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시무시한 얼굴2016.09.30.
띵동. 띵동.
“네!”
조용한 집안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나간 은유는 인터폰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오셨어요?”
“누군지 확인도 안하고 문부터 열면 어떡해.”
“아……. 죄송해요. 당연히 낙원씨 일거라고…….”
“조심 좀 해.”
“네, 네. 그럴게요.”
따끔한 낙원의 쓴 소리에 은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 긴 다리로 걸어 방안으로 들어가는 낙원의 뒤를 쫓은 은유는 방 안쪽에 딸린 드레스 룸에 그의 가방을 올려두었다.
“옷 갈아입고 식사하세요.”
“그래.”
먼저 방을 나선 은유는 주방으로 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내는 찌개를 확인하고는 불을 줄였다. 재빠르게 식탁 위를 닦고 수저와 젓가락을 놓고는 예쁜 그릇에 맛깔 나게 생긴 반찬을 옮겨 담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낙원이 욕실로 가 손을 씻는 사이 찌개를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고슬고슬하게 잘 지어진 밥을 두 공기 퍼서 마주보게 놓은 은유가 식탁 옆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밖으로 나온 낙원은 식탁 옆에 서있는 은유를 지나쳐 맞은 편 의자에 앉았고, 그 모습을 본 은유가 뒤따라 그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맛있게 드세요.”
“너도.”
낙원이 수저를 들어 밥 한술을 뜨는 걸 보고서야 은유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그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고 오로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식사 시간. 아직도 편하진 않지만 처음처럼 죽을 것처럼 숨이 막히진 않았다.
참 신기한 게 그렇게 못 견딜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런 일상이 한 달을 넘기고 있다니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는 모양이다.
길게만 느껴진 식사가 끝난 후 은유가 싱크대에 빈 그릇을 놓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낙원은 소리 없이 식탁 위를 말끔하게 치워주었다.
“감사합니다.”
먼저 정리를 끝낸 낙원은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매일 보던 뉴스 채널에 고정시킨 그가 뉴스에 집중하는 사이 은유가 잘 깎은 배를 예쁘게 썰어 접시에 담아 내왔다.
“과일 드세요.”
은유가 내민 포크를 받아 든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배 한쪽을 콕 찍어 입 안으로 넣었다. 시원하면서 단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은유는 항상 식후에 따로 과일을 챙겨주곤 한다. 정작 본인은 배부르다며 한 조각 먹는 게 다면서.
뉴스가 끝나고 나니 눈 깜짝할 새에 10시가 되었고 낙원이 리모컨을 넘겨주었지만 은유는 괜찮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과일 접시를 깨끗하게 씻고 건조대에 올려둔 은유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슬그머니 안방 문을 열었다.
이미 침대에 들어가 있는 낙원은 헤드에 등을 기댄 채로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잘 거면 불 꺼도 돼.”
“아, 아니에요. 저도 조금 있다가 자려구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낙원의 시선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은유에게서 책으로 옮겨졌다. 불편함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낙원의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자신의 침대로 들어선 은유도 작은 탁자에 올려둔 책 한 권을 펼쳤다.
은유가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들 중 하나인데 깔끔한 문체와 탄탄한 스토리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던 은유는 어느새 쏟아지는 졸음에 책을 덮고 스탠드 불을 끄고는 이불 안으로 몸을 깊숙이 뉘였다.
슬쩍 고개를 돌린 은유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는 낙원을 보다 아무런 말도 없이 이불 속으로 얼굴을 반쯤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째깍. 째깍.
탁.
책장의 마지막 장을 읽고 커버를 덮은 낙원이 미간을 매만지다 은유의 침대로 시선을 옮겼다.
