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Can't stop. (14)
“이, 이거 놔!”
엘리사는 당황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젤리아의 머리카락은 올가미처럼 더욱 그녀를 옥죄었다.
“놓으란 말이야!”
처절한 비명이 공허한 어둠 속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거슬렸는지 젤리아가 인상을 쓰며 엘리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끝인 건가?’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는 거야?
엘리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누가 제발 나 좀 도와줘!
소리 없는 아우성과 함께 실낱같이 붙잡고 있던 의식이 점차 흐려지더니 눈앞이 새하얗게 번졌다.
****
달빛을 녹여놓은 듯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은발이 무더운 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렸다.
그에 반해 우그러져 마치 괴물을 연상시키는 흉측한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어째서……날 배신한 거야?]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 역시 잔뜩 우그러져 흉측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왜 나를……!]
구슬프게 우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흔한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 상황이 몹시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목표를 잃은 여자의 손이 허공을 휘젓다가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에프란…….]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젤리아.]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제국의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신분이 높고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데 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까.]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황녀를 선택한 거야. 황녀라면 제국의 영웅인 나와 딱 어울리는 여자잖아.]
무례하고 무자비한 언사가 여자, 젤리아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젤리아가 눈물 젖은 눈을 홉, 뜨며 쳐다보자 조금이나마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지 에프란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도 내가 잘되기를 바랐잖아. 그래서 위험한 흑마법까지 써서 날 불사신으로 만들어준 거고.]
[…….]
[그 마음, 평생 잊지 말고 내가 행복하길 바라줬으면 좋겠어, 젤리아.]
에프란은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바닥에 주저앉은 젤리아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뭐 저딴 개새……!’
어떻게 그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여자에게 저딴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유령처럼 반투명한 상태로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엘리사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속으로 읊조렸다.
도저히 에프란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동시에 젤리아가 더욱 불쌍해져서 엘리사는 그녀를 내려다봤다.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빠져나온 것처럼 하염없이 울던 젤리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물 젖은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보였다.
젤리아는 마치 엘리사가 보이는 양 그녀 쪽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읊조리듯 물었다.
[이래도 넌 내가 저 남자를 용서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엘리사는 멈칫했다가 속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젤리아가 입술 끝을 살짝 올리며 옅게 웃었다.
[역시 그렇지? 난, 내가 한 짓은 정당한 거야.]
‘저 남자한테 한 건 말이죠.’
젤리아의 입술에 맺힌 미소가 사라졌다.
엘리사가 젤리아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속으로 계속 말했다.
‘저 남자는 벌을 받아 마땅해요.’
젤리아가 섬뜩하게 웃었다.
[저 남자와 그 후손들은 말이지.]
‘그럼 그 저주에 희생된 불쌍한 사람들은요?’
젤리아가 멈칫했다.
어느덧 그녀의 앞에 도착한 엘리사가 무릎을 굽히고 젤리아의 떨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그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당신의 저주에 희생되어야 하는 거죠?’
[…….]
‘당신이 원하는 복수가 정말 이런 건가요? 불쌍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걸 정말로 원했나요?’
젤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엘리사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그녀의 기억을 엿봤으니까.
순간 분노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에프란과 그 후손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리긴 했지만, 사실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자신의 저주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을.
그 죄 없는 사람 속에는 에프란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엘리사가 젤리아를 끌어안고 속삭였다.
‘아직은 되돌릴 수 있으니까…… 부디 더 이상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아요, 젤리아.’
[……]
‘고작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 때문에 평생 후회하고, 분노하며 살기엔 당신이 너무 아까워요.’
이번엔 엘리사의 진심이 통했는지 젤리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주변 공기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면서 허공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깨진 공간의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모습은 마치 종말을 앞둔 세상처럼 보였지만, 엘리사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이 세계는 젤리아가 만든 가짜였으니까.
이 세계가 무너져야 원래의 세계로, 칼베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어서 빨리 무너지길 바라고 있는 와중.
“……드디어 찾았다.”
“!”
