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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Can’t stop. (2) (140/156)

140화. Can’t stop. (2)2021.11.03.

  지금쯤 황궁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여기에? 엘리사가 놀라며 쳐다보자 칼베른이 옅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군.”

“여기서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응.”

“세상에. 말하지 그랬어요. 그럼 바로 나왔을 텐데.”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배려심이 듬뿍 담긴 말에 엘리사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그려졌다. 공교롭게도 처음 칼베른을 만난 장소가 바로 이 근처였다. 그땐 참 재수 없고 짜증 나는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그와 결혼하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고. 어쩔 수 없이 그와 결혼하게 됐을 때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래서 다들 사람 앞날은 모른다고 말하는 건가. 엘리사는 웃으며 칼베른의 팔짱을 꼈다.

“바쁜 거 아니었어요?”

“조금 바쁘긴 한데 괜찮아. 급한 건 다 끝냈거든.”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요? 듣기로 마리아 황녀를 죽인 범인을 아직 못 잡았다고 하던데요.”

“그건 내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께서 하실 일이지. 지금 당장 내가 할 일은 끝났어. 그러니 오랜만에 그대랑 같이 저녁을 먹으려고.”

그와 같이 저녁을 먹는다니. 생각만 해도 좋아서 엘리사는 볼을 발그레 붉히며 그의 어깨에 기댔다. 칼베른이 엘리사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가 봐도 사이 좋아 보이는 부부의 모습에 뒤를 따르던 하녀와 호위 기사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 저녁 식사는 물론이고 후식, 그리고 침실까지 모든 게 완벽하고 황홀했다. 그동안 떨어져 있었던 걸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두 사람은 꼭 필요할 때를 빼고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장정 서너 명이 굴러도 될 만큼 큰 침대는 중앙만 움푹 파여 있었다. 흐릿한 촛불 아래 한 개였던 그림자가 두 개로 분리되는 경우는 새벽의 여명이 침실을 가득 채울 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우음.”

깊은 잠에서 빠져 있다가, 문득 깨어난 엘리사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칼베른의 잘난 얼굴이었다. 그동안 많이 피곤했는지 그는 미동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했으니 당연하겠지.’

잠든 칼베른의 얼굴을 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 엘리사는 뚫어지도록 잘난 얼굴을 감상했다.

“…….”

그러려고 했는데, 여전히 칼베른의 주변에 부유하는 보라색 마나 때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전과 비교했을 때, 그 수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저게 다 줄어들면 그는 다시 어려질 터. 일하는 중에 그런 사달이 벌어지면 큰일이니 엘리사는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마나를 주입했다. 그때처럼 무리해서 피를 토하는 일이 없도록 조금씩 흘려보냈다.

“후우.”

그래도 남한테 마나를 주는 건 조금 힘드네.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이마에 식은땀을 닦아냈다. 숨이 거칠어진 만큼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마나를 주입했더니 칼베른 주변에 부유하는 마나가 많아졌다. 그걸 보고 있으니 뭔가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 같아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엘리사는 잠시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킨 뒤, 칼베른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의 품을 나왔다. 바스락,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미묘한 부위에 닿아 얼굴을 붉히길 몇 번. 겨우 침대를 나온 엘리사는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그걸 보니 어젯밤에 침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엘리사는 귓불까지 붉히며 후다닥 옷을 입었다. 그리고 탁자로 다가갔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실 생각이었는데, 주전자보다 탁자 위에 있는 서류에 눈이 먼저 갔다.

‘어젯밤엔 없었는데, 언제 가져온 거지?’

혹시 나 자는 사이에 서류를 봤던 걸까. 엘리사는 그 자리에 서서 눈으로만 서류를 읽었다. 앙고라 영지의 몬스터 토벌과 흑마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만큼 대부분 아는 내용이었다. 서류의 내용을 가볍게 훑던 엘리사의 시선이 멈춘 건 마지막 문단이었다. [신원불명의 은발 남자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은발 남자. 아는 사람 중에 은발이 에이지 밖에 없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그가 떠올랐다.

‘설마 에이지가 범인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단정 짓기엔 에이지가 마법사인 게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사라진 것과 마리아 결혼 축하 파티 때 불쑥 등장해서 했던 말도 신경 쓰였고. 엘리사는 은발의 남자에 대해 좀 더 확실히 알아보고자 다음 서류도 읽어봤다. 그러나 사악한 흑마법사라는 것뿐, 은발 남자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다.