무언가에 한 번 집중하면 주변을 잘 둘러보지 않는 성격 탓에 은유가 먼저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쌕쌕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얼굴을 보던 낙원이 몸을 일으켜 방문으로 향했고 중앙에 달린 스위치를 눌러 조명을 끄자 본인의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스탠드의 불빛이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잠시 잠에 든 은유를 쳐다보던 낙원은 언제나 그렇듯 몸을 돌려 자신의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작은 스탠드는 여전히 켜둔 상태였다.
*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일어난 은유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신경 써서 옷도 입고, 곱게 화장도 하고는 아침 식사를 차리기 위해 주방 안을 이리저리 오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맞춰 놓은 알림 시간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난 낙원이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긴 팔을 뻗어 탁자 위를 더듬거리다 손에 닿은 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15분.
긴 한숨을 내쉰 낙원이 몸을 일으켜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깨끗하게 씻고는 바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하얀 색의 와이셔츠에 검정 색의 정장 바지를 입고 깔끔한 네이비 색의 넥타이를 맨 그가 서랍을 열어 시계 하나를 꺼내 손목에 둘렀다.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오던 낙원은 순간 멈칫했다. 집에서 입는 옷이 아닌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은유가 낯설었다.
멍하니 서있는 사이 식탁 위에 반찬을 내려놓는 은유와 눈이 마주쳤다.
“아, 일어나셨어요? 와서 식사하세요.”
“어. ……옷은 뭐야.”
자리에 앉으며 물어오는 낙원의 질문에 은유는 순간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냥 얘기하는 건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 우물쭈물 하는 사이 낙원의 고운 미성이 다시 날아들었다.
“외출 할 일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해.”
“……아……. 네, 네.”
그래. 절대 제 입으로는 얘기 못 한다.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 지 상상으로도 그려져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여전히 말이 없는 식사시간이 지나간 후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은유가 설거지를 하고 낙원이 식탁을 정리했다.
양치를 마치고 머리손질을 끝낸 낙원이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고, 은유가 그 뒤에 조심이 서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나가는데.”
“네? 아! 저, 저는 조금 있다가……. 하하. 머, 먼저 가세요!”
“그래.”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 낙원의 뒷모습을 보며 은유는 절망했다.
이야기 했어야만 했다. 어제던 아까 식사를 할 때던. 미리 이야기를 했었어야 한다. 정확히 1시간 뒤, 은유는 그렇게 후회했다.
“다른 전달사항은 더 없고……. 자. 오늘부터 우리 노강고등학교 도서실에 새로 오신 사서 선생님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도서실에서 근무하게 된 심 은유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제게로 향해 있는 수십 명의 시선을 받아내며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마친 은유는 제 몸을 뚫을 듯한 따가운 시선에 당장이라도 이 곳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있는 교무실 안. 햇빛이 잘 드는 창가 뒤쪽 책상 앞에 앉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낙원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럼 아침 조회는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다들 일들 보세요.”
교감선생님의 말에 각자 자신의 할 일을 시작한 선생님들이 있는 반면, 은유에게로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3학년 3반 담임이고, 영어 담당 정윤주에요.”
“아, 네. 안녕하세요.”
“마침 우리 교실이 도서실 바로 아래층인데 잘 됐네요! 같이 올라가실래요? 제가 길도 안내해 드릴게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은유에게는 정말이지 은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윤주라는 사람 덕분에 낙원과 눈도 한번 마주치지 않고 교무실을 빠져 나온 은유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심선생님 긴장 엄청 하셨나 봐요.”
“아……. 하핫. 네. 엄청 떨렸어요.”
“처음엔 다들 그래요. 그나저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진짜 어려 보이시는데.”
“아, 저는 스물 여섯이에요.”
“어머! 저랑 동갑이시네요! 우와.”
동갑이라며 반가워하는 표정이 가득한 윤주는 활발한 성격이어서 도서실로 가는 내내 은유에게 이곳 저곳을 설명해주었다. 3학년 교실은 3층에 위치해 있었고 도서실은 3학년 1반 교실의 옆 계단을 이용해 한층 더 올라가면 바로 입구가 있었다.