깨진 틈 사이로 손이 불쑥 튀어나와 엘리사를 공간 틈 사이로 끌고 갔다.
****
겁도 없이 흑마법의 결계 안으로 들어간 칼베른의 몸이 조금씩 옅어졌다.
흑마법과 동화돼서 무의식의 세계 같은 또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려는 것이다.
그러면 살아 있으나 죽은, 이 세계에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크라임은 기함하며 칼베른을 구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건 닉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 돼, 엘리사……!”
단지 그가 구하고 싶은 사람은 칼베른이 아닌 엘리사라는 점이 달랐다.
먼지와 피가 뒤엉겨 더러워진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으며 어떻게 하면 엘리사를 구할 수 있을지 고심하던 닉의 눈에 들어온 건 엘리사의 목 주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였다.
저게 뭐지?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응시하던 닉은 곧 크라임의 신성력이 깃든 십자가 목걸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거라면……!
“대주교님! 엘리사가 십자가 목걸이를 차고 있습니다!”
“!”
크라임도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고민과 근심으로 뒤섞여 어두웠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닉!”
크라임이 원하는 게 뭔지 바로 알아들은 닉이 냉큼 그의 손에 피 묻은 성검을 쥐여주었다.
크라임이 성검을 쥐자 새하얀 빛이 검을 감싸더니, 이내 그의 키만큼이나 기다란 석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크라임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움켜쥔 석장에 이마를 기댔다.
“신이시여. 불쌍한 당신의 어린 양을 지켜주소서.”
크라임이 기도하자 엘리사가 끼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가 새하얗게 반짝거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그 주변으로 새카만 스파크가 일며 엘리사의 몸에 상처를 입히자 칼베른은 주저하지 않고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검은 스파크 때문에 생긴 외부적인 고통과 신성력과 몸의 저주가 반발해 생긴 내부적인 고통이 중첩되면서 지독한 고통이 몸을 강타했다.
“윽.”
어찌나 지독한지 나름 고통을 잘 참는 칼베른이 순간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그런데도 칼베른은 십자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쥐였다.
힘줄이 설 정도로 꽉 움켜쥔 손 틈 사이로 새하얀 빛은 작은 보름달처럼 뭉쳐 떠오르더니 이내 엘리사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
“악!”
강한 악력에 반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끌려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엘리사가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정말이지, 끝까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엘리사.”
그녀를 끌어낸 사람은 에이지였다.
에이지가 짜증 섞인 눈으로 엘리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얌전히 죽었으면 이런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텐데.”
엘리사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고 에이지를 노려봤다.
이곳 역시 공간이 깨지고 있어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당신이야말로 쓸데없는 짓을 그만하지, 그래? 당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잖아.”
에이지가 조소했다.
“상관없는 일이라고 누가 그랬지?”
“뭐?”
“엘리사, 그렇게 많은 걸 보고 느꼈으면서 아직 눈치채지 못했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엘리사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에이지의 입가에 핀 미소가 깊어졌다. 그의 몸을 타고 어두운 보라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내가 네 어미와 사촌 관계라면, 아무리 못해도 나이가 30은 넘었다는 건데 어째서 이렇게 어린 모습인지.”
“…….”
당연히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사촌 중 늦둥이거나 동안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지적하는 걸 보아하니 뭔가 있는 모양이다.
엘리사가 말없이 쳐다보자 에이지가 제 가슴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내 혈족은 저주의 반동 때문에 일정 이상 나이를 먹으면, 그 뒤로는 늙지 않고 다시 어려져.”
저주의 반동이란, 무시무시한 저주를 시전 하는 대신 그 대가를 치르는 걸 말하는 거였다.
저주의 효력이 클수록 돌아오는 대가 역시 컸다.
그런데 에이지가 저주의 반동 때문에 어려진다는 건…….
“누군가를 저주했나 보지?”
“여전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구나.”
“당신이 알아듣지 못하게 말했잖아.”
에이지가 지지 않고 반박하자 에이지의 입술에 핀 미소가 깊어졌다.
“내가 저주의 반동을 받는 이유가 젤리아 때문이라고 하면 이해하겠어?”
