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끝나지 않은. (1)
데아른이 에이지와 손을 잡고 그동안 저지른 만행들이 낱낱이 밝혀졌다.
황태자인 오스카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암살자들을 보냈으며, 칼베른에겐 정체불명의 마법 약까지 먹였다.
그리고 사악한 흑마법으로 남쪽의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식귀를 만드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친동생인 마리아 황녀를 살해하고, 그 죄를 칼베른과 엘리사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를 습격한 사람이 사실 데아른과 손을 잡았던 에이지라는 게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데아른이 평소 구휼과 자선 기부에 관심이 많을뿐더러, 외모와 성격도 천사의 강림이라고 불릴 만큼 곱고 아름다웠던 터라 충격은 몇 배로 더 컸다.
오스카를 비롯한 황태자파 귀족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후와 2황자파 귀족들을 압박했다.
황후와 2황자파 귀족들은 몸을 납작 낮추고 떨어지는 벼락을 피하려고 했지만, 피하지 못한 자들이 몇몇 있었다.
“캠벌 후작가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후작 작위를 박탈한다. 또한 캠벌 후작가의 이름을 귀족 명부에서 지우겠다.”
그중 하나가 황후의 가문이자 데아른의 외가였던 캠벌 후작가였다.
캠벌 후작은 데아른이 저지른 엄청난 일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아들인 파시스 캠벌이 잘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제로 데아른을 도와 이런저런 일들을 했던 것이 에드윈의 심문을 통해 낱낱이 들통나면서 캠벌 후작가는 500년의 오랜 역사를 뒤로한 채 문을 닫아야 했다.
오스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캠벌 후작가의 혈족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어 평민 이하의 대접을 받는 건 물론 평생 신분 상승을 할 수 없게 막아두었다.
황후 역시 캠벌 후작가의 혈족인데다가 데아른의 모친이니 그녀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그나마 황후 폐하시고 데아른이 저지른 일에 대해 아시는 바가 없으니, 신분을 박탈하진 않겠습니다.”
오스카가 반쯤 정신을 놓고 소파에 앉아 있는 황후에게 담담하게 고했다.
“대신 평생 수녀원에서 지내시며 아들이 지은 죄에 대해 대신 속죄하시길 바랍니다.”
“……날 유폐하려는 거구나.”
“유폐라기보다 지옥에 갔을 아들이 신에게 용서받을 기회를 드리려는 겁니다.”
“신이라고?”
황후가 핏기가 없는 입술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핏발이 선 눈동자에 섬뜩한 한기가 깃들었다.
“만약 신이 존재했다면 내 아들이 그렇게 타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오스카가 팔짱을 끼고 웃었다.
“데아른이 타락한 건 순전히 그 녀석의 선택입니다. 신이 존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
“아, 황후 폐하의 영향은 좀 있겠네요. 황후 폐하께서 데아른에게 꼭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기지 않았다면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황후의 입술이 울분에 파르르 떨렸다.
어릴 땐 저 얼굴이 참 무서웠는데, 이젠 아니었다.
자신이 이겼으니까.
“내일 아침에 수녀원으로 가실 거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미리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난 황후다!”
황후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벌떡 일어서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제국에서 황제 폐하 다음으로 가장 서열이 높은 황후야! 그러니 날 황궁에서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 폐하뿐이다. 너 따위가……!”
대앵-!
그때,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앵, 대앵, 대앵, 대앵-!
정확히 5번. 황제가 승하했다는 의미였다.
“폐하께서…….”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 황후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신관까지 들러붙어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하더니,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가.
흑마법 때문일 수도 있고, 오랜 지병 때문일 수도 있었다.
오스카는 피를 나눈 친부지만, 부황에 대한 애정은 한 톨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어머니가 죽는 그 날까지 다른 여자를 곁에 끼고,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았던 황제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황제는 데아른과 황제가 제게 검은 마수를 뻗는다는 걸 알면서도, 장차 황제가 되려면 이 정도는 스스로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며 방치했었다.
