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Can’t stop. (8)2021.11.24.
바스락. 물에 젖은 이끼가 밟히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함정을 피해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자 막다른 길이 보였다.
“……결국 날 발견했군.”
그 길 앞엔 무척 지친 얼굴을 한 올랜드 공작이 주저앉아 있었다. 칼베른은 몇 걸음 떨어져 올랜드 공작의 상태를 살펴봤다. 제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그는 식귀로 변하지 않았다. 앙고라 영지에서 식귀를 직접 상대해봐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죽은 하인은 올랜드 공작을 봤다고만 했을 뿐, 식귀에게 당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한 건 그 하인을 발견한 기사였다. 식귀에게 당한 사람은 겉으로 보면 확 티가 나니, 그 기사가 그렇게 판단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멀쩡한 올랜드 공작을 보니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멀쩡한 건 아닌가.’
칼베른은 올랜드 공작을 다시 훑어봤다. 그의 몸에는 베인 상처 등이 가득했다.
“클라우드 소공작…….”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는 평소와 같은 위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초점이 약간 흐릿했다. 칼베른은 대답하려다 자신이 어린아이 모습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말을 삼켰다. 올랜드 공작이 이 모습을 클라우드 소공작이라고 부른 건, 다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어떻게 알게 된 걸까? 역시 데아른과 함께 알게 된 건가?
“……표정이 왜 그래.”
초점이 흐린데도 온갖 질문을 떠올리는 칼베른의 얼굴은 귀신같이 본 올랜드 공작이 픽, 웃었다.
“내가 죽기를 바란 거…… 아니었나?”
“무슨 소리입니까?”
“죽길 바랐으니 내가 기껏 베푼 호의를 거절한 게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를 빤히 보던 칼베른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되물었다.
“혹시 공작이 말하는 호의가 그때 내게 몰래 준 쪽지를 말하는 겁니까?”
올랜드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반응을 본 칼베른은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는 걸 직감하고 말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 쪽지는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다?”
“네. 황태자 궁에 있을 때, 갑자기 2황자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황급히 대처하다가, 잃어버렸습니다.”
칼베른의 대답에 올랜드 공작은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잃어버렸다고. 그걸 2황자가 본 건가. 그래서 날, 내가 배신했다고 생각해서…… 쿨럭.”
올랜드 공작이 검붉은 피를 토하며 벽에 기댔다.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아무리 봐도 그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지금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곧바로 크라임 대주교를 부를 테니 잠시 기다리십시오.”
크라임과 함께 온 게 이 순간만큼은 다행이었다. 올랜드 공작은 아직 살아야 했으니까. 적어도 모든 걸 증언하기 전까진 살아야 했다. 칼베른이 크라임을 부르러 가기 위해 돌아보자 올랜드 공작이 그의 팔을 잡았다.
“…….”
칼베른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상대가 그를 해칠 악의가 없다는 걸 읽고 순순히 잡혀주었다. 올랜드 공작은 천천히 칼베른은 훑어보더니 웃었다.
“정말로…… 작아졌군. 그 아이가 소공작이었어.”
“다 알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알고 있었지. 그 남자가 말해줘서 알고 있었어.”
그 남자? 데아른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누굴 말하는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올랜드 공작이 칼베른의 셔츠를 찢을 듯이 꼭 움켜쥐며 말했다.
“난…… 아니야. 내가 죽이지 않았어. 내가, 내가 한 짓이 아니란 말이다.”
두서없는 말이었지만, 황제를 습격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챈 칼베른이 역으로 올랜드 공작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공작이 아니라면 누가 했다는 거지?”
마음이 급하니 말이 짧아졌다. 평소였다면 인상을 팍 쓰고 예의 없다고 한 소리 했을 그이건만, 이번엔 그러지 않고 겁에 질린 듯 더듬더듬 말했다.
“그, 남자.”
“그 남자?”
“은색 눈을 가진 남자가 그랬어. 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황제 폐하를 찔러서…….”
