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5화. 끝나지 않은. (2) (155/156)

155화. 끝나지 않은. (2)

갑자기 어디 간 거지? 엘리사는 어리둥절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어려진 칼베른이 보였다. 아빠 옷을 훔쳐 입은 것 같은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러웠지만, 그의 표정과 상황 자체는 심각했기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다.

칼베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작아진 그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흑마법사가 죽었는데…… 왜 어려진 거지?”

정확히는 에이지의 의식이 흑마법이 만든 아공간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 거였지만, 설령 빠져나온다고 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게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사방에 뿌렸으니 죽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이젠 어려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어려지니 당황스러웠다.

혹시 육체는 사라졌어도 의식은 아직 살아 있어서 그런 건가?

그런데 그것도 살아 있다고 표현해도 되는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지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던 엘리사가 입을 뗐다.

“아마 당신이 먹은 게 마법 약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파시스 캠벌이 아는 걸 전부 실토한 덕분에 칼베른이 갑자기 어려진 이유가 에이지가 만든 마법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법 약 때문이라고?

칼베른은 의아해하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예요. 마법의 효과는 시전한 마법사가 죽으면 사라지지만, 마법 약은 아니에요. 죽어도 효과가 남아 있죠. 마법 도구도 마찬가지고요.”

엘리사는 저주도 같이 예시로 들려다 그러지 않았다. 안 그래도 저주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인데, 괜히 아픈 곳을 찌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거였나…….”

에이지가 죽었으니 전부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칼베른이 헛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엘리사가 옅게 웃으며 그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제가 다시 원래대로 돌려줄 테니까요.”

그리고 마나를 불어넣자, 칼베른의 주변으로 보라색 아지랑이가 어렴풋이 보이더니 곧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엘리사는 칼베른의 주변에 반딧불처럼 부유하던 보라색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지?’

칼베른이 옷을 제대로 챙겨입는 동안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생각하던 엘리사는 에이지와 치열하게 싸우고, 기적처럼 아공간을 빠져나온 그때부터였다는 걸 깨달았다.

혹시 그동안 보라색 기운이 보였던 건, 자신이 흑마법 숙주였기 때문이 아닐까?

앙고라 영지에서 수도로 돌아온 뒤부터 보라색 기운을 볼 수 있게 됐으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에이지가 살아 있었다면 확실하게 물어봤을 텐데.

그 외에 에이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묻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워 엘리사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에이지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냥 호기심을 가슴에 묻고 말지.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지?”

그 사이 옷을 제대로 챙겨 입은 칼베른이 그녀의 이마에 그의 이마를 가볍게 콩, 찧으며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엘리사가 칼베른을 쳐다봤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자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여 순간 숨이 막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바쁜 그가 이런 걱정까지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엘리사는 말을 아꼈다.

물론 에이지가 살아 있었다면 전부 솔직하게 털어놓고 그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겠지만, 그조차도 아니니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냥 넘어갈 칼베른이 아니었다.

“아닌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음.”

칼베른의 눈매가 가자미처럼 얇게 접히자, 엘리사는 딴청을 피웠다.

“당신을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해독제 연구를 다시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리고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하필 지금 가장 아픈 곳을 찌른 터라 칼베른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

짤막한 사과가 전부였다. 엘리사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뭐가 미안해요. 이게 다 그 남자가 괜한 욕심을 부려서 일어난 일인데.”

그러고 보니 칼베른에게 저주의 반동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그동안 칼베른이 워낙 바쁘기도 했고, 그녀 역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정신이 없어 미처 말하지 못했다.

칼베른이 저주의 반동에 대해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것 같아 걱정돼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말해야 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으니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하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눈빛만으로 엘리사가 심각하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안 칼베른이 얌전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전부 다 말해.”

그리고 엘리사가 쉽게 말을 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말할 수 있게 된 엘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정리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말을 더듬으며 두서없이 말했지만, 모두 알아들은 칼베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죽지 않으면 그대가 죽는다는 거군.”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아니긴. 맞는데.”

칼베른의 표정이 심각하다 못해 딱딱하게 경직됐다. 어둡게 가라앉은 자색 눈동자에 깊은 죄책감이 보였다.

“역시 내가…….”

“죽는다는 이상한 말은 하지 말아요.”

엘리사가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단호하게 말하자 칼베른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그 말을 하려고 했구나. 엘리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스갯소리나 농담으로 여기며 넘겼겠지만, 칼베른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말을 조금만 잘못하면 당장 죽으러 갈 것 같았으니까.

물론 젤리아의 축복을 받은 덕분에 어지간해선 죽진 않겠지만, 에이지가 그를 죽이려고 했던 걸 보면 방법이 있긴 있는 것 같아 더욱 불안했다.

“저 때문에 당신이 죽는다면, 전 평생 그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 거예요.”

엘리사는 꽉 쥔 칼베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러니까 살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요.”

“……그럼 그대가 죽는다.”

“제가 죽게 된다면, 칼 때문이 아니라 젤리아의 저주 때문이에요. 그러니 당신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엘리사는 거듭 괜찮다고 말했지만, 칼베른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엘리사가 저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나아질 리가 없었다.

칼베른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으나, 빌어먹을 축복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만약 당신이 나쁜 생각을 품고 그걸 실행한다면, 그 즉시 저도 똑같이 따라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엘리사가 으름장을 놓은 탓이기도 했다. 그녀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걸 익히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칼베른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

“미안해하지 말라니까.”

