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Can’t stop. (1)2021.10.30.
엘리사와 칼베른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클라우드 공작저에 도착했다.
“마님!”
“주인님!”
두 사람이 같이 돌아오자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특히 헤리엇은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두 분,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다행입니다.”
크라임 대주교도 비로소 안심된다는 듯 웃으며 엘리사와 칼베른을 맞이했다.
“……다행입니다.”
닉은 짤막하게 한마디를 툭 던지곤, 다시 공작저로 들어갔다. 엘리사는 그런 닉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그녀를 환영하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평소 조용했던 공작저가 오랜만에 들썩거렸다. 헤리엇과 사용인들은 두 사람이 무사히 돌아온 걸 축하하는 작은 파티를 열고 싶었지만, 마리아 황녀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파티를 여는 게 금지됐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사용인들의 무수한 축하 인사를 받으며 칼베른은 집무실로 향했다. 헤리엇이 그 뒤를 따르며 그동안 공작저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보고 했다.
“……가 일으켰는데 어떻게 할까요?”
“큰 문제를 일으킨 게 아니라면 내버려 둬.”
“알겠습니다.”
집무실로 들어온 칼베른은 외투를 벗으려다 잊고 있었던 올랜드 공작의 쪽지를 떠올리고 주머니를 확인했다.
‘없어?’
분명 여기 넣어뒀는데, 어디 간 거지. 다른 주머니에 있나 싶어 옷에 달린 주머니는 전부 확인해봤지만, 그 어디에도 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린 건가. 칼베른은 기억을 되짚었다. 황태자의 궁에 갈 때까지만 해도 있었으니, 그곳에서 잃어버린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황태자의 궁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쪽지의 내용을 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쉬울 뿐, 올랜드 공작에게 가서 무슨 내용이었냐고 물어보면 되니 잃어버려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황태자의 궁에 가서 찾아봐야지. 어차피 마리아의 살인 사건, 기사단 등 이런저런 일로 입궁해야 했다. 만약 황태자의 궁에 없으면, 그때 올랜드 공작에게 연락을 넣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칼베른은 책상에 앉았다. **** 로맨스 소설이나 연극 같은 걸 보면 주인공들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꿀처럼 달콤한 시간을 보냈다. 엘리사는 자신과 칼베른도 그럴 거라고, 릴리아의 저주 때문에 완벽하게 달콤한 시간은 보내지 못해도, 으레 사랑하는 연인처럼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부 착각이었다.
“하아.”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흔들리는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몬스터 토벌 때문에 2주 넘게 자리를 비우고 공작저로 돌아왔더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엘리사의 일은 총괄 집사인 헤리엇의 재량으로 어느 정도 처리할 수 있었지만, 칼베른의 일은 아니었다. 보좌관인 에드윈까지 자리를 비우고 있었던 탓에 완전히 마비됐었다. 그 외에도 마리아 황녀의 시해 사건, 흑마법, 기사단에 관한 일 등 칼베른이 해야 할 일은 무척 많은 터라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같이 밥을 먹는 건 고사하고, 기껏 합친 침실에서 같이 잠을 자지도 못했다. 매일 아침 일찍 나갔다가 새벽 늦게 돌아오니, 곤히 잠든 엘리사를 깨우지 않으려고 칼베른은 기존의 침실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엘리사는 칼베른의 얼굴을 하루에 10분도 채 보지 못했다. 그것도 섭섭했지만, 그보다 칼베른의 몸 상태가 걱정됐다. 헤리엇의 말에 따르면 지난 일주일간 칼베른의 수면 시간은 다 합해서 8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성격상 일하다가 잘 리는 없으니, 그게 칼베른의 수면 시간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축복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체력이 몇 배는 좋은 걸 알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려고. 엘리사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오늘은 안 자고 그를 기다렸다가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연금술사 협회에 도착했다.
“사라.”
엘리사는 협회에 들어가자마자 사라를 찾았다. 여느 때처럼 카운터를 보고 있던 사라가 그녀를 맞이했다.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무사히, 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했다. 게다가 평소와 달리 사라의 반응이 어쩐지 좀 시큰둥했다. 그러고 보니 죽은 마리아가 쥐고 있던 신분패는 사라가 준 것이었다. 그것도 법을 어기고 준 거였으니, 필시 사라에게도 문제가 생겼을 터.
