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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강선생님-2화 (2/112)

2. 노강고등학교 얼굴2016.10.03.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비례하는 시린 목소리에 은유는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죄송해요…….”

“알긴 아나 봐.”

팔짱을 끼고 책장에 기대어 선 낙원으로부터 쏟아지는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야만 하는 은유는 딱 도망치고 싶어졌다. 아……. 그냥 할머님한테 절대 못한다고 할걸 그랬나.

“딴 생각 해, 지금?”

“아, 아니요…….”

학교에 있으니까 선생님한테 혼나는 학생이 된 기분이 들어 더 참담해졌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꾸물거리던 은유는 낙원의 눈치를 보며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었다.

“제, 제가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일도 하고 싶어서……. 정말로 죄송해요. 미리 말씀 드렸어야 했는데…….”

“할머니 생각이지.”

“아니요! 절대 아닌데요?”

망했다.

너무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대답에 은유는 망연자실했다. 이 입이 방정이지, 입이 방정이야.

“정말 제 생각이에요. 제가 할머님께 부탁 드렸어요.”

“그렇다고 해두자.”

“……저, 정말인데…….”

풀이 죽어 있는 은유를 가만히 쳐다보던 낙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렇게 된 거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아하니 은유도 할머니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어째 한동안 조용하시다 싶더라니. 이렇게 깜짝 선물을 주실 줄이야.

“…제, 제가 조심할게요. 어차피 학교에서는 제 존재도 모르잖아요. 제가 잘 처신할게요.”

생각으로 인해 흐려졌던 낙원의 초점에 은유의 얼굴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뭘 잘못했다고 저렇게까지 기가 죽어서는.

낙원은 잔소리나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은유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럼 수고해.”

“네, 네. 가세요.”

언제나 그랬듯 낙원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등을 돌려 멀어져 갔다. 낙원이 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은유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남편이 아니라 무슨 조선시대 임금님을 모시고 사는 기분에 심장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결혼 참 잘했다 심은유. 으이그.”

혼자서 도서실 내부를 둘러보고 청소를 하던 은유는 입구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혹시나 또 낙원이 온 것일까 싶어 마음을 졸이며 고개를 돌린 은유의 눈에 한 눈에 보기에도 예쁜 외모를 자랑하는 여자가 들어왔다. 은유를 발견한 여자는 반가움이 가득 담긴 얼굴로 은유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 안녕하세요!”

“아, 네네. 안녕하세요…….”

“아! 저는 원래 있던 사서 송다현이에요! 제가 오늘 너무 늦었죠? 죄송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가방을 한쪽에 놓고 은유에게로 다가오던 다현은 은유가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그녀의 손에서 청소도구를 빼앗아 갔다.

“쉬고 계시지! 뭐 하러 청소까지 하셨어요.”

“아……. 하하. 그, 그냥 앉아있기가 좀 그래서요…….”

“진짜 착하시다. 제가 안 그래도 교장선생님께 젊고 좋은 분으로 뽑아달라고 부탁 드렸는데!”

“하하…….”

윤주 못지 않게 엄청난 친화력을 자랑하는 다현은 이곳에 원래 있던 사서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따뜻한 율무차를 타서 은유의 앞에 놓아준 다현이 환하게 웃으며 나이를 물었고, 스물 여섯이라는 은유의 말에 자신은 스물 일곱이니 언니라며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달라며 그녀를 반겨주었다. 어쩜 이렇게 좋은 사람들만 만나는 것인지, 역시 자신이 인복 하나는 끝내준다는 생각과 함께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다현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다현에게서 도서실 이용 안내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듣고 궁금한 부분을 이야기하다 보니 금새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우리 학교에 도서부가 있어서 거기 속한 친구들이 12시 40분부터 이 곳을 봐줘요. 우린 그 때부터 2시까지 점심시간이에요.”

“아, 그렇구나. 도서실이 너무 예쁘게 잘 되어있는 것 같아요.”

“그죠? 우리 이사장님이 인테리어 센스가 참 좋은 것 같아요.”

다현이 말하는 그 ‘이사장님’이 낙원의 작은아버지 인 것을 아는 은유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도서실을 찾아왔다. 고등학생들이라면 유일한 쉬는 시간인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놀고 싶을 텐데……. 그런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깨졌다.

이 도서실에서는 조용히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따로 마련된 공간에서 친구들과 모여 토론을 나누거나 프로젝트 준비를 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니 학생들의 이용이 잦은 게 분명했다. 역시 작은 시아버지는 대단하신 분이다.

“언니! 은유씨!”

밝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윤주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서부 학생에게 도서실을 맡기고 뒤쪽 건물에 위치한 급식실로 향하는 동안 윤주는 쉬지 않고 오전에 있었던 일을 두 사람에게 해주었다. 어떤 학생이 수업시간에 어땠다는 둥, 두 사람과 점심을 함께 먹으려 일부러 40분을 기다렸다는 둥. 정말로 밝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급식실에 들어서자 이미 와서 밥을 먹고 있는 수많은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보였다. 급식실도 어찌나 넓고 쾌적한지 호텔 뷔페인 줄 알 정도였다.

