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0화. Can’t stop. (12) (150/156)

150화. Can’t stop. (12)2021.12.08.

  크라임이 정신없이 말을 타고 달려왔을 때, 집은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난장판이었다. 현관문은 반쯤 부서져 깃발처럼 바람에 흔들렸고, 사방에 깨진 유리 파편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일까. 복도에는 검은 기운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역시 폭주했구나!’

역시 기도할 때 느꼈던 건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크라임의 얼굴이 약간 새하얗게 질렸다.

“닉! 소공작 부인!”

크라임은 신성력으로 몸을 보호한 뒤 난장판이 된 집 안을 돌아다니며 닉과 엘리사를 찾아다녔다.

“닉!”

곧 복도 안쪽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닉을 발견한 크라임이 황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크라임의 몸에서 강력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와 닉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넘실거리던 검은 기운을 정화했다.

“윽.”

덕분에 의식을 차린 닉이 작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괜찮느냐, 닉.”

닉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엘리사는…….”

“소공작 부인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너 말고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서 여기 없는 것 같구나.”

크라임의 대답에 닉은 인상을 쓰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웬 녀석이 나타나……엘리사를……어서 구해야…….”

“웬 녀석이라니. 클라우드 소공작님을 말하는 게냐?”

“아니요. 그 녀석은…….”

닉이 고통이 섞인 신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식귀……였습니다. 아직은 자아가 있는……식귀요.”

  **** 퍽-! 칼베른의 주먹이 데아른의 뺨에 매섭게 꽂히면서 고개가 맥없이 돌아갔다. 얻어맞은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터진 입술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이 개자……!”

맞고만 있을 수 없는지 데아른이 눈을 부릅뜨고 덤벼들었지만, 칼베른의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퍽, 퍼억-!

“큭!”

되레 덤벼든 것 이상으로 지독하게 얻어터졌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떡이 된 데아른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벽을 타고 주저앉았다. 칼베른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데아른의 목에 겨눴다. 날카로운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괜찮겠어?”

데아른은 손이 베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검날을 맨손으로 잡으며 히죽 웃었다.

“황자인 날 죽이면 제아무리 너라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칼베른도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죽으면 됩니다.”

“뭣……!”

칼베른은 데아른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가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골목길 안쪽에 주저앉아 칼베른과 데아른이 싸우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엘리사가 벽을 짚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진짜 죽인 건 아니겠죠?”

그 황족이 반역을 저지르는 등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황족을 해치면 정당방위라고 해도 무조건 처벌을 받았다. 그건 칼베른도 예외가 아닌지라 걱정돼서 묻자 그가 검집에 검을 다시 꽂으며 대답했다.

“칼등으로 쳐서 기절시킨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엘리사 쪽으로 다가와 벽을 짚은 손을 제 어깨에 올리고,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곧 엘리사의 몸 군데군데 난 상처들을 발견한 칼베른의 미간이 구겨졌다.

“2황자가 이런 건가?”

“그럼 누가 그랬겠…… 으앗.”

엘리사는 칼베른이 자신을 안아 들자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런 엘리사가 웃긴지 칼베른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웃으면 정드니까 웃지 마요.”

“이런. 아직 정이 안 든 건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잖아요.”

엘리사는 눈을 흘기며 칼베른의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체취를 폐 깊은 곳까지 들이마시니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이 느슨해진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칼베른이 엘리사를 고쳐 안으며 대답했다.

“바로 돌아가지.”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해야 할 일?”

“닉을 구해야 해요.”

닉이 아직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낮은 확률이라도 있다면 구하러 가는 게 맞았다. 그러나 칼베른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닉을 구하고 싶어요.”

“……그 녀석과 크라임 대주교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그건 모르는 거죠. 그리고…….”

엘리사는 닉과 크라임이 이런 선택을 한 게 제게 나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닌 흑마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칼베른에게 자신이 흑마법의 숙주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 입으론 말할 수 없어. 엘리사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칼베른의 목을 좀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닉을 구해주세요.”

