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Can’t stop. (10)2021.12.01.
칼베른은 곧바로 황궁을 나가려고 했지만, 아직 황궁이 폐쇄된 상황인지라 나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황태자 궁으로 돌아온 칼베른은 오스카의 인장이 찍힌 출입 증서를 지참하고 나서야 겨우 커다란 성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황궁을 나선 칼베른이 향한 곳은 클라우드 공작저가 아닌 황태자 궁과 연결된 비밀 통로의 출구가 있는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클라우드 공작저로 가려면 무조건 말이나 마차를 타야 하니 칼베른은 근처 대여소를 돌아다니며 엘리사와 크라임이 마차를 빌린 곳을 찾아다녔다.
“아, 그 두 분이시라면 여기서 마차를 빌리셨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대여소에 들렀을 때, 원하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였지?”
“클라우드 공작가였습니다.”
“그들을 공작가에 데려다준 마부는 어디 있지?”
“시간이 늦어 이미 퇴근했습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마부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건, 그들을 목적지인 클라우드 공작가까지 무사히 데려다줬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어째서 엘리사가 돌아오지 않은 걸까. 그 앞에서 바로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공작가 앞에서 내렸는데, 갑자기 다른 볼일이 생각나 다른 곳으로 간 걸까? 이 부분을 확인하면서, 그들을 찾을 사병을 풀기 위해 칼베른은 우선 클라우드 공작가로 향했다. 가는 길에 엘리사와 그리고 데아른을 본 사람이 있는지 탐문 수사를 했으나, 마차를 타고 가서 그런지 그들을 본 사람이 없었다. 공용마차라 가문의 문양도 없고, 이렇다 할 특색도 없어서 그들이 탄 마차를 찾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아무 소득 없이 공작저로 돌아온 칼베른을 맞이한 사람은 에드윈이었다.
“소공작님?”
에드윈은 아직 황궁 폐쇄령이 풀리지 않았는데, 칼베른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약간 놀라며 그를 불렀다. 칼베른이 목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던 셔츠 단추를 풀며 다급하게 명령했다.
“당장 공작가의 기사들을 풀어 부인과 크라임 대주교를 찾아라.”
데아른이 만약 그들을 납치한 거라면 한시가 급했다.
“두 사람은 공용마차를 타고 이동했고, 공용마차를 빌린 장소는 몽테규 7번지에 있는 파란 지붕 대여소다. 거기 마부가…….”
“잠시만요.”
에드윈은 웬만해선 칼베른이 말하는데 끼어들지 않았지만, 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아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
“대주교님이라면 공작저에 계시는데, 어찌 기사를 풀어 찾으시라고 하십니까?”
제 말을 자르는 에드윈을 짜증스레 바라보던 칼베른이 돌아온 질문에 눈썹을 찡그렸다.
“……크라임 대주교가 공작저에 있다고?”
“네. 조금 전에 돌아오셨습니다.”
“부인은? 그녀는 같이 오지 않았나?”
에드윈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엘리사가 같이 돌아왔다면 그녀도 같이 언급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이 공작저로 돌아갔는데, 크라임만 돌아오다니. 상당히 수상했다.
“크라임 대주교는 어디 있지?”
데아른이 아닌 크라임에게 뭔가 있다고 판단한 칼베른은 곧바로 크라임을 만나러 갔다. 방에서 조용히 저녁 기도를 올리고 있던 크라임이 약간 놀라며 칼베른을 맞이했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다행히 황궁 일이…….”
“왜 혼자 돌아오신 겁니까? 부인은 어디 있습니까?”
칼베른은 크라임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물었다. 이에 크라임이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자 칼베른은 역시 엘리사가 사라진 게 그와 연관이 있다고 확신을 내렸다. 데아른이 관련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화가 났다. 크라임이 무슨 이유로 엘리사를 숨겼단 말인가?
“그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소공작 부인께선 무사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물은 건 그게 아닙니다.”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칼베른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팔을 세게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부인의 위치를 말씀하시죠.”
“…….”
“제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면 당장 부인이 있는 장소를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크라임 대주교.”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시선을 보내자 크라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소공작 부인께서 숙주였습니다.”