“혹시 경비들이 널 찾아왔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리사는 작은 목소리로 사라에게 물었다.
“아니요.”
아, 다행히 그건 아닌가.
“경비가 아니라 황궁 기사들이 찾아왔었죠.”
“…….”
그게 더 큰 문제잖아! 엘리사는 속으로 기함하며 사라에게 사과했다.
“미안. 나 때문에 힘들었겠네.”
“전 딱히 힘들진 않았지만, 제 주머니 사정이 조금 힘들어졌네요.”
벌금을 냈다는 의미였다. 엘리사는 냉큼 사라의 손에 백금화를 쥐여주었다.
“어머, 이렇게 많이 안 주셔도 되는데.”
말과 달리 사라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냉큼 백금화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백금화 하나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사라가 유난히 돈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엘리사는 약간 신기해하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연금술사 협회의 서고에 들어가고 싶은데 가능할까?”
“그건 부인이라도 힘들 것 같아요. 서고는 최소 실버 등급 이상의 연금술사만…… 아.”
엘리사가 실버 등급 패를 보여주자 사라가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부인도 실버 등급이 되셨죠. 이것 참…….”
사라는 엘리사를 흘끗 보며 미묘하게 웃었다. 엘리사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뭐야, 그 웃음은. 기분 나쁘게. 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아니에요. 서고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죠? 이쪽으로 오세요.”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엘리사는 찝찝함을 삼키며 사라를 따라갔다. 서고는 협회의 지하 2층에 있었다. 입구부터 분별 마법이 걸려 있어, 연금술사 패를 가진 사람만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
제아무리 호위 기사나 하녀라고 해도 같이 들어갈 수 없기에, 엘리사는 그들을 두고 사라와 단둘이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라가 엘리사를 안내해주며 설명했다.
“서고는 크게 4개로 분류되는데 실버 등급은 제 1서고만 이용할 수 있어요. 제 2서고에 가려면 골드 등급이 되셔야 해요.”
“그럼 2서고에 있는 책은 못 읽겠네?”
“네.”
“내가 들어가지 않고, 사서한테 부탁해서 가져다 달라는 것도 안 돼?”
“안 됩니다.”
거참, 엄청 깐깐하네. 엘리사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협회의 규칙이 그렇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찾고 싶은 책이 있으시다면 사서한테 바로 물어보시는 게 힘들지도 않고, 시간 절약이 될 겁니다. 그리고 1서고에 있는 책은 자유롭게 빌릴 수 있으니, 이 역시 사서한테 물어보세요.”
“고마워.”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
사라까지 떠나고 엘리사는 서고를 크게 훑어봤다. 중앙 도서관보단 작았지만, 연금술에 관한 책은 단연코 이곳이 가장 많았다. 연금술뿐만 아니라 마법이나 마나 같은 자료들도 잔뜩 있었다. 엘리사가 서고에 온 건 칼베른의 몸 주변에 반딧불처럼 부유하는 보라색 마나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마나는 평상시엔 공기처럼 느낄 순 있어도, 눈에 보이진 않았다. 그러다 마법 시전을 하는 등 마나를 응축해서 무언가를 하면 눈에 보이는 색을 가지게 되는데, 이 역시 잠깐이었다. 칼베른처럼 그 현상이 계속 남아 있는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마나가 칼베른을 어리게 만드는 저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으니, 한시라도 빨리 마나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정체는 이미 알고 있어.’
그 마나는 자신의 마나였다. 그 증거로 마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뿐더러, 어려진 칼베른에게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칼베른은 생명력이라고 표현했는데, 어찌 보면 그 말도 맞았다. 마법을 과도하게 써서 마나를 전부 소모하면 생명력을 태운다는 말이 있을 만큼, 마나와 생명력은 쓰임새가 다를 뿐,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칼베른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이유로 엘리사가 만든 마법 약을 먹었었다. 그 바람에 그의 몸에 쌓인 마나가 보호막처럼 칼베른을 보호하며, 그가 어려지는 걸 막아주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고, 예상외로 큰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인지 조사해보면 알겠지.’
진작 알아보고 싶었는데, 쌓여 있는 일을 처리하느라 이제야 알아보게 됐다. 엘리사는 사서에게 마나와 관련된 책들을 전부 다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전부 다요?”
그러자 사서가 놀라며 되물었다.