카캉, 깨진 공간의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뒤늦게 에이지의 말뜻을 전부 알아들은 엘리사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당신…… 젤리아의 후손이야?”
“맞아. 정확히는 그녀의 친동생인 제론의 후손이지.”
에이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너도, 그녀의 피를 이어받았어.”
내가 젤리아의 피를…….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이야기에 엘리사는 반쯤 정신을 놓고 멍하니 에이지를 바라봤다.
에이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젤리아는 에프란과 그 후손들을 저주하고 죽었다. 그 바람에 그녀에게 향했어야 할 저주의 반동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친동생인 제론과 그 후손들에게 전해졌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나마 저주의 반동이 다시 어려지는 거라 괜찮다고 생각했던 제론은 1년이 지나자 생각을 바꿨다.
“1년 만에 무려 5살이나 어려졌거든.”
그렇게 제론은 매년 적게는 5살에서 많게는 10살까지 어려졌고, 약 3년 뒤에는 말도 못 하는 갓난아기가 돼서 결국 죽었다.
“그건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어. 어려지는 나이는 제각각 달랐지만, 전부 30대가 넘어지면 조금씩 어려졌지.”
에이지는 쓰게 웃으며 그의 손을 바라봤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나이를 더 이상 먹지 않고, 조금씩 어려지고 있지.”
그나마 어려지는 속도가 다른 혈족보다 느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진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속도로는 빠르면 2년, 늦어도 3년 안에는 죽겠지.”
죽는다. 까마득하면서도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상상을 한 에이지의 표정이 구겨졌다.
“죽고 싶지 않아.”
에이지는 손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다고. 그런데 벌써 죽을 수는 없어.”
“……그래서 2황자를 이용해서 그이를 죽이려고 했던 거구나. 저주가 완전히 끝나야 저주의 반동도 사라질 테니까.”
그동안 저주와 흑마법에 대해 공부한 덕분에 에이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은 엘리사가 말하자 에이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가 이용한 건 2황자뿐만이 아니야.”
“무슨…….”
“마리아라고 했던가. 그 멍청한 황녀의 이름이.”
마리아의 이름이 거론되자 엘리사는 눈을 홉 떴다.
“설마 마리아 황녀를 죽인 게 당신이야?”
“맞아.”
에이지가 산뜻한 얼굴로 엄청난 말을 쏟아냈다.
“중요한 임무를 맡겼는데 실패한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날 배신하려고 하길래 죽여버렸지.”
“중요한 임무?”
거기까지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에이지가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어둠이 모여들면서, 기다란 검이 생겨났다. 어둠이 모여든 검은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생각보다 잡담이 너무 길어졌네. 이제 곧 죽을 사람한테 이렇게 말을 많이 할 필요는 없었는데.”
쿵, 에이지의 뒤로 깨진 공간 조각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얼른 처리해야지. 너도, 그 남자도 말이야.”
에이지가 조금씩 다가오자 엘리사가 두 팔을 허공에 내저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런 짓을 하는 것보다 젤리아를 설득해서 저주를 푸는 게 낫잖아!”
에이지가 섬뜩하게 웃었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어.”
에이지가 휘두른 검이 공간을 가르며 엘리사를 베어내려는 그때.
파앗-!
엘리사가 끼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에서 신성력이 담긴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흑마법사인 에이지에게 신성력이 담긴 빛은 쥐약이었다.
“……큭!”
에이지가 고통스러워하며 물러서자 엘리사는 도망치기 위해 서둘러 일어섰다.
그런 엘리사의 앞에 새하얀 구체가 나타났다. 마치 자신을 잡으라는 듯 구체가 요동치자 엘리사는 손을 뻗어 구체를 손안에 움켜쥐었다. 그러자 구체가 새하얀 성검으로 변했다.
‘이 검으로 에이지를…….’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엘리사는 그대로 손을 뻗어 성검을 에이지의 몸에 쑤시듯이 찔러넣었다.
파앗-!
성검이 꿰뚫린 부위를 중심으로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