이번에도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돌아왔지만, 무시할 수가 없는 ‘숙주’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기 때문이다. 칼베른은 제 귀를 의심하며 크라임에게 물었다.
“지금…… 숙주라고 했습니까?”
“네. 소공작 부인께서 흑마법의 숙주였습니다.”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진 문장을 들은 칼베른의 표정이 참담하게 무너져내렸다. 엘리사가 흑마법의 숙주라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칼베른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대주교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아니면 착각하셨거나요.”
“저 역시 착각한 거였으면 좋겠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사실입니다.”
크라임 역시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소공작 부인께서 흑마법의 숙주인 걸 이미 확인까지 끝마친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공작저로 돌아가는 게 좋다고 말한 겁니까?”
“네. 흑마법이 발동되지 못하게 막아야 하니까요.”
부정하면 할수록 진실이 뼈아프게 다가와 칼베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진작 그 사실을 제게 말하지 않은 겁니까?”
“제가 그 사실을 말했다면, 소공작님께서 제가 부인을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해주셨을까요?”
“허락은…… 해줬을 겁니다.”
엘리사가 정말 흑마법의 숙주라면 강한 신성력을 가진 크라임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크라임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죠. 대신 소공작님께서 부인의 곁에 계셨겠지요.”
“…….”
정곡을 찌르는 말에 칼베른이 입을 다물었다.
“흑마법의 숙주는 소공작님께서 생각하신 것보다 더 위험한 존재입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지독한 흑마법에 감염시키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식귀고요.”
“…….”
“그러니 부인을 사람들이 없는 곳에 잠시 모셔둔 겁니다. 그러는 편이 다른 사람들은 물론 부인도 안전할 테니까요.”
이어지는 설명에 칼베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마음 같아선 그런 거 상관없으니 당장 엘리사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모두가 위험해질 테니 꾹 참았다.
“……부인을 고칠 방법은 있는 겁니까?”
“지금은 없습니다.”
칼베른의 표정이 좀 더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치 세상을 잃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문득 앙고라 영지에서 크라임 대주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흑마법을 완전히 없애려면 흑마법의 숙주를 제거해야 한다는 그 말이.
“혹시 부인을 해할 생각이라면 접어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크라임이 입술 끝에 쓴 웃음을 그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크라임 대주교.”
이에 더 불안해진 칼베른이 부르자 크라임이 기도하듯이 두 손을 마주 쥐며 몹시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저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끝까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안 됩니다.”
칼베른이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를 잃는 선택지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소공작님.”
“이성적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럼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겠지요.”
이번에도 정곡이 찔렸지만, 칼베른은 아까처럼 침묵하지 않았다.
“역시 그녀를 돌려받아야겠습니다.”
단 1%라도 크라임이 엘리사를 해칠 가능성이 있다면, 그에게 엘리사의 신변을 맡길 수 없었다. 그러니 칼베른은 엘리사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여러 번 요구했으나, 크라임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협박해도 통하지 않았고. 언제까지 크라임에게 엘리사의 위치를 묻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칼베른은 공작가의 기사에게 크라임을 잘 감시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다시 에드윈을 찾았다.
“공작가의 기사들을 풀어 엘리사를 찾아라.”
아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명령이 내려졌다.
“수도 전역을 샅샅이 뒤지되, 수도 외곽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찾으면 될 것 같다. 내가 아까 말한 마부에게 크라임 대주교를 어디까지 데려다줬는지도 물어보고,”
“네.”
“그리고 그 성기사도 찾아봐.”
지금 생각해보면 크라임이 혼자 황궁에 온 것부터 이상했다. 지금 혼자 있는 것도 이상했고. 그러나 칼베른은 현재 닉이 크라임을 대신해서 엘리사를 감시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
“…….”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돌아온 엘리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은 개운했지만, 기분은 찝찝했다. 뭔가 이상한 일을 당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여긴 어디지? 낯선 풍경이 눈에 밟혔다. 특히 방 안을 가득 채운 이질적인 기운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엘리사는 잠결에 잊고 있었던 일들을 전부 떠올리고 짧게 탄성을 터뜨렸다. 기억을 토대로 생각해보건대 자신은 크라임에게 납치가 된 게 거의 확실했다. 좀 더 명확하게 사실 확인을 하고, 크라임과 이야기도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엘리사는 일어섰다. 철컹-.
