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강선생님-3화 (3/112)

3. 예상치 못한 퇴근길2016.10.04.

“심선생. 정말 괜찮아?”

“네. 정말 괜찮아요. 약 먹어서 좀 내려간 것 같아요.”

“으휴. 엄청 긴장했나 보다. 너무 그럴 거 없어. 처음이라 그런 거니까 긴장 풀어. 응?”

“네. 감사합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난 후로 제대로 체기가 찾아와 얼굴이 하얘지고 속이 답답해져 다현이 급히 양호실에 데려가 약을 먹였다. 조퇴해도 된다고 했지만 첫날부터 그럴 수는 없었기에 은유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성난 속을 달랬다.

아이들이 도서실을 제일 많이 찾는 시간은 역시나 점심시간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단체 수업이나 자습이 아닌 이상 찾을 일이 거의 없었고, 그 시간 동안 사서들은 책을 정리하고 할 일을 마치면 쉬기만 하면 되었기에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른 학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도서실 운영 시간이 더 길다는 것이었다. 보통 학생들의 정규수업이 마치는 시간에 도서실도 같이 운영을 종료하는데, 노강고등학교는 7시까지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가 있었다. 사서들의 업무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지지만 그만큼의 복지와 급여를 주기 때문에 다현은 나쁘지 않다고 했다.

정규수업 시간이 끝나고 2차 보충수업이 시작하기 전 5시부터 6시까지 석식 시간이 주어졌다.

체기로 인해 식사 생각이 없는 은유는 도서실에 남아있겠다고 전했고, 다현은 윤주와 둘이서 식당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은유의 앞에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누군가 싶어 고개를 드니 처음 보는 얼굴의 한 남학생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 뭐 필요한 게 있니?”

“아뇨. 저 도서부 회장인데요.”

“아! 네가 그 강준이, 맞지?”

점심시간에 남편인 낙원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던 다현과 윤주가 언급한 또 다른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지금 은유의 옆자리로 와 앉는 강준이었다.

올해 고3인 강준은 낙원 못지않게 큰 키에 잘생긴 외모,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비상한 머리와 운동실력으로 낙원의 라이벌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강준도 참 잘생겼다. 낙원이 섹시하게 생긴 편이라면 강준은 조금 더 서글서글하고 귀엽게 잘생긴 느낌이었다.

“제 얼굴 뚫리겠어요 선생님.”

“히익. 미, 미안해.”

제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지는 은유를 보며 강준이 기분 좋게 웃었다. 표정이 잘 바뀌는 게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 보여 처음 본 은유가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근데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얼굴이 창백하신 것 같은데.”

“아, 아니야. 참, 저녁은 먹었니?”

“네. 먹고 바로 왔어요. 선생님들 식사 가셔야 해서. 선생님은 왜 안 가셨어요?”

“나는 그냥, 생각이 없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귀여운 캐릭터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은유를 보며 웃던 강준은 들고 온 책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어!”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강준의 시선이 다시 은유에게로 향했고, 은유는 강준이 올려놓은 책을 보고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거 재밌는데! 너도 이 작가 책 좋아해?”

“네. 묘사하는 게 마음에 들어서요.”

“나도! 난 얼마 전에 이거 다 읽고 다른 거 읽고 있어.”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나 있는 모습에 강준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스물 여섯이라고 들었는데, 열여섯을 잘못 말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해맑은 얼굴이었다.

책을 읽으려던 강준은 아예 몸을 돌려 은유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작가의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부분이 마음에 들었는지. 보통 또래들과 나눌 일이 없던 이야기를 하며 그 시간에 흠뻑 빠졌다.

“근데 되게 의외다. 내 주변에 남자가 이 작가 책 좋아하는 거 별로 못 봤는데.”

“제가 좀 감수성이 풍부해서요.”

“진짜 그런가 봐.”

리액션은 또 어찌나 좋은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공감할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표정이 변화했다. 도서부에 들며 친해진 다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선생님 저랑 좀 잘 맞는 것 같아요.”

“하핫. 그러게! 또 다른 책 보고 싶으면 얘기해. 여기에는 이 작가 책이 없더라구. 내가 빌려줄게.”

“네. 저 이거 다 읽으면 다른 거 빌려주세요.”

“응! 아, 미안해. 너 책 읽어야 되는데 내가 너무 시간 뺏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랑 얘기하는 거 재밌네요.”

누군가와 이렇게 책에 대해 공감하는 건 오랜만이라 은유 또한 신이 났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체기도 조금 내려가는 것 같고.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눌 동안 식사를 마친 다현이 도서실로 들어왔다.

“어쭈. 이강준 얼굴 폈다? 나보다 젊고 예쁜 선생님 오시니까 좋지?”

“당연한 걸 자꾸 물으시네.”

“이게!”

도서부 회장답게 도서실에 밥 먹듯이 출입하는 강준은 다현과 많이 친해 보였다. 마치 옆집 사는 누나를 대하는 듯한 느낌에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어? 심선생도 웃기야?”

“하하. 죄송해요. 진짜 사이 좋아 보여서요.”

“말도 마. 이강준 이거 자습 할 때마다 올라와서 귀찮게 하는데, 어휴. 심선생도 조심해.”

“귀찮은 제자는 이만 수업 들으러 갑니다.”

“오냐. 얼른 가라.”

다현과 은유에게 인사를 건넨 강준은 보충수업을 듣기 위해 아래층으로 향했다. ‘3-2’팻말이 걸린 교실로 들어선 강준이 자리에 앉자 앞문을 열고 들어온 낙원이 교실 안을 둘러보았다.

“수업 준비하자.”

