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Can’t stop. (6)2021.11.17.
“우음.”
칼베른과 오스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엘리사는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섰다.
“칼……?”
그리고 어미를 찾는 아기 새처럼 본능적으로 칼베른을 찾았다. 모든 게 낯선 상황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또래인 칼베른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칼베른이 보이지 않았다. 옷장과 소파 밑까지 샅샅이 뒤져봤지만, 그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흐윽.”
그 사실에 엘리사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고자 옷자락을 꽉 잡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와 칼베른을 찾아 헤맸다. 하필 오스카가 어려진 칼베른과 엘리사의 정체를 최대한 숨기기 위해 궁정인을 대부분 물린 탓에 엘리사는 정원으로 이어진 후문을 나올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온 것도 무서운데, 아무도 없으니 두려움이 배가 됐다. 결국 참지 못하는 눈물이 뚝, 떨어지려는 그때.
“흑, 흑.”
정원 안쪽에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수풀 사이에 파묻혀 울고 있는 한 소년이 보였다. 칼베른은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어른이었다면 경계했을 텐데 제 또래로 보이니, 엘리사는 크게 경계하지 않고 소년에게 다가갔다.
“누, 누구냐!”
반면 소년은 엘리사를 경계했다. 눈물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빠르게 닦아내곤 날카롭게 소리쳤다.
“난 시온 올랜드다! 정체를 밝혀라!”
“난 엘리사야. 엘리사 제르나.”
“제르나? 그런 가문 들어본 적 없어.”
“나도 올랜드라는 가문 들어본 적 없어.”
똑같이 반박하자 시온이 인상을 썼다.
“거짓말하지 마라! 올랜드 공작가를 못 들어봤을 리가 없어!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한데……흐윽.”
시온은 말하다 말고 난데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엘리사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울지 마.”
엘리사가 시온의 등을 두드리며 그를 달랬다. 그게 도움이 됐는지 시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을 그쳤다. 시온이 빨개진 눈덩이를 손등으로 비비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넌 왜 여기 있는 거야?”
“모르겠어. 눈을 떠보니까 여기였어.”
“그럼 너도 나처럼 잡혀 온 거야?”
“아니야. 그건.”
칼베른이 잠시 놀러온 거라고 했으니, 잡혀 온 건 확실하게 아니었다. 그래서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부정했는데 제멋대로 긍정으로 받아들인 시온은 그녀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꼈다. 주변에 온통 어른뿐이었는데, 또래를 만나 반가운 마음도 있었다.
“넌 여기 왜 있는 거야?”
이번엔 엘리사가 시온에게 같은 걸 물었다. 시온이 한층 더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도망쳤대.”
“나쁜 짓?”
“응. 그래서 할아버지를 잡을 때까지 내가 인질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여기 있는 거야.”
“너무한다. 시온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해준 사람은 너뿐이야.”
다들 시온에게 올랜드 공작이 돌아오지 않으면 네가 잘못될 거라며 겁을 줄 뿐, 엘리사처럼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시온은 좀 더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슬쩍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엘리사는 시온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쓸쓸해 보여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엘리사!”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칼베른이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곧바로 가려고 했지만, 시온이 손을 붙잡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놔 줘.”
“안 가면 안 돼?”
“가야 해.”
“나랑 있어 줘.”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시온이 불쌍하지만, 그보다 칼베른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럼 나랑 같이 가.”
“……그래.”
그건 괜찮겠지. 엘리사는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칼베른에겐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오스카와 이야기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엘리사가 없었다. 깜짝 놀라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그녀를 찾아다니던 칼베른은 엘리사와 시온이 손을 잡고 등장하자 인상을 팍 썼다. 그건 시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저 재수 없는 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왜 둘이 같이 나오는 거지?”
“……무서워.”
칼베른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본 엘리사가 흠칫하며 중얼거렸다. 칼베른은 바로 표정 관리를 하며 좀 더 상냥하게 물었다.
“엘리사, 왜 그 녀석이랑 같이 있지?”