“쌤!”

“어어! 밥 다 먹었어?”

“네! 어? 이 분은 누구세요?”

“아~ 우리 도서실에 새로 오신 사서 선생님. 완전 예쁘시지?”

“대박. 진짜 귀여우시다! 안녕하세요!”

식사를 마치고 지나가던 학생들이 윤주와 다현을 보며 인사를 건넸고, 처음 보는 은유에게도 스스럼 없이 선생님이라며 거기다 한술 더 떠 귀엽다며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었다.

“으응, 안녕.”

선생님도 아닌데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낯설어 은유는 어색해졌다. 요즘 아이들이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직 이렇게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도 있구나 싶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그 뒤로도 많은 학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식판에 음식을 받아 다현과 윤주가 앉은 곳으로 향하던 은유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자리 중에. 이 넓은 공간 중에, 왜 하필!

“맛있게 드세요~”

“네. 맛있게 드세요.”

선생님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는 밥을 먹고 있는 낙원 또한 있었다. 게다가 무슨 하늘의 장난인지 딱 세 사람 자리가 남았는데 다현과 윤주가 마주보고 앉았고 빈 자리라고는 낙원의 맞은편뿐이었다.

발바닥이 땅에 붙은 듯 느리게 걸으며 속으로 울부짖던 은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낙원의 맞은편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제발 조용히 먹자. 제발.

“아. 은유씨. 이쪽은 3학년 2반 담임 선생님이고, 수학 담당이신 강낙원 선생님. 그리고 이쪽은 오늘부터 도서실에서 근무하시는 심은유 선생님이에요.”

정말 망했다. 망했어.

다현이 일러주지 않아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데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은유에게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고개를 치켜든 은유는 자신을 보고 있는 낙원의 두 눈에 제 손등을 꼬집어 볼 뻔 했다.

“은유씨. 뭐 해요. 강선생님이 인사 하잖아요.”

제 눈앞을 휙휙 왔다 갔다 하는 윤주의 손바닥에 정신을 차린 은유가 급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눈 후 은유는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술 떴다. 비록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놓고 있던 그 때에 다현이 국을 한술 뜨더니 궁금하다는 듯한 얼굴로 은유를 쳐다보았다.

“아. 심선생님은 남자친구 있어요?”

순간 제 입에 있던 음식물을 낙원에게 뿜을 뻔한 은유는 가까스로 입을 꾹 닫고는 목 뒤로 삼켰다.

“응? 얼굴도 귀엽고, 말 하는 것도 예뻐서 남자들이 되게 좋아할 것 같은데.”

“아……하하……. 어, 없어요…….”

“없어요? 아니 왜? 한참 예쁠 나이잖아요!”

듣고 있던 윤주가 더 흥분해 은유를 보며 계속 물었지만 은유는 ‘글쎄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 이러다 정말 체할 것만 같다. 차라리 낙원이라도 없으면 편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정선생도 없으니까 걱정 마요, 심선생님.”

“하하. 송선생님도 참. 저는 없는 게 아니라, 안 만드는 거라니까요.”

“매번 그 소리지 아주.”

두 여자가 웃는 사이 은유는 방금 넘긴 음식이 더부룩해 식사를 더 하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놔야만 했다.

그리고 정말로 감사하게도 식사를 마친 낙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마저 드세요.”

“네. 가세요 강선생님~”

낙원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제야 아주 조금이나마 편해진 은유가 꼿꼿하게 세웠던 몸을 조금 굽혔다. 이러다 제 명에 못살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심선생. 강선생님 어때요?”

“네?”

편하다고 느낀 지 30초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날아든 질문에 은유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뭘 어떠냐고 물어본 걸까.

“강선생님 말이에요. 우리 노강고등학교 얼굴로 유명하시거든요.”

“……얼굴이요?”

은유의 물음에 윤주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은유도 몰랐던 그의 신상을 줄줄이 읊었다.

“키 183cm에 몸무게 65kg. 속 쌍꺼풀에 시원한 눈매랑 아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콧대. 도톰한 입술에 하얀 얼굴. 어깨는 또 어찌나 태평양 같은지. 목소리는 또 쉽게 찾아 볼 수가 없는 미성에, 깐 머리던 내린 머리던 다 잘 어울리고. 포스가 장난 아니잖아요. 우리 학교 여자애들한테 이상형 물어보면 1순위는 무조건 강선생님이에요.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여선생들 사이에서도 난리에요.”

윤주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참담해졌다. 그래, 인정한다. 낙원은 객관적으로 미남이다. 아니 미남인 정도가 아니라 섹시하기까지 하다. 얼굴도 잘생겼고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핫바디’까지 갖췄으니 인기가 많은 것도 당연하겠지.

그런데 체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집에서밖에 볼 일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곤 친한 친구인 소희의 말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직접 듣고 나니……. 왠지 앞으로 더 입 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고달픈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점심으로 먹은 밥이 제대로 얹힌 것을 느끼며 은유의 한숨 소리가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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