칼베른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터.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황제에겐 온통 악감정뿐이었지만, 처음으로 고마운 마음이 생겼다.
적절한 타이밍에 세상을 등져 준 덕분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날뛰는 황후를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부황 폐하께서 돌아가는 즉시 모든 권한은 황태자인 제게 넘어옵니다.”
오스카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황후 폐하의 모든 직위와 권한을 박탈하오니, 당장 황궁을 나가주길 바랍니다.”
****
데아른의 일부터 시작해서 황제가 죽고, 황후가 쫓겨나는 등 제국 전역이 벌집을 들쑤셔놓은 것처럼 소란스러웠지만, 클라우드 공작저는 조용했다.
정확히는 엘리사가 곤히 잠든 침실만 조용한 거였다.
엘리사가 의도한 게 아니더라도 흑마법의 숙주였던 그녀 역시, 원칙대로라면 황궁 감옥에 갇혀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오스카가 엘리사의 일을 묻어준 덕분에 그녀는 끌려가지 않았다.
그날, 정신을 잃은 엘리사는 사흘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크라임이 말하길 오랜 시간, 흑마법의 숙주로 지낸 데다가 의식이 육체와 떨어져 있는 충격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몸에 특별한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건지.”
사흘의 시간이 짧았던 걸까. 부디 엘리사가 빨리 눈을 뜨길 바라며 칼베른은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엘리사의 몸을 닦아주는 등 살뜰하게 보살폈다.
꼭 가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자리를 비우지 않았고, 잘 때도 엘리사의 옆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런 칼베른의 정성 어린 마음을 하늘이 알아준 건 일주일째 되는 아침이었다.
새가 반갑게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긴 잠에서 깨어난 엘리사는 약간 푸석해진 칼베른의 얼굴을 보고 설핏 웃었다.
“못 본 사이에 못생겨졌네요.”
칼베른이 픽 웃었다.
“그대는 여전히 예쁜데.”
“거짓말.”
“진짜야.”
누가 봐도 거짓말이 확실한데 뻔뻔하게 대답하니 웃겨서 엘리사도 웃었다.
칼베른이 엘리사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
엘리사도 칼베른의 뺨에 입을 맞추며 화답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칼.”
****
엘리사가 황제의 죽음 등 제국에 부는 피바람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안 그래도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는데 더 주지 말라는 칼베른의 엄포에, 모두가 쉬쉬하고 있었지만.
불행히 그 말을 듣지 못한 세레나가 엘리사의 병문안을 봤다가, 그녀에게 모든 걸 말했다.
그 바람에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된 엘리사가 충격에 눈을 부릅떴다.
특히 황제가 흑마법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챈 세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황제가 잘못되신 게 부인 탓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런 건 아니지만……조금 신경 쓰이기는 해요. 제가 진작 칼에게 에이지에 대해 말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테니까요.”
에이지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남의 집을 막 들어오거나, 가마솥을 가져가고 도망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나쁜 사람일 거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달리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해서 칼베른에게 말하지 않은 건데 설마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를 줄이야…….
“당신 잘못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엘리사의 표정이 우울하게 가라앉는 걸 본 세레나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모든 건 그 흑마법사가 잘못한 거예요. 그러니 이상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말아요.”
“이상한 생각은 안 했어요.”
“안 했긴. 방금 했으면서.”
“그것보다 언제 황태자 전하께서 즉위하시는 거죠?”
할 말 없으니 말 돌리는 거 봐. 세레나는 눈을 흘기면서도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3주 뒤, 황제의 장례식과 추모식이 모두 끝나면요. 이미 모든 권한을 받아서 열심히 정무를 보고 있긴 하지만, 정식으로 즉위하는 건 그때에요.”
“그렇군요.”
“그리고 그때 칼베른은 정식으로 클라우드 공작이 되고, 당신도 클라우드 공작부인이 되겠네요. 기분이 어때요?”
“글쎄요.?”
엘리사는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아요.”
“정말요? 기다리던 공작부인이 되는 건데?”