엘리사는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혀를 차면서도 몹시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칼베른의 넓은 등을 꼭 안아주었다.

****

해피엔딩이란 결말이 좋은 쪽으로 끝나는 걸 의미했다.

공주님과 왕자님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라는 동화의 결말 같은 것.

나는 어릴 적, 그 동화들을 보며 항상 궁금했었다.

과연 동화 속의 공주님들은 전부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했을까?

공주님들이 진정으로 바란 해피엔딩은 왕자님과 결혼하는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게 해피엔딩이라고 제멋대로 단정 지어 버려서, 그 길을 그대로 걸어간 게 아닐까?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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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황자 궁의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한, 황궁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도 모르는 은밀한 장소를 뒤지니 그동안 데아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기록들이 나왔다.

심지어 엘리사가 잃어버린 마법 가마솥도 그곳에서 발견됐다.

기록 중에는 에이지가 칼베른을 죽이기 위해 만든 마법 약이나 몬스터를 부리거나 사람을 식귀로 만드는 사악한 흑마법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

혹시 에이지가 그를 배신했을 때를 대비해서 모아둔 것 같았다.

그 자료에 적힌 마법 약 재료들은 마리아가 예전에 선물이랍시고 줬던 유리병에 남은 찌꺼기에서 나온 성분과 거의 일치했다.

덕분에 칼베른을 어려지게 만든 마법 약의 정체는 알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해독제를 만드는 건 어려웠다.

칼베른이 어려진 건, 젤리아의 축복과 엘리사가 만든 마법 약의 효과로 어그러진 부작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사의 연금술 실력이 에이지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해독약은커녕 에이지가 만든 마법 약조차 만들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에이지는 대륙에 몇 명 없는 마스터에 근접한 다이아몬드 등급의 연금술사였다.

재료를 구하는 것도 극악이었다. 엘리사는 특히 마법 약을 한 번 만드는 데 인어의 눈물이 무려 30개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이래서 시중에 인어의 눈물 씨가 말랐던 거구나.’

그 외에도 그 마법 약을 만들려면 드래곤의 이빨, 만드라고의 잎사귀 등 평생 보기 힘든 재료들도 많이 필요했다.

에이지가 이 많은 재료를 구한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에이지만큼 연금술 실력을 올리고, 이 재료들을 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까.

사라와 다른 연금술사, 재료상에 자문을 구하는 등 이리저리 알아본 결과 최소 10년은 걸린다고 했다.

‘과연 내가 10년 뒤에 살아 있을까?’

칼베른에게 주기적으로 수명을 줘야 하는 데다가 저주의 반동으로 어느 순간부터 나이를 거꾸로 먹으니, 10년 뒤에 살아 있을 가능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로였다.

최소 10년은 걸린다고 했으니, 난 절대 해독제를 만들지 못할 거야.

엘리사의 표정이 흐려졌다. 노력은 계속하겠지만,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만큼 칼베른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줘야 할 것 같아 그날 저녁을 먹으면서 바로 말했다.

“그렇군.”

분명 크게 실망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담담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닐까. 걱정된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칼베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괜찮아요?”

“뭐가?”

“뭐긴요. 해독제를 말하는 거죠. 제가 해독제를 만들지 못하면 계속 어려질 수 있는데 괜찮냐고 물어본 거예요.”

“음.”

칼베른이 와인을 마시며 생각에 잠기자, 엘리사가 넌지시 제안했다.

“마스터 등급의 연금술사를 고용해서 해독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어때요? 많이 비싸긴 하겠지만, 공작저의 재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건 안 돼.”

칼베른이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어려지는 건 무조건 비밀로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돼.”

“믿을 수 있는 연금술사를 고용하면 되죠.”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거다.”

하긴 그건 그렇지. 엘리사는 속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리고 계속 생각해봤다.”

칼베른이 미디엄 레어로 적당하게 구운 스테이크를 자르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저주의 반동 때문에 계속 어려진다면, 그래서 언젠가 어린아이가 된다면 그땐 나 역시 어린아이가 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놀란 엘리사의 입이 약간 벌어지자, 칼베른은 그 사이로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넣었다.

입안에 음식이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입이 다물어졌다.

오물오물. 칼베른은 엉겁결에 스테이크 조각을 먹고 있는 엘리사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아이가 된 그대를 부인이라고 부르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어려지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달리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아 엘리사는 머뭇거렸다.

“엘리사.”

칼베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며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내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게 뭔지 알아?”

“……뭔데요?”

“남은 시간을 그대와 후회 없이 보내고 세상을 떠나는 것.”

사실 가장 바라는 건 엘리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거였지만, 그건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는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몸일뿐더러, 세상에 클라우드 공작가의 혈족은 저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사돈에 팔촌까지 뒤지면 못해도 수십 명은 나왔다. 자신이 모르는 혈족도 있었고.

그들까지 다 죽이지 않는 이상 저주의 반동이 풀리진 않을 테니 죽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엘리사와 행복하게 살다가 그녀가 눈을 감으면, 남은 생을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나도 어려지는 게 맞는 것 같아.”

“칼…….”

“우리는 같이 늙어가는 게 아니라, 같이 어려지겠군.”

장난기가 섞인 농담 같은 말에 심각했던 엘리사의 얼굴에 옅은 웃음꽃이 피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어려진 부부가 되겠네요.”

칼베른도 웃으며 마주 잡은 손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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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공주님들이 바란 결말은 다른 게 아니었을까.

해피 엔딩은 누군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정하는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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