“여기가 도서실이에요. 다른 선생님께서 계시는데 오늘 좀 늦는다고 하셨으니까 천천히 시간 보내고 계세요.”
“네. 너무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 심심할 때 여기 놀러 와도 되요?”
“그럼요! 저야 너무 감사하죠.”
“그럼 이따가 뵐게요~”
“네!”
윤주가 다시 3층으로 내려가고 홀로 도서실에 남겨진 은유는 넓은 내부를 천천히 걸었다.
재단이 좋기로 유명한 학교답게 도서실 또한 예쁘게 잘 꾸며져 있었다. 4층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입구를 들어서면 출입 카드를 찍는 곳이 있고 그 곳을 지나면 화이트와 그레이 색상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넓은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게 양 옆으로 늘어서 있는 커다란 책장들과 넓은 중앙 통로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과 컴퓨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간이 어찌나 넓은지 무슨 강당으로 써도 될 정도의 크기에 은유는 내심 놀랐다.
이런 좋은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된 건 당연히 좋은 기회인데 마음은 영 불편했다. 그 때 거절했어야 했나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아가. 집안일은 할만 하니?”
“네, 할머님.”
“어째 더 마르는 것 같아. 잘 못 먹니?”
“아니에요. 저 잘 먹고 있어요.”
사실 다이어트 중이었지만 그리 이야기를 했다간 할머니가 걱정하실 게 뻔했기에 은유는 그저 웃었다.
자주 들락날락 하면 피곤한 건 은유라면서 절대 집에 한번 오지 않으셨던 분이 어제 오전에 연락을 해오셨다. 혹시 오늘 집으로 잠시 가도 되겠냐 시며. 기쁜 마음에 전화를 끊자마자 미리 장을 보고 준비를 해둔 은유에게 청천벽력 같은 제안을 건네셨다.
“네? 제, 제가요?”
“그래. 아가 너도 책 읽는 것 좋아하고.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기도 할 테니까……. 물론 집안일 하기도 바쁘기는 하겠지만 네 일도 하고 싶어 했잖니.”
“……그, 그렇기는 하지만…….”
“또 낙원이랑 얼굴도 자주 보고 그래야 더 친해지지 않을까 해서.”
그 남자와는 평생을 얼굴 보고 살아도 친해질까 싶은데요 할머님…….
아니 그보다, 이런 제안을 그가 알고 있기는 한 것일까? 마치 은유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할머니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낙원이한테는 얘기 안 했다. 그 녀석이 알면 괜히 시끄러울까 봐.”
“아……. 그, 저는 너무 감사한데요 할머님. 낙원씨가 불편할 것 같아서요…….”
“그런 걱정이면 붙들어 매라. 내가 너 하나 못 지켜줄 줄 알고?”
“에이, 당연히 그런 게 아니신 건 알죠. 그런데 저보다는 낙원씨 입장이 더…….”
지금 이 순간에도 저보다 제 남편 걱정을 하는 손주며느리의 모습에 노진희 여사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역시, 손주며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얻었다.
“걱정 말거라. 낙원이 그 녀석이야 아무래도 좋지. 제 색시 얼굴도 더 자주 보고. 네가 좋다고 한 걸로 알고 진행해도 되겠니?”
“……아…하하……. 네, 네.”
어차피 거절도 못하게 하셨을 거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편이 일하는 학교에 사서로 가 있으라니. 물론 결혼식은 양가 어르신들과 친한 친구들만 불러 최소한으로 치렀기 때문에 학교에서 자신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같은 공간에 있으면 마주칠 일도 더 많아질 거고 그만큼 더 불편해지면 불편해졌지 절대 편해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수많은 생각들을 속으로 삼킨 은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일주일 전 생각에 젖어있던 은유의 귓가로 차가울 만큼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은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로 알아차린 은유는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곳엔 결혼 후 처음으로 표정을 드러낸 무시무시한 얼굴의 낙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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