“딱히 기다린 적 없어요.”
칼베른의 곁에 남겠다고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그동안 수많은 일이 있어 공작부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 부분이라면 저도 비전하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세레나가 말해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침실에 그녀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한 뒤,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황태자 전하와…… 이혼하실 건가요?”
“!”
날카로운 화살처럼 돌아온 질문에 세레나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그녀는 이전처럼 바로 오스카와 이혼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스카와의 이혼을 기다려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진심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가망성이 있지 않을까.
부디 세레나가 오스카의 곁에 남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엘리사가 뭐라 말하려는데 세레나가 먼저 말했다.
“……난 앙고라 영지를 책임져야 해요.”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이니까요. 몇백 년 넘게 앙고라 가문에서 다스린 광활한 영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기를 바란다며 내 손을 꼭 붙잡고 부탁하셨어요.”
여자가 작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었지만, 무척 어려웠다.
우선 가문을 지지하는 장로와 가신들을 설득하거나 힘으로 제압해야 하는데, 전자는 불가능하니 세레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 오스카의 손을 잡아 황태자비가 된 거였고.
“물론 지금은 황태자비라는 신분과 오스카와 칼베른의 힘을 빌려 임시로 영지를 맡고 있지만, 그동안 기반을 잘 쌓아뒀으니 무사히 이혼만 하면 온전하게 앙고라 영지를 맡을 수 있어요.”
그럼 아버지의 뜻을 이을 수 있다며 세레나가 중얼거렸다.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엘리사가 역으로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를 좋아하시죠?”
세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좁히며 말했다.
“누, 누가 그딴 녀석을 좋아한다고……!”
“좋아하시네요.”
“아니라니까!”
세레나가 귀까지 붉히며 빽 소리를 질렀다.
전혀 신빙성이 없는 대답에 엘리사가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다른 여자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살을 맞대도 상관이 없으세요?”
“……!”
생각만 해도 끔찍한지 세레나가 인상을 썼다.
“역시 좋아하시네요.”
속내를 들킨 세레나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에겐 비밀로 해줘.”
세레나가 말을 놓자, 엘리사는 그제야 세레나가 그동안 제게 존댓말을 썼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곧 공작부인이 된다고 배려라도 해준 걸까.
엘리사가 속으로 웃었다. 세레나는 첫인상과 달리 제법 귀여운 면모가 있었다.
“이혼하지 마세요, 비전하.”
“하지만 난 아버지의 유지를…….”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어요. 자식이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부모도 없고요.”
“…….”
“그리고 이혼하지 않아도 부친의 유지를 잇는 방법이 있어요.”
덧붙인 말에 세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그건 말이죠…….”
엘리사가 세레나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붙으며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를 둘 이상 낳으시면 돼요.”
“……!”
“그럼 한 분은, 앙고라 영지를 직할지로 받으실 테니 부친의 유지를 이을 수 있어요.”
****
그날 저녁.
“……그녀가 거기까지 이야기를 한 건가.”
엘리사에게 세레나와 있었던 일을 들은 칼베른이 중얼거렸다.
세레나가 엘리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더 뜻밖인 건 세레나가 오스카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칼도 비전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아니, 몰랐는데.”
“정말요?”
엘리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게 티가 났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죠?”
티가 났던가? 칼베른은 평소 오스카와 세레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바빴다.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걸 본 적도 없었다.
“당신이 눈치가 없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이건 눈치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칼베른이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엘리사가 웃으며 그의 뺨에 입을 가볍게 맞췄다.
“농담이니까 삐지지 말아요.”
“삐지진 않았는데……거기 말고 여기.”
칼베른이 제 입술을 가리켰다.
하여간 능글맞긴. 그게 싫지 않은 자신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엘리사는 칼베른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가벼웠던 입맞춤은 점점 농밀해졌다. 엘리사의 몸이 소파 위로 기우뚱 기울어지면서, 칼베른의 손이 풍성한 치마 속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펑-!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집요하게 엘리사의 입술을 괴롭히던 칼베른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