은색 눈. 칼베른은 자신들이 쫓던 흑마법사를 떠올렸다. 그 흑마법사의 눈동자도 분명 은색이었다.
“흑마법사가 나타난 건가?”
“흑……마법?”
올랜드 공작은 눈썹을 찡그리다가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
“하하, 그래. 흑마법사였구나. 그래서 마리아 황녀도 죽일 수 있었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지? 마리아 황녀를 죽인 것도 그 흑마법사란 말인가?”
“하하, 하하하.”
“대답해, 올랜드 공작!”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칼베른이 다그치듯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올랜드 공작은 계속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올랜드 공작의 눈동자에 초점이 점점 희미해졌다. 가쁘게 내쉬던 숨이 느려진다. 칼베른을 움켜쥐고 있던 손에서도 점차 힘이 빠지더니 아래로 축 늘어졌다. 거센 바람 앞에 놓인 촛불처럼 생명의 불씨가 꺼지려는 게 분명했다.
“크라임 대주교!”
그 사실을 안 칼베른이 다급하게 크라임을 찾았다. 오스카를 따라 조심스럽게 함정을 피해 오고 있던 크라임은 물론 오스카도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그건 엘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
엘리사는 올랜드 공작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그녀가 놀라 멈춰 선 데에는 설마 했는데 올랜드 공작이 정말 있다는 것과 그 올랜드 공작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올랜드 공작의 몸에서 보라색 마나가 하나둘씩 빠져나와 반딧불처럼 그의 주변을 부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알기로 올랜드 공작은 마나가 없었다.
‘어째서 올랜드 공작의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오는 거지?’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문득 예전에 칼베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알기로 보라색 기운은 마나가 아닌 생명력이라고 했던 그 말을. 그렇다면 저 보라색 마나는 올랜드 공작의 생명력인가? 머리 아프게 생각하던 엘리사는 민들레 씨앗처럼 제 쪽으로 날아오는 보라색 마나를 무심코 건드렸다.
“…….”
칼베른 때처럼 마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마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흡수됐다. 이게 정말 올랜드 공작의 생명력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이것의 성질이 자신의 마나와 똑같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는 건 설마…….’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와 이것저것을 생각해봤을 때 한 가지 결론을 내린 엘리사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반드시 그를 살려야 합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충격받은 엘리사가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칼베른과 크라임은 올랜드 공작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신력은 자연이 아닌 신의 힘을 빌려 사용했기에 마나 차단 결계가 있어도 사용할 수 있었다. 파앗-! 다소 어두컴컴했던 비밀통로에 새하얀 빛이 가득 찼다. 크라임은 올랜드 공작을 살리기 위해 신력을 쏟아부었지만,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다시 살릴 수는 없었다. 그건 신의 영역이었기에, 일개 신의 종인 그의 힘으론 불가능했다.
“……조심해.”
최후를 예감한 올랜드 공작이 마지막 불씨를 태워 칼베른에게 경고했다.
“그 남자를…… 조심하게. 아주 위험한, 자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올랜드 공작의 숨이 멎었다. 칼베른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그의 눈 위에 손을 얹어,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신의 곁에서 편하게 쉬길.”
크라임도 두 손 모아 올랜드 공작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렇게 죽는다고?”
오스카는 인상을 팍 쓰며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렸고. 엘리사는 올랜드 공작의 몸에서 빠져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보라색 마나를 눈으로 좇다가 다시 톡, 건드렸다. 이번에도 별다른 거부감없이 마나가 흡수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엘리사?”
칼베른이 부르는 소리에 엘리사가 그를 돌아봤다. 엘리사의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어두웠다.
“왜 그러지?”
“……할 말이 있어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야기. 진작 말했더라면, 그에게 숨기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렇게 일이 복잡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고, 말을 꺼냈다가 매서운 질책을 받을까 봐 두려웠지만.
“흑마법사에 관한 일이에요.”
“……!”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여기서 일이 더 복잡하고 커지기 전에 말하는 게 맞는다고 판단한 엘리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안 돼. 클라우드 공작가에 사람을 심는 건 불가능해.”