“뭘 하는 거지?”

“아.”

혹시 다른 곳에는 있나 싶어 아예 자리를 잡고 서류를 읽던 엘리사는 뒤에서 칼베른 목소리가 들리자 돌아봤다.

“언제 깼어요?”

“방금.”

칼베른이 비스듬하게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엘리사를 내려다봤다.

“품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놀라서 깼지.”

“아, 미안해요.”

엘리사가 서둘러 사과하자 칼베른이 웃으며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농담이다. 이제 나가봐야 할 시간이라 일어난 거야.”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벌써 나가요?”

“조금 바빠서.”

엘리사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시간에 나가는 걸 보면 조금 바쁜 게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조금 바쁜 거야.”

걱정하지 말라는 듯 좁아진 미간에 쪽,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모레 오전에 황태자 비전하가 수도에 도착하거든. 그것 때문에 할 일이 조금 있어.”

“당신을 도와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슬프네요.”

“그대는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 돼.”

이번엔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조금 긴 시간, 엘리사의 입술을 탐했다가 떨어진 칼베른이 그녀가 보고 있던 서류를 챙겼다. 엘리사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그가 서류를 다 챙길 때쯤 입을 열었다.

“저기, 할 말이 있는데요.”

“말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지금은 말하기 힘들고, 저녁때 일찍 돌아올 수 있어요?”

칼베른이 챙긴 서류들을 품에 안으며 엘리사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심각한 일인가?”

“심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만약 에이지가 범인이라면 심각한 일이 될 테고, 아니라 괜한 걱정을 한 가벼운 헤프닝이 될 것이다.

“알았다. 늦어도 9시까지 돌아오지.”

“좀 더 늦게 와도 돼요. 안 자고 기다릴 테니까요.”

“안 돼.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했으니, 일찍 자야지.”

“그 말은 제가 미인이라는 건가요?”

“그럼?”

칼베른이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답하자 엘리사가 작게 실소했다.

“저보고 미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내 눈에 예뻐 보이면 된 거지.”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럼 다녀오지.”

“아침은요?”

“헤리엇이 샌드위치를 준비해둔다길래 가는 길에 간단히 먹으려고.”

칼베른이 나가자 엘리사는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갔다.

“얼마 못 잤는데 들어가서 좀 더 자.”

“당신보다는 많이 잤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것 가지고 괜찮겠어? 그대는 잠이 많은 편이잖아”

그건 그렇지.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계속 따라가는 데 문득 쌀쌀한 느낌이 들어 엘리사는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옷도 얇게 입었는데 들어가 있어.”

“배웅만 하고 들어갈게요.”

“말을 안 듣는군.”

“당신도 제 말 안 듣잖아요.”

엘리사는 기어코 칼베른을 배웅한 뒤,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한쪽 책장에 그녀가 어제 빌려온 책들이 가지런하게 꽂혀 있었다. 엘리사는 그중 눈에 띄는 걸 집어 들고 소파에 앉았다. 칼베른이 열심히 일하는데, 자신만 나태하게 잘 수는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칼베른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싶어 엘리사는 책을 정독했다. **** 읽어야 하는 책이 많은 만큼 쓱쓱, 빠르게 훑어보면 좋겠지만, 어디에 원하는 자료가 있을지 모르니 꼼꼼하게 살펴봐야 했다. 게다가 적혀 있는 말이 하나같이 어려워 읽는 것도 고역이었다. 찾는 내용이 있으면 신이 나서 읽을 텐데 그것도 아니니 몹시 지루했다.

“죽겠다.”

겨우 책 한 권을 끝낸 엘리사는 쓰러지듯 소파에 누웠다. 못해도 오늘 두 권은 읽어야 하는데, 한 권을 다 읽고 나니 기진맥진해서 다음 걸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겠지. 반드시 해야만 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을 보려는데 반가운 사람이 찾아왔다.

“부인!”

“솔레이 양!”

바로 솔레이였다. 엘리사는 솔레이를 꼭 안아주었다.

“나 때문에 괜한 고생을 시켜서 정말 미안해요, 솔레이 양.”

