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예상치 못한 퇴근길(2)2016.10.05.
골목길을 나서자마자 신호가 걸려 횡단보도에 멈춰 섰는데 하필 이제 막 하교를 하는 학생들이 굉장히 많은 곳이었다. 은유는 저도 모르게 급하게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고, 그 모습을 보던 낙원은 높낮이가 없는 미성으로 말했다.
“썬팅 진해서 안보여.”
“아……. 하하…….”
괜스레 민망해진 은유가 경직된 입 꼬리를 애써 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낙원의 차에 타는 건 시댁에 갈 때를 제외하곤 없었기에 적응이 안 되는 것이 당연했다. 결혼 후에 시댁에 간 건 총 두 번이니 이 차에 탄 것도 겨우 두 번이다. 이러니 알 리가 없지. 암.
“끝났으면 끝났다고 왜 말이 없어.”
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날아든 낙원의 목소리에 놀란 은유가 흠칫하며 ‘네?’하고 묻다가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죄송하다며 사과부터 건넸다. 또 움츠러든 탓에 낙원의 얼굴에 불편함이 잠시 머물렀던 것은 알 수가 없었다.
“퇴근하면 한다고 얘기 해.”
“네, 다음부턴 그럴게요.”
학교는 강남이고, 집은 목동이어서 차를 타고 꽤 오랜 시간을 이동해야만 했다. 게다가 퇴근 시간인지라 도로에 차가 많아 길이 막혀 일찍 가는 건 포기해야만 했다.
어색한 공기가 가득한 차 안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조용했던 탓인지 제법 크게 울려 은유의 얼굴이 잘 익은 사과마냥 붉어졌고, 앞을 보며 운전하던 낙원이 힐끔 그녀를 쳐다보았다.
“배고파?”
“아뇨!”
또. 거짓으로 나온 대답에 낙원의 미간이 보기 좋게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본 은유는 다시 한 번 제 입과 뱃속을 탓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고, 잘 달리던 낙원의 차가 갑자기 차선을 변경하더니 한 길가로 들어섰다.
끽.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세운 낙원이 안전벨트를 푸르고 시동을 껐다.
“내려.”
“네?”
은유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먼저 차에서 내린 낙원이 그녀를 기다렸고, 영문도 모른 채로 뒤따라 내린 은유는 낙원이 향하는 곳으로 발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세요?”
“예.”
낙원이 들어선 곳은 다름 아닌 죽 전문점이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안쪽에 앉은 은유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른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게 안에는 꽤 사람들이 많았다.
똑똑.
내부를 구경하던 은유는 테이블을 두드리는 작은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고, 낙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주문해.”
“네? 저요?”
“그럼 나겠어.”
배는 고프고, 속은 불편했는데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마침 가는 길에 죽 가게가 있을 줄이야. 아무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보다 하며 은유는 매콤한 낙지김치 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낙원이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고, 은유 대신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전복죽 하나요.”
....주문하라며. 그럼 나겠냐고 물을 때는 언제고, 멋대로 전복죽을 시켰다. 이건 무슨 심술인가 싶어 은유가 낙원을 쳐다보자 그가 되려 왜 그렇게 보냐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아니에요. 맛있겠다, 전복죽.”
영혼이라곤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말과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에 낙원은 순간 웃음이 날 뻔 했다. 체했다면서 자극적인 낙지김치 죽을 먹겠다 기에 전복죽을 시켰더니 저 표정이 되었다. 가만 보니 무슨 캐릭터를 닮긴 닮았다.
그 생각이 들자 강준이 떠오르며 괜히 기분이 묘하게 이상했다.
3시간 전.
“맛있게 드세요~”
석식을 먹기 위해 동료 교사들과 식당으로 온 낙원은 배식을 받은 후 자리에 앉았는데, 우연찮게도 다현과 윤주가 또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아내인 은유는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하다 입을 닫아버린 그 대신에 궁금증이 많은 사회 담당인 은혁이 대신 질문을 던졌다.
“어? 아까 그 새로 오신 심선생님은요?”
“아. 아까 점심에 먹은 게 체해서 저녁 안 먹는대요.”
“체했어요? 세상에. 얼마나 체하셨길래 저녁도 안 드신대요?”
“말도 마요. 점심시간 끝나고 보건실 데려가서 약 먹이고, 손 따고. 너무 긴장을 했었나 봐요. 아니 조퇴하라고 해도 괜찮다고 우기고.”
그렇지 않아도 소화장애가 있어 종종 체하곤 하는데 오늘 유난히 심하단다. 아마 점심 시간에 의도치 않게 저와 같이 식사를 해서였을 것이다.
“어? 강선생 벌써 다 먹었어?”
“예. 천천히 드세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밥을 몇 술 뜨지도 않은 낙원은 식당을 나와 학교 내 카페로 향했다. 다행히도 아직 문을 닫기 전이라 따뜻한 고구마 라떼 한잔을 주문하고 식기 전에 주려 도서실을 향해 빠르게 걷던 그의 앞에 한 여학생이 나타났다.
“선생님!”
“어.”
“선생님 지금 바쁘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차가우면서도 다정함이 느껴지는 말투에 얼굴이 붉어진 여학생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제 품에 들고 있던 문제집을 낙원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이거 진짜 급한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돼요?”
“……잠깐이면 돼?”
“네! 진짜 금방이에요!”
“알았어.”
