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Can stop.
찔러넣은 성검을 중심으로 새카만 연기와 새하얀 빛이 섞여 흘러나왔다.
“내가 질 줄 알고……!”
에이지가 성검을 빼기 위해 맨손으로 칼날을 꽉 쥐었다.
엘리사는 에이지에게 지지 않고자 이를 악물고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평소라면 엘리사가 힘에서 밀렸겠지만, 에이지는 다친 데다가 하필 흑마법과 상극인 신성력이 담긴 성검에 찔려 본래의 힘을 10분의 1도 쓸 수가 없었다.
“큭!”
결국 힘에서 밀린 에이지의 손이 미끄러지자 엘리사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있는 힘껏, 검 손잡이까지 찔러넣었다.
결국 그의 몸을 관통한 성검은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에이지를 집어삼켰다.
“크아아아악!”
고통스러우면서도 처절한 울음소리가 균열이 생긴 어두컴컴한 공간에 가득 울려 퍼졌다.
에이지가 내뿜던 검은 기운은 새하얀 기운에 잡아 먹혀 정화됐다.
결국 가지고 있던 힘을 모두 잃은 에이지가 맥없이 쓰러졌다. 배에 꽂혀 있던 성검은 다시 빛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엘리사 역시 꽉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지금 끝났다고 생각했지?”
엘리사는 에이지가 자신의 마음을 읽자 흠칫 놀라며 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에이지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파리한 얼굴로 킥킥 웃으며 말했다.
“벌써 안심하지 마.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패배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패배자라……그래, 인정하지. 지금은 내가 패배자지만, 진 건 너 역시 마찬가지야.”
“그게 무슨 소리지?”
“이곳은 내가 흑마법으로 만든 아공간. 너와 나는 원래의 몸뚱이를 현실 세계에 버려두고, 의식만 이곳에 넘어와 있는 거다.”
그 말인즉, 지금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는 의미.
이렇게 촉감이 생생한데 현실이 아니라니.
엘리사는 조금 당황하며 제 손을 바라봤다.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긁힌 건지 군데군데 상처가 보였고, 고통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현실이 아니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여기서 죽거나 다치는 건 꿈에서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현실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거 좋네.”
엘리사는 기껏 에이지를 물리쳤는데, 현실에서 또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아닌 척 연기하며 대꾸했다.
“현실에서 한 번 더 당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겠어.”
“아니. 난 틀리지 않았어. 틀린 건 너지.”
“나 역시…….”
“젤리아를 설득해서 저주를 푸는 게 낫다고 했던가?”
에이지가 엘리사의 말허리를 자르며 되물었다.
의미심장한 말에 엘리사는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에이지를 빤히 쳐다봤다.
“나도 그게 가능했다면 이런 개짓거리는 하지 않았을 거야.”
에이지가 피가 흘러내리는 상처 부위를 붙잡고, 무너지는 천장을 보며 처연하게 웃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사람을 설득하는 게 가능했다면 말이지.”
푹, 찌르고 들어온 말에 엘리사는 잠시 멈칫했다가 반박했다.
“아까 젤리아를 만났었어.”
“네가 만난 건 젤리아가 아닌 내 피에 새겨진 그녀의 원념이고 기억이다. 진짜 젤리아가 아니야.”
에이지가 웃으며 다시 반박했다.
“그리고 설령 젤리아가 그 자식을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발동된 저주는 충족 조건을 만족해야지만 없어진다.”
“……!”
“젤리아가 애초에 내 건 저주의 충족 조건은 에프란의 피를 이은 혈족이 전부 사라지는 거였어. 그리고 칼베른 클라우드가 에프란 클라우드의 피를 이은 혈족 중 유일하게 남은 생존자지.”
긴 이야기 내내 엘리사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차라리 저주에 대해 몰랐더라면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이라도 했을 텐데, 너무 잘 알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사가 주먹만 꽉 움켜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에이지가 그것 보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너도 갑자기 후회되지?”
“……후회?”
“그래, 후회. 너도 곧 저주의 반동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어려지다가 결국은 말 못 하는 갓난아기가 돼서 비참하게 죽을 테니까.”
