 컵을 받고 고개를 숙였다. 마트 직원과는 또 어떻게 친해진 것인지, 한눈에 봐도 은유를 예뻐하시는 게 보였다.

“새댁이 정말 착해요. 그리고 또 어찌나 꼼꼼한지 살림도 잘 하게 생겼다니까. 맨날 혼자 장보러 와서 낑낑대는 게 좀 안쓰러웠는데, 이렇게 같이 오니까 참 보기 좋네요.”

그러고 보니 단 한번도 은유가 자신에게 장을 보러 가자고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냉장고는 항상 채워져 있었고, 반찬에도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는데 한번도 그 수고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혼자 장을 보려면 무겁기도 많이 무거웠을 텐데.

“신랑도 훤칠하니 잘 생겼네. 그래서 안 데리고 나온 거였어?”

“아, 아니에요! 아하하.”

“아니기는~ 인물이 훤하구만. 앞으로는 같이 이렇게 장도 보러 다니고 해. 얼마나 보기 좋아?”

“하핫. 네. 감사합니다.”

낯간지러운 말에도 은유는 생글생글 웃으며 직원의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었다. 다음 코너로 이동하며 은유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 부채질을 하느라 바빴다.

커피를 파는 코너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제품들을 둘러보았다. 둘 다 커피를 좋아하는 탓에 항상 집에 커피는 챙겨두는 편이었다.

낙원이 마시는 브랜드의 커피를 발견한 은유가 높은 진열대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키가 작은 탓인지 닿을락 말락 해서 도전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낙원이 작은 한숨과 함께 팔을 뻗어 너무나도 쉽게 커피를 집어 카트 안에 내려놓았다.

“말을 해.”

“하하……. 닿을 줄 알았죠…….”

그러고 보니 키가 참 작다. 몇인지는 정확히 모르는데 작은 머리가 제 어깨 아래까지밖에 오질 않는다. 순간 모르고 있는 게 많구나 느끼던 낙원은 어느 샌가 저 앞을 가고 있는 은유를 발견하곤 그 작은 여자를 따라 카트를 밀었다.

장을 본 후 길게 늘어선 계산대 줄에 동참한 두 사람은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 기다리는 내내 은유는 낙원을 향해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집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낙원이 이렇게나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인물이었구나 하며 내심 놀랐다. 그리고 그 시선은 계산을 마친 후 절정이 되었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은 후 봉투를 들려고 하는 은유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나타나 봉투를 가져갔다.

“어? 제가 들게요!”

“됐어.”

“그럼 같이 들어요! 물건 많아서 무거운데…….”

“안 가?”

“가, 가요!”

양손에 든 봉투 때문에 팽팽해진 와이셔츠를 보며 여자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게다가 그런 남자를 졸졸 쫓아가는 작은 여자. 은유가 진심으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집에 도착한 후 은유는 냉장고에 장본 음식들을 잘 정리해두었고 그 동안 샤워를 마친 낙원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저 씻을게요.”

“어.”

은유는 깨끗하게 씻고 집에서 입는 잠옷 원피스로 갈아입고는 기초 화장품을 바르고 가방에 넣어둔 책자를 꺼내 펼쳤다. 이제 다음 주에 중간고사가 치러지고 나면 10월 둘째 주에 축제가 열린다. 도서실에서도 도서부가 주관하는 행사를 열기로 했는데 다음주부터 그 준비를 시작해야 해서 계획서를 살펴봐야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낙원은 심각한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아있는 은유를 보고는 팔짱을 끼고 방문에 기대섰다.

“왜 그래.”

“아,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은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계획서를 들어 보였다. 처음 준비해보는 축제라 더 긴장이 되고 걱정이 되었다.

“이번 축제 계획서 보고 있는데 걱정이 돼서요…….”

은유의 고민에 조용히 옆으로 다가와 앉은 낙원이 계획서를 손에 들고 한 장 한 장 넘겼다. 계획서만 봐도 많이 준비하고 고민한 티가 났다.

“잘 했는데 왜.”

“그래도 처음 하는 거니까……. 혹시라도 망치게 될까 봐 걱정도 되고…….”

작은 한숨을 내쉬던 은유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들어 낙원을 쳐다보았다.

“저기……. 낙원씨. 저 내일 외출 좀 해도 돼요?”

“어디 가는데.”

“축제 준비물 사야 해서 송선생님이랑 문고에 가기로 했어요. 사서 도서실에 놓고 오려구요.”

“그래.”

두 사람은 각자의 침대로 들어가 각자의 스탠드를 켜고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었다. 계획서를 들고 끊임없이 훑어보는 은유의 모습에 낙원은 또 다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후 집안일만 하다가 제 일이 생겼다는 것에 기쁜 것인지 얼굴이 더 밝아 보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제 눈치를 보는 건 여전했지만.

“아 참. 낙원씨네 반에 아영이라는 친구 있어요?”

책으로 시선을 돌렸던 낙원은 옆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다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잔뜩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마치 제 반에 있는 학생들 중 한 명 같았다.

“어. 왜?”

“그렇구나. 그 친구 오늘 처음 보는데 강준이 따라서 왔다고 하더라구요. 잘 부탁 드린다면서 낙원선생님네 반이라고 하는데 너무 귀여운 거 있죠. 아영이가 강준이를 많이 좋아한대요.”

도서실에 가랬더니 진짜 갔구나, 김아영. 하여간 행동 하나는 참 빠른 녀석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말도 할 정도로 용기도 있고.

“어. 이강준이 인기가 많아.”

