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로운 모습2016.10.07.
은유는 이 상황이 참으로 난감했다. 이번 주에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정리하고 있는 도중에 출입카드 찍는 소리가 들려 누군가 하고 봤더니 낙원이었다.
다현은 강선생님이 어쩐 일이냐며 놀라워했고, 낙원이 별다른 말 없이 그저 책을 보러 왔다고만 하자 그 대답을 하는 모습도 멋있다며 몰래 은유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현이 도서실 입구 책상에 앉아 서류 업무를 보는 동안 은유는 안쪽에서 책을 채워 넣었다. 하필 바로 옆에 낙원이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지만 일단 맡은 일이 있기에 은유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책을 하나하나 정리해갔다.
잠시 은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조용하던 공간에 진동소리가 울렸다.
제 건가 싶어 휴대폰을 꺼내봤지만 아니었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던 낙원은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책을 뒤집어 놓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동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위에 놓인 민트색 케이스의 휴대폰이 보여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대폰은 왜 자꾸 깜빡깜빡 하는 것인지.
액정을 확인한 낙원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은 그의 입에서 제법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요.”
“[…누구……. 낙원이냐?]”
“네. 아침부터 무슨 일이신데요.”
“[이놈아! 은유는 어디 가고 네가 받아?]”
주위를 둘러보던 낙원은 마른 이마를 쓸며 책장에 등을 기대었다.
“잠깐 자리 비웠어요.”
“[가만. 지금 학교 아니냐? 너희 같이 있어?]”
“네.”
“[어딘데? 어디에 있는데 이리 조용해?]”
금새 목소리가 돌변하는 할머니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게 느껴져 낙원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도서실이요.”
“[도서실? 네가 거기는 왜 갔어? 혹시 은유 보러 간 거냐?]”
“뭐, 겸사겸사.”
“[이 놈이! 할미 놀려?]”
“전화는 왜 하셨어요.”
“[우리 아가 보고 싶어서 했지. 오전에는 별로 안 바쁘다 길래.]”
당연히 그랬겠지. 그 성격에 할머니한테 바쁘다고 전화 잘 못 받는다고 했겠나. 하여간 심은유.
“도서실도 바빠 할머니. 여기 직장이에요.”
“[알아들었어 이놈아. 그나저나 정말로 은유 보러 간 거야? 네가 직접?]”
“책 보러 왔습니다. 이만 끊어요 할머니. 이따 전화 드리라고 할게.”
“[알았어. 네가 색시 잘 챙겨줘. 알았지?]”
“내가 안 챙겨도 할머니가 잘 챙기시네.”
“[따박따박 말대꾸 하고는!]”
“알았어요. 진짜 끊어요.”
“[오냐. 너도 수고해라.]”
전화를 끊고 기댔던 몸을 떼자 은유가 책 몇 권을 품에 들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러다 떨어뜨릴 것 같은데…….
투두둑.
“으악!”
아니나 다를까.
작은 소리와 함께 책을 떨어뜨린 은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책을 다시 줍기 시작했고, 그런 은유의 앞에 커다란 손이 나타났다.
“…어? 낙원- 아니. 강선생님.”
“조심해.”
“네. 감사합니다.”
낙원이 주운 책을 책장까지 옮겨다 주었고,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는 은유 대신 책꽂이에 잘 꽂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그가 은유에게 내밀었고, 은유는 화들짝 놀라며 받아 들었다.
“휴대폰 잘 챙겨.”
“네, 죄송해요.”
“아까 할머니한테 전화 왔었어.”
“할머님이요?”
화들짝 놀라며 통화목록을 확인하는 모습에 낙원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요? 무슨 일 있으시대요? 그런 거 아니죠?”
쌍꺼풀이 없는 큰 눈동자에 할머니를 걱정하는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낙원씨!”
그 단어에 잠시 놓고 있던 정신을 잡은 그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별 일 아니야. 뭘 그렇게 걱정해.”
“그래도요. 급한 전화였을 수도 있잖아요. 휴대폰 정말 잘 챙겨서 다녀야겠어요.”
친정 부모님께 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의 식구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면서.
“……그래.”
“할머님께는 이따 제가 다시 연락 드려볼게요. 책 마저 보세요.”
계속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낙원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은유 또한 별다른 말 없이 하던 일을 이어갔다.
1교시를 마치는 종이 울리고 낙원은 책을 있던 자리에 꽂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선생님.”
입구로 걸어가던 낙원은 도서실로 들어오는 강준과 마주쳤다. 낙원의 시선이 강준의 손에 들린 책 한 권으로 향했다. 은유가 읽던 책과 표지의 느낌이 비슷했다.
“도서실에는 어쩐 일이세요?”
“책 보러. 간다.”
“네. 이따 뵐게요.”
강준이 낙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쳐 간 곳은 다현과 은유가 있는 공간이었다. 고작 하루였으면서 꽤 친해진 듯한 느낌에 낙원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짐을 느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상하게 발이 좀 무거운 것 같다.
점심 시간.