“……하아.”

칼베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난 그대에게 너무 약한 것 같아.”

“그래서 싫어요?”

“그게 아니라서 문제야.”

푸념 섞인 대답에 엘리사가 옅게 웃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어디 있지?”

“모르겠어요.”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왔는지, 자신이 붙잡혀 있던 곳이 어디였는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크라임 대주교라면 어딘지 알 테니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지. 2황자 문제도 처리해야 하고.”

그러고 보니 2황자도 데리고 가야 하는구나. 엘리사는 칼베른의 뒤를 쳐다봤다. 그곳에 데아른이 쓰러져 있어야 하는데…… 없어?

“왜 그러지?”

“그…….”

“말하지 마.”

  엘리사는 데아른이 없어졌다고 말하려 했지만,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말문이 턱 막혔다.  

“아무것도 말하지 마. 넌 조용히 있으면 돼.”

“엘리사?”

칼베른이 의아해하며 엘리사를 바라봤다. 엘리사가 목을 감싸 쥔 채 입을 벙긋거렸다.

“왜 그러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베른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얼른 돌아가야겠군.”

엘리사가 갑자기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게 흑마법 때문이라고 생각한 칼베른이 돌아서는 그 순간. 훼엑-! 날카로운 무언가가 짙은 어둠을 가르며 칼베른을 향해 날아왔다. 혼자였다면 검을 뽑아 막았겠지만, 품에 엘리사가 있으니 그러지 못하고 칼베른은 옆으로 몸을 굴렸다. 챙강-! 그 직후, 그들이 있던 자리에 둔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반쯤 구부러진 검은 단도였다. 그 단도가 날아온 쪽을 돌아보니 어두운 기운을 두르고 있는 데아른이 보였다. 그의 주변에 맴도는 섬뜩한 기운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엘리사가 흠칫 몸을 굳혔다.

“…….”

엘리사처럼 기운을 볼 수는 없지만, 데아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으로 감지한 칼베른이 엘리사를 그의 등 뒤에 숨기고 검을 빼 들었다.

“위험하니까 떨어져 있어.”

엘리사는 당신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여전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그의 옷깃을 잡자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칼베른이 말했다.

“괜찮아. 난 불사신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다치고 고통을 받는 건 똑같은데…….

“크륵.”

짐승이 목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데아른이 칼베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칼베른은 엘리사를 살짝 밀쳐낸 뒤, 똑같이 데아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난 엘리사는 데아른과 격렬하게 싸우는 칼베른을 쳐다봤다. 데아른은 칼베른이 휘두른 검을 손쉽게 잡았다. 카캉, 강철끼리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검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엄청난 괴력에 칼베른의 눈이 약간 커졌다. 데아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힘으로 칼베른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땅에 딱 붙인 발이 조금씩 밀렸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칼베른은 일부러 몸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덩달아 무너진 데아른이 휘청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발목을 세게 걷어차 그를 쓰러뜨렸다. 그리고 종잇장처럼 구겨졌으나 새파란 날이 살아 있는 검으로 그를 베어내려고 했지만, 데아른을 둘러싼 어둠이 실드처럼 칼베른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직후, 데아른이 핏발이 선 눈동자를 번뜩이며 짐승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칼베른도 구겨진 검을 방패 삼아 공격을 막아냈다. 손톱이 닿은 부위가 독에 당한 것처럼 새카맣게 부식됐다. 곧 중심 부위가 녹은 검이 뎅겅, 부러졌다.

“식귀…….”

칼베른과 데아른의 싸움을 지켜보던 엘리사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 목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크게 소리쳤다.

“2황자가 식귀가 된 것 같아요!”