“칼을 찾다가 정원에서 만났어. 칼은 어디 갔었어?”
“잠시 볼일이 있어서…….”
칼베른의 시선이 여전히 꼭 잡은 손에 닿았다.
“이리 와.”
칼베른이 엘리사의 다른 쪽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지 마.”
시온은 이대로 엘리사와 헤어지고 싶지 않을뿐더러, 칼베른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엘리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칼베른이 눈을 부릅 뜨며 시온을 노려봤다.
“놔.”
“싫어.”
시온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두 사람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
졸지에 두 사람 사이에 낀 엘리사는 양쪽에서 각각 잡아당기는 팔이 조금 아파져 오자 작게 신음을 뱉었다. 그녀의 신음 소리를 들은 두 소년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팔을 놨다. 자유의 몸이 된 엘리사는 칼베른과 시온의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곤 이내 걸음을 옮겼다.
“칼.”
그녀가 향한 사람은 칼베른이었다. 엘리사를 얻은 칼베른은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었고, 시온은 울상을 지었다.
“왜 내가 아닌 그 녀석을 선택하는 거야?”
시온의 질문에 엘리사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했다.
“그야 칼이 더 잘생겼거든.”
**** 올랜드 공작을 붙잡을 때까지 오스카 쪽에서 시온을 데리고 있으려고 했지만, 황후가 나서서 가로챘다. 황태자인 오스카보다 황후가 권력이 더 높았기 때문에, 오스카는 시온을 황후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자님.”
그렇게 황후의 궁으로 온 시온의 앞에 한 소년이 등장했다. 새카만 머리칼과 달리 시린 은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오늘부터 도련님을 모실 장이라고 합니다.”
“…….”
시온의 반응이 시큰둥했지만, 장이라고 소개한 소년은 끝까지 웃으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황태자 궁에 갇혀 있는 공자님을 안쓰럽게 여기셔서 데리고 오신 겁니다. 그러니 이곳에선 그 누구의 눈치 보실 필요 없이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하시면 됩니다.”
“……뭐든?”
비로소 시온이 반응을 보였다. 장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온이 휙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황태자 궁에서 한 명 더 데리고 나올 수 있어?”
“황태자 궁에 마음에 드는 시종이 있으셨던 겁니까?”
“시종이 아니라 나처럼 인질로 붙잡혀 있는 아이야.”
“인질……이요?”
“응. 이름은 엘리사 제르나야.”
이름을 들은 장의 눈이 커졌다.
“황태자가 데리고 있는 인질의 이름이 정말 엘리사 제르나입니까?”
“맞아. 그 애가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그렇단 말이지. 장의 입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러니까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서 그 아이를 구해줘.”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황후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할게.”
시온을 두고 방을 나온 장이 만난 사람은 황후가 아닌 2황자, 데아른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장의 표정을 본 데아른이 나른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아이에게 올랜드 공작의 정보라도 얻은 건가?”
“올랜드 공작이 아닌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동시에 클라우드 소공작을 확실하게 죽일 방법도 알아냈죠.”
데아른이 팔짱을 끼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실패한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영 믿음이 가지 않는데.”
“이번에는 확실합니다.”
“일단 들어보지.”
“그 여자를 죽이면 됩니다.”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데아른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 여자라면 엘리사 클라우드를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그 여자를 죽이면 칼베른 클라우드도 죽을 겁니다.”
쨍그랑-! 데아른이 던진 유리잔이 장의 바로 뒤에 있는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그 파편에 스친 뺨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래도 네놈이 날 병신으로 아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그딴 개소리를 할 리가 없지.”
장은 피를 닦으며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데아른을 쳐다봤다.
“내가 원하는 건 칼베른 클라우드가 지금 당장 죽는 거다. 그 여자가 죽어서 수명을 먹지 못해 말라 죽는 게 아니라!”
“바로 죽을 겁니다.”
“뭐?”