“윽!”
아니, 일어서려고 했는데 무언가 양쪽 발목을 옭아매고 있는 탓에 반도 일어서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여 확인하니 발목에 수갑처럼 채워진 족쇄가 보였다. 족쇄의 끝은 침대 기둥에 단단히 채워져 있었다.
“이게 뭐야?”
설마 크라임 대주교가 이렇게 해 둔 건가? 흑마법의 숙주인 내가 절대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흑마법과 숙주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는 터라 크라임이 왜 이런 건지는 머리는 이해했지만, 마음은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발에 족쇄를 채워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묶어두는 거였다. 이런 이유로 미안하지만 여기 있어 달라고 말하면 될 것이지, 이딴 짓을 하다니.
“대주교님!”
역시 크라임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엘리사는 목청 높여 크라임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나가지 못하니 그를 이곳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불렀을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열리면서 닉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대주교님은 어디 가고 네가 들어온 거야?”
“대주교님은 클라우드 공작저로 돌아가셨어.”
“뭐?”
날 여기에 두고 자기는 홀랑 클라우드 공작저로 돌아갔다고? 엘리사는 어처구니없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닉이 협탁에 쟁반을 내려놓고 침대맡에 앉았다.
“저녁도 안 먹고 계속 자서 배고프지? 네가 좋아하는 감자 고기 수프랑 바게트 가져왔으니까 먹어.”
닉이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엘리사를 배려해서 친절하게 숟가락을 건네주었지만, 엘리사는 받지 않고 쳐냈다. 저만치 날아간 숟가락이 옷장에 부딪히고 떨어졌다. 엘리사는 닉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하나도 배고프지 않으니까, 이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대주교님이나 모셔 와.”
“그렇게 성화를 부리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거야.”
“그때가 언제인데? 한 시간 뒤? 아니면 내일 아침? 그도 아니면 며칠 뒤인가?”
엘리사가 비아냥거리자 닉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주교님도 어쩔 수 없이 이런 선택을 하신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사람을 막 납치해서 족쇄를 채워도 되는 거야? 그것도 고귀한 신을 모시는 대주교님께서?”
“엘리사.”
“알아. 나도 내 상황이 안 좋다는 거.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엘리사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나한테 그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지. 다짜고짜 납치라니. 이걸 내가 이해해줘야 해?”
그래도 양심이 존재하는지 닉은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항상 올곧게 엘리사를 바라보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구겨진 이불 위를 배회했다.
“지금 당장 크라임 대주교님을 만나게 해줘.”
“……그건 안 돼. 내가 지금 대주교님을 모시러 가면 그 남자가 네가 이곳에 있는 걸 알게 될 거야.”
닉이 말하는 그 남자는 칼베른이 분명했다. 그의 이야기가 나오자 엘리사의 표정이 흐려졌다. 엘리사는 유일한 창문을 흘끗 쳐다봤다. 커튼이 쳐져 있어 바깥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들지 않는 걸 봐서 밤인 게 분명했다. 닉도 자신이 저녁을 못 먹고 계속 잤다고 말했고.
‘지금쯤이면 칼베른은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챘겠지?’
아니면 아직 모를 수도 있었다. 그는 황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아직 황궁에 있을 테니까. 황궁을 생각하니 식귀가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앙고라 영지에서 봤던 끔찍한 식귀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자신 때문에 식귀가 생긴 건 아니지만, 자신의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 황궁에 식귀가 생긴 것도 내가 황궁에 있었기 때문이겠지.
“…….”
그래서 엘리사는 칼베른이 보고 싶어도, 그에게 가겠다고 말하고 싶어도 그 말을 하지 못하고 억지로 삼키며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닉은 그런 엘리사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숟가락 다시 가져올게.”
그가 나간 뒤에도 엘리사는 계속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 있었군요.”
당연히 닉이라고 생각하며 계속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엘리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보였다.
“2황자…… 전하?”
바로 데아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