그렇게 ‘잠깐’이라는 말에 교무실에 들어갔던 게 30분을 잡아먹었다. 결국 도서실에는 발도 붙이지 못한 채로 보충수업 준비를 해야 했고, 수업 시작 전 강준의 대화를 듣고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이야기를 할 정도라면 심각하게 아픈 건 아니었을 거다 하고 생각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불편한 기분을 느끼는 스스로가 더 불편했다.
보충수업을 마친 후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은유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티 내지 않겠다더니 혹시 혼자 퇴근을 한 것일까 싶어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다현과 함께 운동장을 걷고 있는 은유가 눈에 들어왔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져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낙원은 차에 올라 두 사람을 천천히 쫓았다.
“죽 나왔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커다란 그릇에 가득 담긴 죽을 보며 은유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죽이라도 그렇지, 혼자 먹기에는 굉장히 많은 양이었다.
“낙원씨. 좀 드실래요? 양이 너무 많은데…….”
“난 됐어.”
“……음.”
은유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낙원이 벨을 한번 더 눌렀고 직원이 금새 다가와 낙원을 보며 얼굴을 붉히고는 물었다.
“뭐가 필요하세요 손님?”
“포장용기 부탁 드립니다.”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낙원의 똑똑함에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보던 은유는 정신을 차리고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포장용기를 가져다 주었고, 은유는 용기에 죽을 덜어내고서야 한 수저 떠서 호호 불었다.
전복죽에 특별한 맛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몸에 좋은 거니 그러려니 하고 먹던 은유는 제게 향한 낙원의 시선에 당황스러웠다.
“왜……그렇게……보세요?”
“그냥.”
그 대답에 무어라 더 할말이 없어진 은유는 또 ‘하하’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다시 죽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고는 먹기에만 열중했다.
거의 다 먹어갈 때 즈음 낙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은유가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허리를 조금 숙여 은유를 쳐다보았다.
“커피 사러 갈 건데 뭐 마실래.”
“아. 그럼 저는 고구마 라떼요.”
“천천히 먹고 있어.”
“네!”
마침 딱 마시고 싶었는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혔다. 신이 난 은유가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자 때맞춰 돌아온 낙원이 은유에게 라떼를 건네고는 포장한 죽이 담긴 봉투를 들었다.
“어? 제가 들게요!”
“핸드폰 잘 챙겨서 나와.”
“아! 네!”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챙기는 사이 먼저 나선 낙원이 계산을 마쳤고, 은유는 후다닥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랐다.
“잘 먹었습니다. 라떼도 잘 마실게요.”
“그래.”
은유가 안전벨트를 매고 라떼를 한 입 마신 걸 본 뒤에야 낙원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시간은 늦어졌지만 속은 좀 편안해져서 나른해졌다. 배도 부르고, 고구마 라떼도 달달하니 맛있어 기분이 좋아진 은유는 창 밖의 야경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와……. 진짜 예쁘다.”
은유의 감탄에 슬쩍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낙원은 그녀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강 다리 위에서 보는 야경은 정말로 예뻤다. 혼자 운전을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옆에 은유가 있으니 혼자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은유가 창 밖을 구경하는 동안 차는 열심히 달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다. 나란히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기다렸고 그 때 가방 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할머님’
“여보세요?”
“[아가. 집에는 잘 들어갔니?]”
“할머님! 죄송해요! 제가 연락 드린다고 해놓고…….”
“[아니야. 아까 그렇게 끊고 나서 신경이 좀 쓰여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 네! 낙원씨랑 같이 집에 왔어요.”
공간 자체가 조용한 탓인지 휴대폰 너머로 ‘낙원이?’하며 놀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려왔다. 또 귀찮아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새어 나올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는 알림 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은유 대신 13층 버튼을 누른 그는 자신의 할머니와 통화를 하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 맞아요. 제가 배 사갈게요 할머님! 네! 음, 낙원씨랑 상의해보고 가기 전에 다시 말씀 드릴게요. 네. 에이,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잘 먹는데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마치 친손녀처럼 살갑게 이야기를 하는 얼굴에서 행복함이 보였다. 참 신기한 아이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자신과는 달리 붙임성도 좋고, 예의도 바르고.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고, 이번에도 낙원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은유가 그 뒤를 따라 들어섰다.
“네 할머니. 지금 막 들어왔어요. 네. 알겠습니다~ 얼른 주무세요. 네네. 좋은 꿈 꾸세요! 네~ 뿅!”
……. 저 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낙원의 손에 들린 봉투를 제 손으로 옮긴 은유는 주방으로 가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는 지친 몸을 이끌고 소파로 가 앉았다.
달칵.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후다닥 일어서는 은유를 보던 낙원이 주방으로 가 시원한 물을 한잔 따라 마셨다.
“씻고 쉬어.”
“네, 네! 낙원씨도 쉬고 계세요.”
빠르게 욕실로 들어가는 은유의 뒷모습을 보던 낙원은 다시 침실로 향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띵동 하고 문자 알림이 울렸다.
휴대폰을 들어 부드럽게 액정을 밀어낸 낙원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생겼다.
‘[강낙원이. 우리 손주며느리랑 같이 퇴근했다며?]’
발신자는 당연히 ‘큰 여사님’이었다. 그나저나 손주는 ‘강낙원이’고, 손주며느리는 왜 ‘우리 손주며느리’야?
“……한 건 무셨다 이거지.”
앞으로 더 피곤해질 것만 같은 진한 예감에 낙원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소원을 들어드리는 게 아니었는데.
낙원의 머릿속에서 5개월 전 그 날이 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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