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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화. Can’t stop. (13) (151/156)

151화. Can’t stop. (13)

쿠웅-!

칼베른이 부딪친 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

칼베른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목을 파고들려는 걸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는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 불리는 데다가 젤리아의 축복까지 받고 있지만, 인외 종족을 상대하는 건 힘들었다.

특히 식귀 같은 흑마법의 종속들은 신력이 깃든 무기로만 무찌를 수 있어서 더욱 버거웠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칼베른이라서 가능한 거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스틱스강을 건넜을 것이다.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몸이 부서진 벽에 파묻혔다. 칼베른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엘리사가 돌아올 때까지만 버티면 돼.’

크라임의 신력만 있다면 이딴 괴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 괴물이지.’

초점은 없으나 핏발이 잔뜩 선 광기 어린 눈동자. 짐승처럼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 시커멓게 변색한 피부 등 어느 하나도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즉, 데아른은 더 이상 황자가 아닌 괴물이었다. 황족이라도 이렇게 괴물이 됐다면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크라임이 올 때까지만 버틴다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됐지만, 문제는 그게 힘들다는 거였다.

콰쾅, 벽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칼베른의 몸이 기울어졌다.

칼베른이 무너진 벽 더미를 짚으며 몸의 중심을 잡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심장을 정확하게 겨냥하며 날아왔다.

‘피할 수 없어.’

공격당해도 죽진 않겠지만, 치명상을 입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칼베른은 치명상이라도 피하고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우드득, 식귀의 손톱이 칼베른의 팔을 정확하게 박혔다. 생살이 찢기면서 사방으로 피가 튀고, 그 주변이 독에 당한 것처럼 새카맣게 변했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나왔지만, 칼베른은 억지로 삼키며 멀쩡한 손으로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냈다.

칼베른 때문에 양손을 다 쓸 수 없게 되자 데아른은 날카로운 이빨을 내밀며 그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양손을 쓸 수 없는 건 칼베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 칼베른이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리는 순간.

번쩍-

데아른의 머리 위로 새하얀 빛이 쏟아지면서, 그는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춰 섰다.

“받으시죠!”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더니 성검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칼베른은 있는 힘껏 데아른을 밀쳐낸 뒤, 성검을 낚아챘다.

그리고 성검을 데아른의 심장 부위에 정확하게 찔러넣었다.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성검을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키아악!”

데아른이 무척 괴로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새하얀 빛은 악으로 물든 그의 몸을 빠르게 집어삼켰고, 이내 데아른은 빛에 완전히 둘러싸여 보이지 않게 됐다.

칼베른은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빛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건 크라임과 닉 역시 마찬가지였다. 닉은 혹시 데아른이 죽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서 신성력이 깃든 단검을 손에 꼭 움켜쥐고 있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진 자리엔 미라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은 데아른이 쓰러져 있었다.

그가 확실하게 죽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칼베른이 다가가려고 하자 닉이 말렸다.

“제가 가겠습니다. 만약의 사태가 일어난다면 제가 처리하기 쉬울 테니까요.”

맞는 말이었기에 칼베른은 순순히 물러났다.

닉이 데아른의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 크라임이 칼베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상처를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소공작님.”

칼베른은 젤리아의 축복 덕분에 뛰어난 치유력을 가지고 있지만, 평범한 부상일 때의 이야기였다.

식귀 같은 흑마법의 종속에 당했을 땐, 치유력이 현저하게 저하되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가 필요했다.

칼베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크라임은 마음대로 팔을 가져가 상처를 치료했다.

“제가 부인을 숨긴 일 때문에 화가 나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만약 숨기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지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뚫어지도록 그를 쳐다보는 칼베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부인에게 걸린 숙주 마법이 발동돼서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겼을 겁니다. 그러니 당시 저로서는 그러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습니다.”

변명처럼 들렸지만, 전부 사실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봤을 때, 칼베른 역시 크라임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크라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엘리사가 위험해졌기 때문이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데아른의 상태를 확인한 닉이 말했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칼베른은 물론 때마침 치료를 마친 크라임이 데아른을 쳐다봤다. 움푹 파인 눈동자가 몹시 억울해 보였다.

“고귀하게 태어나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군요.”

크라임이 몹시 안타까워하며 기도했다.

데아른의 생사에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진 칼베른이 닉에게 물었다.

“오는 길에 엘리사를 보지 못했나?”

데아른의 시신에 꽂혀 있는 성검을 갈무리하던 닉이 멈칫했다. 크라임의 반응 역시 이상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칼베른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들 그의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이에 답답해진 칼베른이 성큼 골목길을 나오자 그 뒤를 크라임이 다급하게 따랐다.

칼베른은 골목길을 나서자마자 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쓰러져 있는 두 인영을 발견했다.

“엘리사!”

“안 됩니다!”

그중 한 명이 엘리사라는 걸 안 칼베른이 다가가려고 하자 크라임이 다급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칼베른이 인상을 팍 쓰며 크라임을 노려봤다.

“비키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크라임 대주교!”

“부인께선 지금 흑마법에 걸려 무의식의 세계에 빠지셨습니다. 그러니 다가가시면 안 됩니다! 괜히 다가가셨다간 소공작님까지 흑마법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크라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엘리사가 위험하다.

그것 하나만으로 칼베른이 움직일 이유는 충분했다. 칼베른은 데아른을 지나쳐 엘리사 쪽으로 다가갔다.

파지직-

“……!”

그러자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계가 검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그를 밀어냈다.

결계와 닿은 부위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뛰어난 치유력 덕분에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러길래 제가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이게 뭡니까?”

“결계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과 저 흑마법사를 방해하지 못하게 쳐둔 거지요.”