“아니에요! 오히려 마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쁜걸요! 다음에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고생시킨 걸 조금이라도 원망할 법도 한데 솔레이는 그런 기색 없이 환하게 웃었다. 게다가 저런 말까지 하니 고맙고, 미안하고, 기뻤다. 엘리사는 복합된 감정과 함께 솔레이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한때 솔레이를 칼베른의 새로운 여자라고 오해하기도 했고, 알고 지낸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 서먹서먹한 부분이 있었는데, 전부 날아갔다.

“큼, 큼.”

엘리사는 솔레이의 뒤로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낯선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예요?”

솔레이가 데리고 온 하녀인가? 그런 것치고 의상이 고급스러운데. 엘리사가 의아해하며 묻자 솔레이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그러고 보니 부인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셔서 모시고 왔어요!”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요?”

솔레이가 ‘분’이라고 지칭하는 걸 보면 귀족 영애인 것 같은데. 엘리사는 다시 여자를 쳐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사교 모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만나고 싶어서 솔레이에게 부탁까지 하며 왔다고 하니 의아하고 수상쩍었다. 최근 흑마법에 조종당하는 등 이상한 일을 겪어서 의심이 더욱 증폭됐다.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여자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에 내가 말한 제안, 생각해봤어?”

“제안?”

무슨 제안을 말하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처음 봤는데 왜 반말하는 거야? 한마디 쏘아붙이려는데 여자가 말을 덧붙였다.

“클라우드 소공작을 진짜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이혼하라고 했잖아.”

잠깐. 저 이야기를 안다는 건 설마…….

“황태자비…… 전하?”

  **** 칼베른은 입궁하자마자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고, 회의하고, 서류를 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점심도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해결하며 서류를 보고 있는데 오스카가 찾아왔다.

“전에 네가 말한 쪽지,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라.”

“그걸 아직 찾아보신 겁니까?”

일주일이 넘었는데? 칼베른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묻자 오스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중요한 쪽지인 것 같길래 계속 찾아본 건데, 아니야?”

“딱히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올랜드 공작에게 연락을 넣어볼까. 지난 일주일은 정말 숨 돌릴 틈 없이 바빠서 연락을 넣지 못했지만, 이젠 조금 여유가 생겼다. 칼베른이 올랜드 공작에게 편지를 쓰는 걸 본 오스카가 말했다.

“올랜드 공작에게 할 말이 있는 거면 굳이 편지를 쓸 필요가 없을 텐데?”

“무슨 의미입니까?”

“지금 올랜드 공작, 부황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든. 자네의 공작위 수여 문제로 말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칼베른이 놀라며 쳐다보자 오스카가 씩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설마 공작이 되기 싫었던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황녀 전하를 죽인 범인을 찾을 때까진 미뤄지는 줄 알았습니다.”

“축하 연회는 그때까지 미뤄지고 일단 작위부터 수여해달라고 내가 부황 폐하에게 부탁했어.”

오스카가 뒷짐을 지고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랑 같이 부황 폐하를 뵈러 가자.”

요컨대 그가 찾아온 이유가 황제 폐하를 같이 뵈러 가기 위해서라는 의미. 그럼 그것부터 먼저 말해야지, 왜 이제야 말하는 건지. 칼베른은 속으로 혀를 차며 일어섰다.

“가시죠.”

두 사람은 함께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주변에 사람이 북적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황제의 궁은 비교적 사람이 적었다. 그만큼 주변이 고요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오늘따라 더 으스스한 것 같네.”

오스카가 소름이 돋은 팔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칼베른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응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와 궁정인들이 두 사람을 보고 공손히 인사했다.

“폐하께선 안에 계시는 건가?”

“네. 올랜드 공작 각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아직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오스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시종에게 보고해달라고 말했다.

“폐하. 황태자 전하와 클라우드 소공작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큰소리로 보고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재차 보고해도 마찬가지였다.

“…….”

이에 불안함을 느낀 궁정인들이 웅성거렸다. 호위 기사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안에서 잠긴 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쾅, 쾅!

“폐하.”

쾅, 쾅, 쾅!

“대답해주십시오, 폐하!”

“올랜드 공작 각하!”

“비켜.”

호위 기사에게서 검을 빼앗듯이 가져온 칼베른은 사람들을 물린 뒤, 검을 세게 휘둘렀다. 몇 번 휘두르자 거대한 문이 나무토막처럼 잘렸다. 그리고.

“폐하!”

황제가 피투성이가 된 채 소파 밑에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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