앙로가 영지의 치료소에서 봤던 식귀와 형태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했다. 칼베른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동시에 절망한 건, 식귀는 평범한 검으로 상대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신성력이 깃든 성검이 필요했다. 아니면 크라임 대주교의 신성 주문이라던가.

“이 골목을 나가면 내가 타고 온 말이 있다!”

칼베른이 데아른의 공격을 막아내며 엘리사에게 소리쳤다.

“그 말을 타고 클라우드 공작저로 가서 크라임 대주교를 데리고 와줘!”

“알았어요!”

칼베른을 두고 가는 게 걱정됐지만, 여기 있어봤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방해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리고 엘리사도 식귀를 상대하기 위해선 신성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격렬히 싸우는 두 사람을 지나쳐 재빨리 골목길을 나왔다. 칼베른이 말한 대로 골목길 입구에 그가 타고 온 걸로 추정된 말이 있었다.

“아, 길을 모르는데……!”

말에 올라탄 뒤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엘리사는 고삐를 세게 쥐며 주변을 둘러봤다. 사위가 어두운 데다가 온통 낯선 건물들만 보여서, 여기가 어디인지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가보자.”

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운이 좋다면 순찰을 도는 경비를 만나서 길을 물어볼 수도 있을 거야. 그리 생각한 엘리사가 떠나려는 그때. 히이잉-!

“……!”

느닷없이 폭주한 말이 날뛰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 낙마했다.

“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이 몸을 엄습했다. 이미 다친 몸인지라 고통이 더 크게 느껴졌다.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을 정도였다.

‘일어서야 하는데…….’

머리로는 어서 클라우드 공작가에 가서 크라임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엘리사의 머리 위로 달빛에 비친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랜만이네, 엘리사.”

에이지였다. 그의 몸 주변에는 데아른에게서 봤던 것과 똑같은 거무튀튀한 보라색 기운들이 반딧불처럼 부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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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의 머리맡에 쭈그려 앉은 에이지가 웃으며 안부 인사를 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

“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썩 좋지 않다는 건 알겠네.”

자신을 놀리는 것이 분명한 말에 엘리사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왜 이러냐고 묻는 건가? 아니면 왜 왔냐고 물어보는 건가.”

에이지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도 아니면……널 흑마법의 숙주로 만든 사람이 나인지 물어보는 걸까?”

질문이었지만, 엘리사에겐 그렇다는 대답처럼 들렸다. 역시 에이지가 사악한 흑마법사였구나. 엘리사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게 세게 깨물면 입술 상해.”

에이지가 걱정된다는 듯 엘리사의 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엘리사는 그런 에이지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깨물었다. 피가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세게 깨물었는데 에이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당찮다는 듯 말했다.

“끝까지 발악하는 게 귀엽네.”

“…….”

“살고 싶어?”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기도 하고, 그의 손가락을 깨물고 있느라 엘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리사의 마음을 알아챈 듯 에이지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었다.

“미안. 나도 모처럼 만난 조카를 죽이고 싶지 않지만……일이 꼬여버려서 어쩔 수가 없어.”

“…….”

“전부 네가 그 남자를 치료해주려고 발악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니까 너무 원망하지는 마.”

“……!”

에이지가 자유로운 손으로 엘리사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입이 벌어졌다. 그 덕분에 자유가 된 다른 손도 엘리사의 목을 움켜쥐었다. 데아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힘에 죽음의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지옥으로 가는 거니 외롭지는 않겠네.”

벗어나야 해. 엘리사는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와 사투를 벌이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런 엘리사의 눈에 들어온 건 에이지의 주변에 부유하는 기운들이었다. 다들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 중 유난히 눈에 밟히는 게 있었다. 어쩌면 데아른 때처럼 저걸 이용하면 될지도……. 밑져봐야 본전이니 엘리사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그 기운을 움켜쥐었다.

“……!”

그 순간, 에이지의 주변에 부유하던 기운들이 정신없이 요동치더니 칠흑 같은 어둠이 그들을 둘러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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