“칼베른 클라우드가 제가 만든 독을 먹고 여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 여자 덕분입니다. 그러니 그 여자가 죽으면 죽을 겁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다.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라고 생각하기엔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
“마법 약 등 어떤 이유에서 엘리사 클라우드의 마나가 칼베른 클라우드의 체내에 계속 머물렀고, 그 마나가 제가 만든 독약이 칼베른을 죽이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었던 겁니다.”
“…….”
“물론 완전히 막아내진 못하고, 일부만 막아내서 그 반작용으로 칼베른 클라우드가 어려졌던 거죠.”
그 말에 데아른은 어려진 칼베른을 떠올렸다. 그가 어려진 건 역시 독약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여자를 죽이면 칼베른 클라우드를 보호해주고 있던 방어막이 사라져 그도 죽을 겁니다.”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흐음.”
데아른은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말했다시피 장은 이미 한 번 칼베른을 죽이는데 실패해서 그의 말을 완벽하게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서 나쁠 건 없는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칼베른은 엘리사에게 푹 빠져 있으니, 그녀가 죽으면 칼베른은 시름시름 앓다가 말라죽을 것이다. 그의 부친을 비롯한 클라우드 공작가 혈족이 그랬던 것처럼. 이리저리 계산해 본 결과 제게 손해가 될 게 없다고 판단한 데아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 해보지. 그래서 지금 그 여자는 어디 있지?”
**** 칼베른과 방으로 돌아온 엘리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잠들었다. 그동안 오스카는 시온을 황후의 궁으로 보냈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칼베른과 의논했다. 그렇게 약 두 시간쯤 지났을 무렵, 크라임 대주교가 찾아왔다. 세레나와 엘리사처럼 비밀 통로를 이용해서 온 게 아닌 공식적인 방문이었다.
“번거롭게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분에게 듣자 하니 부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크라임이 말하는 그분은 세레나였다.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부인이 칼베른처럼 됐습니다.”
“무슨…… 아!”
뒤늦게 칼베른처럼 어려졌다는 의미라는 걸 알아들은 대주교가 짧게 탄성을 뱉었다. 놀란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뭘 안도하는 거지?’
오스카는 의아했지만, 일단 대주교를 엘리사와 칼베른이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크라임 대주교가 온 건 어려진 엘리사를 진찰하고, 어디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라.”
그랬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사이 엘리사는 다시 어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칼베른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언제 돌아온 거야?”
칼베른이 엘리사의 몸을 덮은 담요를 좀 더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그것보다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좀 가져다주시죠.”
“갈아입을 옷은 왜…… 아.”
담요 아래로 쭉 뻗은 종아리를 본 오스카는 뒤늦게 이유를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가 옷을 가지러 간 사이, 칼베른이 크라임에게 말했다.
“괜한 발걸음을 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크라임이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것보다…….”
인자했던 웃음이 사그라지면서 한순간 진지해졌다. 크라임이 묘한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자 칼베른이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겁니까?”
“아니요. 문제가 있다기보다 부인께서 제가 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요.”
“목걸이요?”
칼베른은 엘리사의 목을 확인했다. 목걸이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어려졌을 때 빠진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어려진다고 빠질 목걸이가 아니었지만, 크라임은 그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목걸이였습니까?”
“평범한 축복의 목걸이였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면 크라임이 굳이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으음.”
좀 더 자세하게 물어보려는데 엘리사가 눈을 떴다.
“……칼?”
어린 목소리는 귀여웠지만, 역시 이쪽이 더 좋았다. 칼베른의 눈매가 사르르 풀렸다.
“일어났나?”
“네. 근데 조금 춥…… 꺅!”
뒤늦게 자신이 옷을 반쯤 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엘리사가 담요를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내, 내가 왜 옷을…….”
“기억이 안 나는 건가?”
“무슨 기억이요?”
전혀 안 나는 모양이군.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어려졌을 때 했던 행동들을 기억하면 몹시 부끄럽고 창피했을 테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옷은 황태자 전하께서 곧 가져다주실 거다.”
“네.”
쾅-!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오스카가 등장했다.
“큰일 났어!”
그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황궁에 식귀가 나타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