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5화 (5/112)

5. 할머니의 소원2016.10.06.

“……뭘 해?”

“뭐긴 뭐야. 결혼이지 이놈아.”

내일이 토요일이라 기쁜 마음으로 퇴근 후 집에 왔다. 그런데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들려온 말에 낙원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뭘 잘못들은 것 같은데.

“누가 결혼을 해.”

“누구긴 누구야. 너지.”

결혼? 누가. 내가?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해.”

“있다. 할머니가 찍어 둔 아이가.”

30년을 살아온 인생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태어나보니 할아버지는 대기업 회장에 할머니는 재단 이사장님, 아버지는 계열사 사장님으로 재벌가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경영수업부터 시작해서 온갖 수업이란 수업은 다 받고 자라며 오로지 차기 경영을 맡길 사람으로만 키워졌다. 물론 가족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았지만 제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들이 들었다면 배부른 소리라고 미쳤다고 생각했겠지만 낙원은 그런 삶이 싫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평일에는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니며 세상 보는 시야를 넓혔다. 그러면 그럴수록 경영은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범대를 가겠다고 선언했다. 원래부터 꿈이 교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성적은 항상 우수했지만 무얼 하고 싶은지는 몰라 방황하던 고3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은사님이 해주었던 말이 불씨가 되었다.

‘돈만 많다고 행복한 게 아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한 거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것만큼 이루기 힘든 것도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낙원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처럼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부모님은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겠거니 생각하셨는지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야기를 전했을 때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절대 안 된다며 할아버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것만큼은 들어줄 수가 없다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그를 타일렀다.

그러나 낙원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고, 모든 가족들의 반대 속에서 유일하게 낙원의 편에 서준 사람은 다름아닌 할머니 노진희 여사와 형인 무원이었다.

유난히 할머니에게 약했던 할아버지도 하는 수 없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고, 낙원은 모두의 축복 속에 사범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입학식을 하던 날 할머니와 약속 한 가지를 했다.

‘나중에 너도 할미 소원 하나 꼭 들어줘야 한다.’

‘알았어요.’

‘건성으로 말고 이놈아. 진짜로 들어줘야 돼. 뭐가 됐던지.’

‘네. 꼭 들어드릴게요.’

그 약속을 한 후 10년이 지난 오늘. 까맣게 잊고 있던 그 약속이라는 무기를 할머니가 꺼내 들었다. ‘결혼’이라는 카드로.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해.”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할미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그걸 결혼으로 하라는 게 말이 돼?”

“안될 건 뭐 있어 이놈아. 네가 여자가 있기를 하냐, 결혼 생각이 있기를 하냐?”

할머니 입장에선 그럴 만도 했다. 보통의 재벌가라면 자녀들의 결혼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집안과 집안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데 노진희 여사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자식들의 결혼으로 장사를 하는 건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은 탓에 노강그룹 집안에 정략결혼을 한 사례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재벌 가들과 달리 ‘이혼’이라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싫어하시면서 대체 왜.

“정략결혼은 절대 안 된다며.”

“너는 예외다 이놈아.”

“할머니.”

“더 말할 거 없어. 내일 그 아가씨랑 밥 먹기로 했으니까 준비해.”

“진짜 이럴 거야?”

“그래. 이럴 거다. 약속 지켜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물어봤지만 할머니의 속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절대 싫다고 버티던 그는 할머니에게 등짝을 몇 번 내어주고 나서야 식사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은유를 처음 보았다.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때는 더 어색해했고 불편해했다, 자신을. 은유 또한 좋아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엄청난 추진력으로 결혼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커다란 식 대신에 공기 좋은 곳에서 양가 어른들과 가까운 친구들만 초대해서 작게 이루어진 결혼식을 올렸다.

웨딩사진은 친구인 준연이 촬영해주었고 신혼여행은 학기가 막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뤘다. 그렇게 결혼을 했고 한 달이 지났다.