어떻게든 클라우드 공작가에 사람을 심으려고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데아른은 인상을 팍 쓰고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세간에 클라우드 공작가는 철옹성이라고 불렸는데, 그만큼 공작가 사용인들의 충성심이 높기도 하고 감시가 심했다. 그래도 예전엔 어떻게든 비집으면 틈을 만들 수 있었는데, 전에 주치의의 제자가 배신한 것 때문에 감시가 더 심해져 아무리 비집어도 틈이 생기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틈을 만들어 사람을 심는다고 해도 엘리사를 죽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백 퍼센트 실패한다고 확신한 데아른이 삐딱하게 턱을 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다른 방법을 써서 그 여자를 수면 위로 끌어내는 수밖에.”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차를 마시던 장이 물었다.
“어떻게 그 여자를 끌어낼 생각이십니까?”
“방법이야 몇 가지 있지. 문제는 전부 시간이 걸린다는 거야.”
“그런 안 됩니다.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여기서 더 시간을 낭비했다간 그들에게 덜미를 붙잡힐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설마 이대로 포기하자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 아니겠지? 황제까지 저 꼴을 만든 마당에.”
“그럴 리가요.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제가 틈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장이 찻잔을 내려놓고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 대신 황자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셔야겠습니다.”
**** 에이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려니 이야기가 장황하게 길어졌다. 여태 에이지를 말하지 않고 숨긴 이유도 같이 설명하다 보니 그런 것도 있었다. 엘리사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계속 칼베른과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허, 참.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오스카는 몹시 당혹스럽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고.
“…….”
크라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심각한 얼굴로 엘리사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된 일이군.”
가장 중요한 칼베른은 담담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야기가 끝나자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은 저게 다인가? 여태 숨긴 것에 대해 화가 난다거나, 그런 건 없는 건가?
“왜 그렇게 담담해?”
오스카가 엘리사를 대신해서 칼베른에게 물었다.
“넌 황당하지도 않냐? 네 부인의 친척이 우리가 애타게 찾던 흑마법사라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흑마법사의 정체를 잘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냐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다행…… 뭐? 다행이라고?”
오스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엘리사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눈만 껌뻑이며 칼베른을 쳐다봤다. 칼베른은 올랜드 공작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스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이 문제는 제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뒤에 다시 의논하도록 하죠.”
“어? 아, 그래.”
오스카도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돌아섰다. 그 뒤를 칼베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줄줄이 쫓아갔다. 엘리사는 오스카를 따라가며 몇 번 만나지 않았던 에이지를 떠올렸다. 세상에 피를 나눈 혈육은 저 혼자라고 생각해서 그를 만났을 땐 무척 반가웠지만, 이젠 아니었다. 오히려 더 화가 나는 건, 에이지가 그의 범죄에 자신을 이용한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대주교님이 나한테 신력이 담긴 목걸이를 준 것도 이것 때문인가?’
만약 그렇다면 자신과 에이지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니, 크라임에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때마침 출구에 도착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오스카는 출구로 나오자마자 엘리사에게 요구했다.
“얼른 칼베른을 어른으로 만들어 줘.”
“네.”
엘리사는 눈을 지그시 감은 뒤, 칼베른의 손을 잡고 마나를 주입했다.
눈을 감은 건 칼베른이 다시 어른이 되면 옷이 찢어져 속살이 보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의 벗을 몸을 몇 번 봤다지만, 여전히 부끄러웠다.
“이 옷 입어.”
눈을 감고 있어도 오스카가 말해줘서 칼베른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다 입었으니 눈을 떠도 돼.”
엘리사는 칼베른의 말을 듣고 눈을 떴다. 다시 어른이 된 그는 오스카가 가지고 온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다 됐으면 이만 가자.”
여기 온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만 황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올랜드 공작의 시신을 수습하고 식귀 문제를 해결하는 등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어서 돌아가려는데, 크라임이 엘리사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소공작 부인께선 저와 함께 공작저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