오늘도 다현과 윤주와 함께 식당으로 향한 은유는 자신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웃기는 웃는데 아마 어색함으로 인해 엄청나게 웃긴 얼굴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슬그머니 식당을 둘러보던 은유는 동료 교사들과 식사중인 낙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정말 다행히도 오늘은 낙원의 옆자리가 아니라 무려 한 테이블 떨어진 뒤에 앉을 수가 있었다. 비록 말소리는 들리겠지만 그래도 꼭 붙어 있는 게 아니란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강준이가 심선생 좋은가 봐. 걔가 그렇게 막 아무한테나 잘해주고 그런 애가 아닌데. 착하기는 해도 애가 뭐랄까, 선이 딱 있거든.”
“아 정말요? 얘기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강준이 착한 것 같아요. 예의도 바르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그래. 걔는 진짜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니까.”
“강쌤!”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뒤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 여자의 숟가락이 허공에 붕 떴다. 뭐지, 이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는.
다현과 윤주의 시선에 덩달아 뒤를 돌아본 은유의 입술이 놀라움으로 작게 벌어졌다.
“쌤. 식사 다 하셨어요?”
“아직.”
“그럼 식사 끝나시고 이거 드세요! 쌤 모카 좋아하시죠?”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커피 한잔을 건네며 낙원을 향해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낙원이 모카를 좋아하는 건 어찌 알고.
“그래. 고맙다.”
“다음에 저도 맛있는 거 사주세요!”
“그래.”
여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친구들과 함께 총총거리며 식당을 나섰고, 밥을 다 먹었는지 식판을 들고 일어서던 낙원과 눈이 마주친 은유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와. 대박. 요즘 애들 진짜 적극적이다.”
“그니까요. 강선생님 결혼하신 거 알면서도 저렇게 지극정성이니, 참 대단해요.”
‘결혼’이라는 그 단어에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밥 먹기에 열중했다. 다행히도 낙원은 이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없었다.
그나저나 무슨 선생님이 인기가 저렇게 많은지. 온 여학생들의 눈에 하트가 뿅뿅 박혀 낙원이 떠난 자리를 황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완전 연예인이나 다름 없었다.
식사를 마친 세 여자는 잠도 깰 겸 카페에 들려 커피를 사고 교정을 거닐었다. 이제 제법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산책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가 되었다.
“근데 심선생님은 원래 커피 안 마셔요?”
“아뇨. 저 커피 좋아하는데 추울 때는 거의 고구마 라떼 많이 마셔요.”
“그렇구나. 입맛도 참 귀엽다.”
노강고등학교는 겉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ㄷ’자 모양의 학교 건물 가운데에 운동장이 있었고 그 둘레로 커다란 정원처럼 산책로가 꾸며져 있었다. 때문인지 학생들, 교사들 할 것 없이 이렇게 날이 좋을 때면 밖으로 나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거나 산책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산책로를 걷던 세 여자의 눈에 익숙한 남성이 포착되었다.
“어머나 세상에. 또 시작이네.”
“네? 뭐가요?”
다현의 말에 은유가 궁금한 얼굴로 묻자 윤주가 그녀의 시선을 지나쳐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끝에는 한 여학생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는 낙원이 있었다. 한 손에는 모카를 들고 긴 다리를 꼰 채로. 참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강 선생님한테 고민상담 하는 학생들이 진짜 많거든.”
“아……. 학생들 얘기를 되게 잘 들어주시나 봐요.”
집에서는 말도 없는 사람이 학생들 고민상담은 저렇게 성심 성의껏 해주는 모습이라니. 참으로 신기한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응. 성격은 진짜 무뚝뚝하고 차가우신데 학생들이랑은 잘 지내시더라고. 애들 말에 의하면 말도 잘 통한다고 하고, 얘기도 잘 들어준다고 하고.”
다현과 윤주의 설명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은유는 시선을 돌리던 낙원과 눈이 마주쳤다. 시선을 돌릴 타이밍을 놓친 은유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낙원 또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심선생, 뭐해? 가자.”
“네? 아아, 네.”
은유는 아무도 모르게 낙원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떠났다. 은유가 떠난 자리를 보던 낙원의 눈 앞에 여학생의 손이 휘휘 저어졌다.
“선생님!”
“어. 아, 미안.”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낙원의 질문에 여학생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이 꼭 누구와 겹쳐 보여 잠시 미간을 찌푸린 낙원에게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모르겠어요. 강준이는 너무 틈을 안 주니까.”
“도서실에 가 봐. 강준이 자주 가잖아.”
“네. 안 그래도 저도 오늘부터 강준이 따라서 도서실 가려구요! 교실에 있으면 공부밖에 안 하니까 말 걸기도 좀 눈치 보이고…….”
“그래. 얼굴 자주 봐야 정도 들지.”
다른 선생님이라면 이 중요한 시기에 짝사랑이 웬 말이냐고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겠지만 낙원은 달랐다. 다시 오지 않을 아이들의 예쁜 청춘이고 앞으로의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될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이 순간 또한 지나가면 다신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낙원은 여학생을 다그치지 않고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잘 해봐. 그렇다고 너무 공부 손 놓지도 말고. 네가 알아서 잘 하겠지만.”
“네! 감사합니다!”
“이만 들어가 봐.”
“선생님은요? 안 가세요?”
“난 좀 더 있다가.”
유난히도 파란 하늘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조금 더 햇빛을 쬐고 싶어져 낙원은 홀로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나뭇잎이 굴러가는 소리. 전부 다 듣고만 있어도 마음이 편해지는 소리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느긋함에 낙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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