그리고 할머니는 여전히 자신과 은유를 더 가깝게 만들려고 노력 중이시다. 그게 할머니 생각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옛 생각에 젖어있는 사이 샤워를 마친 은유가 침실로 들어왔고, 그와 동시에 상큼한 자몽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던 은유와 눈이 마주친 낙원은 먼저 베개를 베고 누웠다.

“잘 자라.”

“네, 네. 안녕히 주무세요.”

기초화장품을 바른 후 발소리를 죽여 불을 끈 뒤 침대 안으로 들어선 은유는 밀려 오는 피곤함에 이불을 폭 덮고는 눈을 감았다. 은유는 오늘도 눈치채지 못했다. 낙원의 스탠드가 켜져 있는 것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은유는 비어있는 낙원의 침대에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다 밖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마음을 놓고는 재빠르게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초스피드로 화장을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달칵.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막 욕실 문을 열고 나온 낙원과 마주쳐 인사를 하던 은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얀 목욕가운 사이로 살며시 보이는 탄탄한 가슴 근육과 젖은 머리칼이 온 몸으로 섹시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참 심장에 해로운 장면이었다.

급히 정신을 차린 은유가 낙원을 지나쳐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고, 제 차림새를 깨달은 낙원은 피식 웃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침실을 지나쳐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바쁘게 주방을 오가는 작은 뒷모습이 보였다.

구수한 냄새가 나는 된장찌개와 갖은 반찬들이 놓인 것과 달리 은유의 자리 앞에는 허연 전복죽 하나만 놓여 있었다.

마주앉아 아침식사를 하고 외출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나란히 집을 나섰다.

“저기, 낙원씨.”

현관 앞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낙원이 고개를 돌렸고, 우물쭈물하던 은유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전철 타고 갈게요.”

“왜.”

“네?”

“차 두고 왜.”

당연히 알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한 물음에 은유는 더 당황스러워졌다. 당연히 같이 있는 걸 보면 안 되니까 차도 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 혹시 다른 사람들이 보면…….”

“학교 앞에서 내려줄게.”

“그, 그래도.”

“나와 얼른.”

거절할 수 없는 낙원의 말에 은유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된다니 그거 하난 정말 좋다.

출근 시간이라 차는 당연히 막혔다. 그 수많은 인구의 대부분이 서울에 산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닌 모양이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더한 것 같으니,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그러고 보면 낙원도 참 대단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법도 한데, 항상 자가용을 이용해서 출퇴근을 한다니. 자신은 무서워서 면허도 못 땄는데…….

출발한 지 거의 50분쯤이 되어서야 낙원의 차가 학교 근처 지하철역에 멈췄다.

“감사합니다!”

낙원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차에서 내린 은유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는 게 보여 헛웃음이 나왔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들키기 싫어하는 것일까 싶기도 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게 당연했다.

낙원은 차를 다시 출발시켜 학교 주차장에 주차를 했고, 교무실에 들어가자 많은 교사들이 그를 반겼다. 특히 낙원의 대각선 맞은편에 있는 2학년 2반 담임인 주아가.

“좋은 아침이에요, 강선생님.”

“예.”

낙원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자 뒤이어 들어온 다현과 은유가 교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서들도 교무실에서 일을 보곤 했는데 은유의 자리는 낙원의 바로 맞은편이었다. 이것 또한 이사장인 작은 아버지의 계획임을 눈치 빠른 낙원만 알고 있었다.

어김없이 시작된 아침조회는 앞으로 중간고사가 다가왔으니 아이들 지도에 더 힘써달라는 당부의 말을 다섯 번이나 듣고 나서야 끝이 났다.

다현이 화장실에 들렀다 가겠다고 해서 먼저 몸을 일으킨 은유는 본의 아니게 낙원과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1,2학년 건물을 지나야 3학년이 사용하는 건물로 갈 수가 있었는데 그 길마다 모두 낙원의 은혜로운 얼굴을 보겠다며 여학생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가 있었다.

하긴, 자신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잘생긴 선생님이 있다 하면 여학생들은 그 선생님에게 푹 빠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커서 보고 있으니 참 귀엽게 느껴졌다.