흑마법사? 칼베른은 그제야 엘리사 옆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자신이 그토록 찾던 흑마법사라는 걸 알아챘다.

“저 결계를 없앨 수 있습니까?”

“없애는 건 가능하지만, 그럼 무의식 세계에 빠진 부인 역시 위험해집니다. 자칫 그 세계에 부인의 의식이 갇혀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는 거지요. 의식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니까요.”

죽는다. 그 말이 가슴에 박히면서 숨이 막혔다.

“결계를 없애지 않고 그녀를 구하는 방법은요?”

그런 방법은 없는지 크라임이 고개를 저었다.

“하.”

칼베른은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짚었다.

엘리사를 구하려면 결계를 없애야 하는데, 그러면 엘리사가 위험해진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좋지?’

없는 지식을 끌어모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던 칼베른이 크라임에게 물었다.

“그녀의 의식을 무의식의 세계에서 끌고 나오면, 그땐 결계를 없애도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결계를 없애고, 부인을 구출해낼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그게 쉽지 않다는 거지요.”

쉽지 않다는 건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의미.

칼베른은 크게 심호흡한 뒤, 엘리사 쪽으로 걸어갔다.

파지직, 검은 스파크와 함께 연기가 일었다.

“무슨……!”

크라임이 당황하며 칼베른을 말리려고 했지만, 결계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강력한 신력 때문에 흑마법에 대한 반발력이 보통 사람보단 몇 배는 커서 결계 근처에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크라임은 발만 동동 굴리며, 마치 거친 풍랑을 헤치며 항해하는 배처럼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는 칼베른을 쳐다봤다.

스파크를 이기지 못한 옷과 생살이 찢어졌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생기니, 상처 부위는 점차 커졌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가 지나간 자리에 뚝뚝, 떨어졌다.

상처가 깊은 만큼 고통이 상당할 텐데, 칼베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주저한 적도 없었다.

마침내 엘리사의 앞에 도착한 칼베른이 의식이 없는 엘리사를 끌어안았다.

****

엘리사는 어둠 속을 방황하며 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출구를 찾긴커녕 사위가 너무 어두워서 자신이 걸어가는 곳이 앞인지 뒤인지, 아니면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저기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답답한 마음에 소리쳐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긴, 있을 리가 없지. 엘리사는 자포자기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출구를 찾아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의지는 깎이고 불안감과 초조함만 커졌다.

이대로 영원히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누구든 좋으니까 여기서 나가는 방법을 알려 줘!”

엘리사의 처절한 외침이 어둠 속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메아리처럼 소리가 점점 작아지다가 완전히 사라질 무렵, 눈앞에 무언가 번쩍거렸다.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은 마치 조명처럼 계속 깜빡거렸다.

뭐지? 저기에 사람이 있는 건가?

설마…… 에이지는 아니겠지?

엘리사는 불안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 빛이 깜빡이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냥 보기엔 굉장히 멀어 보였는데,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금방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사는 붉은빛이 약간 도는 탐스러운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채, 검은 실타래에 얽혀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여자의 주변엔 보라색 기운이 반딧불처럼 부유하고 있었고, 기절한 건지 여자는 엘리사가 지척까지 다가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빛은 여자의 목걸이에서 나오는 거였다. 처음 보는 목걸이였지만, 목걸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클라우드 공작가의 문양은 여자가 공작가와 연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거기에 붉은빛 은발과 보라색 기운을 더해서 생각해보면…….

“……젤리아.”

엘리사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을 뱉자 그게 정답이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빛이 사라졌다.

곧 어둠이 드리웠지만 젤리아의 주변에 부유하는 기운들 덕분에 앞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진짜 이 여자가 젤리아가 맞는 건가?’

300여 년 전에 존재했던,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로 연인과 그 후손에게 끔찍한 저주를 내린 장본인과 마주하게 된 엘리사는 몹시 당황하며 젤리아를 바라봤다.

보라색 기운이 멍하니 서 있는 엘리사의 주변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그중 하나가 스스로 엘리사의 몸에 부딪히며 터졌다.

“어떻게 날 버릴 수가 있어? 당신을 위해 내 모든 걸 바쳤는데 어떻게……!”

“당신을 저주해. 영원히 저주할 거야. 그래서 날 버린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

그러자 젤리아가 보고 느꼈던 기억과 감정들이 엘리사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와, 마치 엘리사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동화됐다.

보라색 기운들이 계속 터지면서, 젤리아의 기억과 감정들이 썰물처럼 밀려오자 엘리사는 혼란스러워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젤리아가 아닌데, 젤리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너무 슬프고, 우울했다. 자신을 배신한 연인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어떻게든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마구 치솟았다.

그리고…….

“……날 동정해?”

불현듯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엘리사는 고개를 들고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언제 눈을 뜬 건지 젤리아가 초점이 흐린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사는 오늘 처음 젤리아를 봤지만, 마치 오래전에 봤던 것처럼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날 동정해?”

“……네.”

마지막에 느꼈던 감정이 바로 동정이었기에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을 동정해요.”

“왜 나를 동정하지?”

“그야 당신이 불쌍하니까.”

분노나 복수심, 슬픔 등 모든 것들은 젤리아가 느낀 감정이었고, 엘리사가 순수하게 느낀 감정은 오로지 동정심뿐이었다.

“고작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얽매여서 평생을, 죽어서도 괴로워하는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동정해요.”

엘리사의 대답을 들은 젤리아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네가 뭘 알아.”

남은 보라색 기운들이 불안하게 요동치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에 흩날렸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니까 그딴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은발이 촉수처럼 뻗어 나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엘리사의 팔과 다리를 속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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