그렇겠네. 나도 에이지와 같은 핏줄이니까.
에이지를 상대하는 데 집중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엄마도 에이지처럼 서서히 어려지다가 결국 갓난아이가 돼서 돌아가셨을까?’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으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계셨을까?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같이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걸 보면 모르셨던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엘리사를 다시 현실로 끌어왔다.
엘리사는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에이지와 다투는 사이 공간이 제법 많이 부서졌다.
얼른 다 부서져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텐데.
엘리사는 그리 생각하며 에이지를 쳐다봤다. 그새 피를 토한 건지 에이지의 입 주변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그 녀석을, 칼베른 클라우드를 죽여. 그럼 저주가 해소될 거고, 저주의 반동도 사라질 거다.”
“그건 싫은데.”
엘리사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하자 에이지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나와 다른 혈족처럼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거다. 그게 두렵지 않나?”
“당연히 두렵지.”
“그런데 왜…….”
“내가 두렵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싶진 않거든.”
그 상대가 가슴이 절절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다른 방법으로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할 거야.”
에이지가 조소했다.
“쓸데없는 객기를 부리는군.”
“글쎄. 객기일지 사실일지는 끝까지 해봐야 아는 거지.”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하지 않아. 난 할 수 있어.”
반드시 젤리아의 저주를 멈출 거라고 엘리사는 가슴 깊이 다짐했다.
그러자 에이지가 피 묻은 입술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지금 내 말을 따르지 않는 걸, 칼베른 클라우드를 죽이는 선택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그럴 일 없다니까.”
“아니. 넌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 넌 절대로…….”
쿵, 거대한 공간의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에이지의 목소리가 묻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순간 귀가 먹먹해져 엘리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제 정말 끝이네.”
반면 에이지는 홀가분하면서도 약간 씁쓸하게 말했다.
“내가 만든 공간에 갇혀서 죽는 결말이라니…… 내 손으로 발등을 찍었군.”
갇혀서 죽는 결말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공간이 무너지면 나갈 수 있는 거 아니었어?”
“헛된 기대를 하고 있네.”
에이지가 피가 묻은 손을 엘리사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내 몸에 쑤셔 넣은 빌어먹을 성검 때문에 힘을 다 빼앗겨서 출구를 열지 못해.”
“……!”
“즉, 너나 나나 이 공간에 갇혀 영원히 나가지 못한다는 거지.”
그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일에 충격을 받아 기함하며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엘리사는 곧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거짓말하지 마! 만약 내가 그 남자를 죽이는 쪽을 선택했다면 날 여기서 내보내 줬을 거잖아.”
“아, 들켰네.”
에이지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출구를 열 힘이 없다는 건 사실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아까까지는 너 하나 보내 줄 힘은 있었지만, 이젠 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지.”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쿵, 쿠쿵-!
사방에서 울리는 파열음이 고막을 거세게 두드렸다. 에이지가 누워 있는 바로 옆자리에도 연거푸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바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 너와 내가 서 있는, 이 작은 공간을 유지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
“그러게 진작 내 손을 잡지 그랬어.”
에이지가 웃었다.
“그랬더라면 너 하나 정도는 보내줬을 텐데…….”
콰쾅, 커다란 공간 조각이 에이지의 바로 옆에 떨어지면서 그가 누워 있던 바닥이 완전히 부서졌다.
“……참 안타깝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이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떨어졌다.
“안 돼!”
엘리사는 다급하게 에이지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에이지가 싫었지만, 그가 죽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있어야 이 빌어먹을 곳을 탈출할 수 있을 테니, 엘리사는 에이지를 구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결국 에이지는 떨어졌고, 그를 구하기 위해 뻗었던 손은 허무하게 허공을 휘젓다가 꽉 쥐어졌다.
엘리사는 멍하니 에이지가 떨어진 곳을 바라봤지만, 지금 그녀에겐 이러는 시간조차 사치였다.
쿠쿵-!
“!”