낙원은 수업에 들어와 5분 동안 학생들이 수업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필기구를 챙기거나 전시간 수업이 늦게 끝나 화장실에 미처 다녀오지 못한 아이들을 배려해주는 시간이었다.

“이강준. 너 도서실 있다가 왔냐?”

“어. 왜.”

“또 송선생님이랑 투닥거렸어?”

매일 도서실에 드나들며 다현과 투닥거리는 강준의 일상을 꿰뚫고 있는 주한의 물음에 강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 웬일로?”

“새로 오신 사서 선생님 계셔. 그 선생님이랑 얘기했어.”

그 한마디가 어찌나 크게 들렸는지, 수업 교재를 넘기던 낙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중앙 뒤쪽에 앉아 있는 강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새로 오신 선생님? 누군데?”

“오늘 처음 오셨대. 나도 방금 뵀어. 엄청 동안이시더라.”

“예쁘냐?”

“미친 놈아. 그 생각밖에 없냐?”

“아 왜. 궁금하니까 그렇지!”

“예쁜 것보다 귀여우시던데. 그 뭐였지. 캐릭터 닮으셨는데.”

스윽.

굽혔던 허리를 편 낙원이 칠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강준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강준은 그런 그의 시선을 아직 느끼지 못했는지 주한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였다.

“캐릭터?”

“있어, 그런 게. 궁금하면 니가 직접 가서 봐.”

“내일 가봐야지. 너 갈 때 나 데려가.”

“하여간 너도 참. 책이나 펴 임마.”

주한의 등을 아프지 않게 때린 강준이 그제서야 칠판으로 시선을 옮겼고, 순간 제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낙원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것도 제법 매섭게. 그러나 기분 탓인지 언제 그랬냐는 듯 낙원은 교재를 넘기며 학생들을 집중시켰다.

“수업 시작한다.”

방금 좀 무서웠는데. 기분 탓인가…….

뒷정리를 마친 다현과 은유는 도서실 문이 잠겼는지 확인하고는 나란히 건물을 빠져 나왔다.

보충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하교하는 게 보였고, 그에 맞춰 선생님들도 퇴근하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꼭 학생 때로 돌아온 것 같지 않아?”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은유의 놀란 표정에 다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예쁘게 웃었다.

“나도 첫 출근할 때 많이 느꼈거든. 요즘도 가끔씩 느낄 때도 있고.”

“아…….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아이들도 착하고, 선생님들도 너무 좋으시고.”

“심선생이 착한 거지. 그러니까 다 좋게 보이지.”

문득 출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 은유는 집에 가자마자 할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줄 알았더라면 먼저 말씀드릴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심선생은 집이 어디야?”

“저는 오목교 역이요. 전철 타고 가면 돼요.”

“심선생도 좀 멀구나. 다른 방향이라 아쉽다.”

“그러게요.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감사는 무슨! 내가 더 고맙지. 일도 진짜 잘 해주고, 착하고.”

다현은 은유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은유 또한 다현의 관심에 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현과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진 은유는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을 꺼냈다.

최근 통화목록에 들어가 ‘할머님’이라는 이름을 누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할머님!”

“[아이구, 내 새끼. 이제 퇴근했어?]”

“네! 저 지금 막 학교에서 나왔어요.”

생각보다 들떠 있는 목소리에 노진희 여사는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 놓으며 소파에 앉았다. 뒤따라 주방에서 나온 수연이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들고 있던 과일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래, 첫 출근한 소감이 어때?”

“[할머님. 진짜 너무 감사합니다.]”

갑작스레 날아든 감사인사에 노진희 여사가 의아한 얼굴로 ‘감사?’하며 되물었고, 이내 기분 좋을 정도로 맑은 목소리가 휴대폰을 너머 전해졌다.

“[저 정말로 너무 좋았어요 할머님. 여기 선생님들도 너무 좋으시고, 학생들도 너무 착하고 예쁜 거 있죠? 할머님 말씀 듣기를 정말 잘했어요.]”

조곤조곤 전해오는 진심에 온 몸으로 따뜻함이 번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손주며느리인 은유는 이런 아이였다.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밝고, 감사할 줄 아는. 정말이지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아이였다.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나도 기분이 좋네. 힘들지는 않았고?”

“[네! 다들 너무 잘 챙겨주셨어요. 저 할머님한테 폐 끼치지 않게 더 열심히 할게요!]”

“하하. 녀석도 참. 네가 예쁜 아이니까 어딜 가도 사랑 받는 거야, 은유야. 알고 있지?”

항상 이렇게 다독여주는 말에 은유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늘 한결 같은 분이시다. 항상 자신을 사랑해주시고, 예뻐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그래서 은유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머님. 할머님한테 사랑 많이 받아서 그래요. 아, 진지는 드셨어요?”

“[그럼. 며느리랑 과일 먹으려고.]”

“우와. 무슨 과일 드세요? 저 얼마 전에 배를 샀는데 너무 달고 맛있는 거에요. 다음에 할머님 뵈러 갈 때 사갈게요!”

한참 이야기를 하던 도중 은유의 옆으로 검정 색의 세단 한대가 부드럽게 멈춰 섰고, 진하게 썬팅이 된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며 운전석에 있는 얼굴이 보였다.

“……어?”

“[아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란 은유가 말없이 그대로 서 있었고, 그런 은유를 보며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자는 기다란 팔을 뻗어 보조석 문을 열어주었다.

“타.”

“……아……. 네. 저기, 할머님. 죄송한데 제가 다시 전화 드려도 될까요?”

“[그래, 아가. 이따 다시 통화하자.]”

휴대폰을 가방 안에 넣은 은유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재빠르게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

“아! 네네.”

은유가 안전벨트를 맴과 동시에 차는 부드럽게 노강고등학교 앞의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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