“선생님!”

3학년 건물로 넘어가려는데 누군가 두 사람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놀란 은유가 흠칫하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낙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바로 뒤가 계단이었기에 발을 잘못 디뎠다간 크게 다치기가 쉬운 곳인지라 반사신경이 빠른 그가 손을 뻗어 은유의 팔을 잡아당겼다.

힘 조절을 잘한 덕분에 낙원의 품에 안긴 꼴은 면했지만 여학생에게는 이미 눈이 하트로 변할 만큼 멋진 광경이었다.

그런 여학생에게 낙원의 무거운 시선이 닿았다.

“계단에서는 조심해야지.”

“네, 선생님. 죄송합니다.”

여학생의 사과에 낙원은 은유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놀란 걸 빼고는 다행히도 다치지 않은 모양이다.

앞서 걷던 낙원이 뒤를 돌자 멍하니 서 있는 은유가 보였다.

“심은유 선생님. 안 갑니까?”

“……네? 아, 가요!”

아직 넓은 학교 지리를 잘 모르는 은유는 급히 낙원을 따라 나섰고, 창문에 붙어 있던 여학생들은 너도나도 부럽다며 은유에게 빙의가 되어야만 했다.

1,2학년 건물보다는 제법 조용한 3학년 건물.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 다들 예민한 탓일 것이다.

3층 계단으로 올라서며 낙원이 뒤를 돌아 은유를 쳐다보았다.

“수고해.”

“네! 낙원- 아니아니. 강선생님도 수고하세요!”

‘강선생님’이란다. 참 나.

어이 없다는 표정의 낙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유는 또 무언가 신이 나서 종종걸음으로 4층으로 사라졌다.

3학년 2반으로 들어온 낙원은 자신에게로 날아든 아이들의 인사를 일일이 다 받아주며 눈을 마주쳐주었다. 그것이 유난히 아이들이 낙원을 잘 따르는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였다. 눈을 마주해주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어떤 일이든 보채지 않고 믿고 기다려 주는 자신들의 선생님. 다른 선생님들처럼 말이 많다거나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지만 낙원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이들에게서 믿음을 쌓아가고 있었다.

“아침들은 잘 먹었고?”

“네! 선생님도 드셨어요?”

“그래.”

낙원의 대답에 짓궂은 남학생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예쁜 아내 분께서 차려주셨어요?”

그 남학생의 질문에 여학생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한꺼번에 남학생에게로 쏠렸다. 모두들 낙원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멘붕에 빠졌었지만 실제로 그의 입에서 그의 결혼생활이나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학생들도 낙원의 아내에 대한 존재를 저 멀리 치워놓고 마음껏 눈요기를 하며 가슴 설레어 하고 있었는데. 저걸 쥐어 패 말아.

그런 아이들의 기류를 느낀 것인지, 느끼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의 낙원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어.”

“……꺅!!!!!”

그 한마디에 조용했던 교실은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아이들의 함성소리로 가득 찼다. 다들 놀라며 뛰어 와 무슨 일인지 보기 바쁠 테지만, 이렇게 낙원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비명을 내지르는 일이 비일비재 한 것을 이제 다들 알고 있기에 쫓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다들 속으로 아, 오늘은 다른 날보다 비명이 더 크구나. 오늘은 더 치명적이었구나 하고 느낄 뿐이었다.

자신의 입술 위로 기다란 손가락을 가져가자 아이들이 합죽이가 되어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교실 시끄럽다고 나 혼난다.”

작은 말 하나에도 이렇게 일심동체가 되는 아이들이 귀여워 더 놀려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꽤 지체가 되었다.

“특별한 전달사항 없다. 오늘 하루도 수고해라.”

“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뒤로하고 교실을 나선 낙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교사 되기를 잘했다. 그 때 지지해준 할머니도 고맙고. 그러니 할머니 소원도 좀 들어드릴까 하는 생각에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본 그가 1교시 수업이 없음을 생각하고는 4층 도서실을 향해 발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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