에이지가 사라진 탓인지, 그녀가 딛고 있던 바닥도 서서히 균열이 가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며 숨이 턱 끝까지 닿도록 뛰고 또 뛰었지만,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었다.
게다가 빛이 사라지면서 사위가 캄캄해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이 맞는지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과 무언가 계속 부서지는 소리는 엘리사를 공포에 밀어 넣기 충분했다.
“싫어…….”
엘리사는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목청이 터질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싫어. 살려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무나 도와줘요……!”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 응답하기라도 한 건지 엘리사가 끼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가 번쩍거리더니 작고 동그란 빛이 흘러나와 미약하지만, 어둠을 밝혔다.
그러자 금이 간 바닥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게 보였다.
누구의 발자국인지 모르겠지만, 저 발자국을 따라가야겠다고 본능적으로 깨달은 엘리사는 발자국 위에 제 발을 정확하게 맞추며 걸어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발자국 크기와 보폭 넓이가 그녀와 똑같았다.
그렇게 한참 걷다가 마침내 막다른 벽에 도착한 엘리사는 가까이 다가가 섰다.
“엘리사!”
그러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너무 작아서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벽에 귀를 가져다 대고 들으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신 차려, 엘리사!”
“칼!”
이건 칼베른의 목소리였다. 이 벽 너머에 칼베른이 있다는 걸 직감한 엘리사가 벽을 세차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저 여기 있어요! 나 좀 꺼내 줘요, 칼!”
그러나 아무리 세차게 벽을 두드리고 소리쳐도, 단단한 벽은 깨지지 않았다.
다른 공간은 전부 무너지고 있는데, 이 벽만큼은 금 하나 가지 않고 견고했다.
역시 이 벽을 무너뜨려야 현실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어떻게?’
마음이 다급한 만큼,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던 엘리사는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바로 에이지가 자신의 마법진을 사용했던 그때의 일을.
그렇다면 나도……가능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도달한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벽에 댄 손끝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우웅-.
“정신 좀 차려 봐, 엘리사!”
그러자 벽에 처음 보는 거대한 보라색 마법진이 그려지면서 아까보다 칼베른의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엘리사는 대답하려고 했으나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린 부작용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몸에 힘이 쭉 빠지며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 역시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린 부작용이었다.
‘안 돼…….’
이대로 정신을 잃을 수는 없어. 엘리사는 이를 악물며 흐려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그녀의 정신이 흐려진 만큼 마법진의 빛도 약해졌고, 칼베른의 목소리도 점점 흐리게 들렸다.
그런 엘리사의 눈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흐리게 보였다.
칼베른? 아니, 그것보다 선이 얇고 키도 작은 것 같은데.
머리카락도 긴 것 같고……여자인가? 누구지?
모르겠다. 이제 너무 지쳐서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사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으려는 그 순간.
[이런 곳에서 잠들면 안 돼, 아가.]
지금까지 들어 본 목소리 중에 가장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보라색 마법진이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빛을 발하며 번쩍거렸다.
“엘리사!”
그 직후, 크고 단단한 손이 마법진에서 튀어나와 쓰러지는 엘리사의 손을 낚아채듯이 잡아 끌어당겼다.
****
“쿨럭-.”
메마른 기침과 함께 영원히 감겨 있을 것처럼 보이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정신이 들어?”
바로 소리를 담는 귀와 달리, 오랜 시간 어둠에 적응해 있던 눈동자는 작은 빛 변화도 쉬이 감지하지 못했다.
아직 의식이 흐릿한 탓이기도 했다.
“엘리사.”
눈을 천천히 몇 번 깜빡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엘리사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칼…….”
“그래.”
“나…… 돌아온 거예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결국 에이지가 바라는 대로 그 세계에 영원히 갇혀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건가?
칼베른의 얼굴이 보이는 걸 봐서 그런 것 같았지만,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돌아왔다.”
그러자 칼베른이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내 곁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이제 전부 다 끝났으니까, 아무 걱정하지 않고 푹 쉬어도 돼.”
“…….”
“무사히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다.”
귓가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비로소 현실을 완벽하게 자각한 엘리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완전히 정신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