“맞아요. 저도 송선생님이랑 정선생님께 들었는데 강준이가 공부도 잘하고, 외모도 잘생기고, 성격도 좋아서 따르는 친구들이 많대요. 얘기 해보니까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말도 예쁘게 하더라구요.”

어느 샌가 조잘거리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 은유의 모습에 낙원은 가끔씩 대답을 해주기도 하고 맞장구도 쳐주며 묵묵히 그 이야기들을 들어주었다. 결혼 후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마냥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겪고 나니 꼭 그렇지 만도 않았다.

그건 은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섭게만 느껴지던 남편이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을 보고 놀랐고, 그런 모습에 신이 나 더 이야기를 하는 제 모습도 놀라웠다.

결국 한동안 입을 쉬지 않던 은유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들었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낙원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제 스탠드를 제외한 불을 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습관이 되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잠결에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에 잠에서 깬 적이 있다. 물을 마시려고 일어났던 은유가 어두움에 익숙지 못해 침대에 다리를 부딪힌 것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잠에서 깰까 봐 불도 켜지 못한 것임을 알아차린 그는 그 날 이후로 항상 자신의 침대 쪽 스탠드를 켜두었다. 원래 불을 켜두면 잠을 잘 못 잤는데 이것도 익숙해졌는지 이젠 스탠드를 켜두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그러나 낙원은 이런 변화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는 자신의 침대에 들어가 등을 돌리고 누워 눈을 감았다.

.

쉬는 날임에도 일찌감치 일어난 은유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침식사를 차리기 위해 정리해둔 식재료 몇 가지를 꺼내놓았다.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미리 풀어둔 계란을 부어 약 불에 익혀 스크램블을 만들고 양송이버섯을 적당한 크기로 썰어 볶고 소시지를 올려놓고 토스트기에 빵을 구웠다.

맛있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는지 침대 위에서 뒤척이던 낙원이 몸을 일으켰다.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보니 아직 8시도 채 되지 않았다.

잠시 침대에 앉아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는 마른 얼굴을 쓸며 밖으로 나가자 이미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준비중인 은유가 보였다. 그런데 오늘은 옷차림이 조금 달랐다.

이틀 동안 정장 입은 모습만 봤는데 오늘은 직장인이 아니라 여대생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쇄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진 갈색의 머리칼은 단정하게 귀 뒤로 넘어가 있었고 하얀 블라우스에 청바지는 굉장히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일찍 일어났네.”

“아, 일어났어요? 죄송해요. 좀 시끄러웠죠? 더 주무실래요?”

오랜만의 외출 때문인지 은유는 제법 신이 나 보였다. 그 모습에 낙원은 이상하게 마음 어딘가가 불편함을 느꼈지만 별로 크게 개의치 않으며 식탁 앞에 앉았다.

“다 한 것 같은데 먹지.”

“네. 잠시만 기다려요. 음, 오렌지주스랑 우유 중에 뭐 드실래요?”

“내가 꺼낼 테니까 마저 해.”

낙원이 냉장고에서 시원한 주스를 꺼내 예쁜 유리컵에 따라 각자의 앞에 올려놓았고, 은유도 넓은 접시에 토스트와 소시지, 버섯, 스크램블 에그, 베이컨을 담아 내왔다.

“아침부터 커피 드시면 속 안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준비 안 했는데, 괜찮아요?”

“어.”

여전히 대화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식사 시간이었지만 웬일인지 분위기가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다. 은유는 낙원이 조금 편해진 건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야만 했다. 편해지기는 개뿔. 여전히 저 무표정인 얼굴을 보고 있자면 식은땀부터 흐르는 기분이다.

식사 후 설거지를 하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테이블을 정리하며 툭 물었다.

“어디서 만나는데.”

“학교 근처에 문고요!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학교 근처면 꽤 먼데. 테이블을 닦은 행주를 싱크대에 옆에 내려놓으며 낙원이 다시 한 번 툭 던졌다.

“데려다 줄게.”

“네? 아, 아니에요! 모처럼 쉬는 날인데! 집에서 편하게 계세요. 전철 타면 금방이에요.”

“갈아타야 되잖아.”

“에이, 한 번인데요 뭐. 괜찮아요!”

여전히 제가 불편한 것 같은 모습에 낙원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본인이 괜찮다는데. 게다가 같이 있는 걸 더 불편해하기도 할 거고.

욕실로 들어가 양치를 하고 나온 은유는 화장대 앞에 앉아 옅은 분홍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다시 한 번 머리를 정돈했다.

가방을 들고 거실로 나온 은유는 소파에 앉아 있는 낙원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점심은 찌개 있으니까 반찬이랑 해서 꼭 챙겨 드세요. 아무래도 점심 전까지는 조금 촉박할 것 같아서요.”

“그래.”

“아 참. 그리고 과일은 사과랑 배랑 깎아서 냉장고 아래쪽에 넣어놨어요. 꺼내서 바로 드시면 돼요.”

“알았어.”

현관으로 향하는 내내 은유는 뭐가 그렇게 걱정이 많은지 가스 불 잘 꺼라,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해라 등등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구두를 신었다. 듣다 못한 낙원이 조용히 은유를 불렀다.

“심은유.”

“네?”

“내가 애냐.”

“아……. 하하. 아뇨. 그럼 저 다녀올게요!”

은유가 인사와 함께 집을 나섰고, 문이 닫히고 잠금 장치가 작동하자 낙원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혼 후 집에 혼자 남겨진 건 처음이다.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항상 은유와 한 집안에 같이 있었는데. 홀로 남겨진 낙원은 벌써부터 지루한 표정으로 긴 다리를 뻗어 현관을 지나 거실 소파로 향했다. 아무래도 하루가 조금 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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