“마나에 관련된 책만 해도 수백 권이 넘는데 그걸 전부 다 가져다 달라는 말입니까?”
아, 수백 권은 좀 많은데. 엘리사는 잠시 고민했다가 말을 정정했다.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책이나 마나의 성질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으로만 가져다주세요.”
범위를 줄였는데도, 사서가 가져다준 책의 수가 백 권에 가까웠다. 이걸 다 보는 것도 무리지만, 책은 한 번에 스무 권밖에 빌리지 못하기 때문에 엘리사는 그중에서 스무 권을 엄선해 빌렸다. 그리고 호위 기사들이 빌린 책을 마차에 싣는 동안 사라에게 필요한 재료들을 샀다. 책을 반납할 때까진 오지 않을 테니 넉넉하게 구입하고 있는데, 문득 입구 쪽이 시끄러워졌다.
“조심해서 옮겨! 물건 상하면 네놈들이 책임질 거야?!”
돌아보자 카랑카랑하게 소리를 지르며 직원들을 닦달하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저 사람은 카딘이잖아.’
카딘은 특이하게도 암시장에서만 연금술 재료를 파는 상인이었다. 엘리사도 예전에 그에게 인어의 눈물을 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저 노인이 왜 여기 온 거야?”
의아해서 묻자 사라가 대답해주었다.
“연금술 재료를 납품하러 온 거예요.”
“응? 저 사람은 암시장에만 물건을 팔잖아.”
“그렇죠. 그게 정가보다 2배는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협회도 그 가격으로 구입하고 있고요.”
협회가 저 노인한테 정가보다 2배나 비싸게 산다고?
“왜? 몬스터 때문에 그런 거야?”
“그게 아니라 웬 이상한 놈이 재료상한테 원재료를 몇 배는 비싸게 사서 그런 거예요. 소량은 항상 구비해둬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저 노인에게 2배 비싸게 재료를 사는 거죠.”
“허어, 도대체 누가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는 거야?”
“몰라요. 어느 돈 많은 미친 연금술사인가 보죠.”
안 그래도 짜증 난다며 사라가 투덜거렸다. 엘리사는 사라를 위로해주면서 다시 주문 장부에 필요한 것들을 기입했다. 엘리사가 기입하는 걸 물끄러미 보던 사라는 그녀가 ‘인어의 눈물’을 적자 고개를 저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인어의 눈물이 없어요.”
“또 없다고? 설마 이번에도 다이아 등급의 연금술사가 싹 쓸어갔어?”
“아니요. 이번에는 어느 돈 많은 미친 연금술사가 쓸어갔어요.”
엘리사는 그 미친 연금술사의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인상을 팍 썼다.
“저 노인에게 조금씩 납품받고 있긴 한데, 대기줄이 길어요. 재료상이 납품해주지 않는 이상 못해도 한 달은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해드릴까요?”
“그래.”
인어의 눈물이라면 한 달 정도의 여유분은 있으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게 지금 없는 재고 리스트니까, 참고하면서 주문 장부를 쓰세요.”
엘리사는 사라가 준 리스트를 쭉 훑어봤다. 없는 건 상당히 많았지만, 다행히도 그중 엘리사가 필요로 하는 건 인어의 눈물 딱 하나뿐이었다. 그나저나 이 리스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엘리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혹시 여기 적혀 있는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마법 약이 뭐가 있어?”
“글쎄요. 저는 연금술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요.”
그건 그렇지. 엘리사는 다시 리스트를 쭉 훑어봤다. 다시 봐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단순히 대부분 아는 재료라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리스트, 내가 옮겨 적어가도 될까?”
“상관없긴 한데, 그걸 옮겨 적어가서 어디 쓰시려고요?”
“확인해 볼 게 있어서.”
가지고 있는 마법약 제조법 중에서 이 재료를 쓰는 게 있는지 확인해 보려는 거였다. 엘리사는 꼼꼼하게 옮겨 적은 뒤, 주문 장부 기입도 끝냈다. 호위 기사들은 진작에 책을 마차에 싣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주문한 재료들도 호위 기사들에게 들어달라고 부탁한 뒤, 협회를 나왔다. 투툭, 그사이 새카매진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옆으로 긴 그림자가 뻗어오더니 우산이 드리웠다.
“고마워……!”
당연히 하녀나 호위 기사라고 생각한 엘리사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돌아봤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칼?”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바로 칼베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