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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돌아가다. (9) (138/156)

138화. 돌아가다. (9)2021.10.27.

“클라우드 소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나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기다리겠다고?”

오스카는 테라스 밖에서 조용히 숨어 기다리고 있는 칼베른과 엘리사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일부러 크게 말했다.

“…….”

덕분에 상황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난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칼베른이 미간을 찡그렸다. 오스카가 황태자의 권한을 쓰면 데아른을 강제로 내쫓을 수 있지만, 그러면 쓸데없이 데아른의 의심을 증폭시킬 것이다. 데아른이 ‘카일 브리슈’가 사실 ‘칼베른 클라우드’가 아닐까, 라고 의혹을 품고 있는 터라 더욱 그의 의심을 증폭시켜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러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데아른의 앞에 당당히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이니 속에서 한숨이 들끓었다.

‘해결 방법을 생각해야 해.’

칼베른은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찬가지로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엘리사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칼베른이 눈을 크게 깜빡이며 엘리사를 올려다봤다.

“엘리사?”

작게 그녀를 불렀지만, 엘리사는 대답이 없었다. 입을 앙다물고 꼭 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칼베른에게 물었다.

“아파요?”

“뭐가?”

“말 그대로 아프냐고 물어본 거예요. 정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찌릿한 느낌이 있어요?”

칼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엘리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살면서 마법을 써본 적이 있어요?”

“아니.”

“마나를 느껴본 적은요?”

“신력이라면 느껴봤지만, 마나는 느껴본 적 없다.”

칼베른은 엘리사가 갑자기 왜 이런 걸 묻는 건지 의아했지만, 충실하게 대답했다. 모든 대답을 들은 엘리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게 굳었다. 그녀는 칼베른의 손을 좀 더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칼베른의 눈이 약간 커졌다.

“정말인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칼베른이 그녀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 방법이 뭐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건가?”

“아마도요. 말했지만 확실하게 방법을 찾은 건 아니라서요. 실패할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마요.”

칼베른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묻어났다.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엘리사는 기대에 부응할 수 있길 바라며 칼베른의 몸에 마나를 주입했다. 엘리사의 몸 주변으로 보라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더니 칼베른에게 흡수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칼베른은 그걸 보지 못했다. 그가 이런 분류의 기운들을 볼 수 있는 건 주기가 와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을 때뿐이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효과가 있으려면 마나를 얼마나 주입하면 되는 건지 아는 게 전혀 없으니 엘리사는 되는대로 마나를 주입했다. 그만큼 몸에 무리가 와서 시간이 지날수록 엘리사의 이마엔 굵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엘리사는 본능적으로 여기서 더 하는 건 위험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성공할 것 같아 멈출 수가 없었다. 종국엔 숨까지 벅차올라 엘리사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 울컥 치밀어올랐다.

“쿨럭-.”

엘리사는 그걸 미처 삼키지 못하고 그대로 토해냈다. 검붉은 핏덩이를 본 칼베른의 얼굴이 굳었다.

“그대……!”

그제야 이 방법이 엘리사의 몸에 무리가 간다는 걸 깨달은 칼베른은 엘리사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에서 영혼이 분리됐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몸을 휘감았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정신이 흐려졌다. 귀까지 먹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차단됐지만, 쿵쿵 심장이 뛰는 소리만큼은 확실하게 들렸다. 심장 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아득했던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

칼베른이 완전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다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는 그 사실에 기뻐할 새도 없이 테라스 난간에 쓰러지듯 기대앉아 있는 엘리사의 상태를 살폈다. 피를 토한 것 치고 안색은 괜찮았다. 호흡도 안정적이었고. 그제야 안심한 칼베른이 엘리사의 양어깨를 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왜 그대의 몸에 무리가 가는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았지?”

엘리사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대답을 회피한다고 생각한 칼베른이 억지로 엘리사와 눈을 마주쳤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지?”

엘리사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며 칼베른의 시선을 피했다.

“엘리사.”

그 시선을 또 한 번 억지로 맞추며 이름을 부르자 엘리사가 얼굴을 확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오, 옷…….”

“뭐?”

“옷 좀 입어요!”

그제야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다는 걸 자각한 칼베른은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언뜻 보이는 그의 귓불은 불이 붙은 것처럼 붉었다. 칼베른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는 동안, 엘리사는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시선 처리를 잘해서 엄한 걸 보지 않았지만, 이미 이전에 본 적이 있어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됐다. 그, 크고, 거대한, 그러니까…….

“으아……!”

가지를 길게 뻗으며 커지는 망상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한 엘리사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여긴 내 궁이다! 네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마라, 데아른!”

그와 동시에 짜증이 섞인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데아른의 목소리도 들렸다.

“조금 더워서 테라스 문을 열려고 한 것뿐인데 너무 과민반응을 하시는 군요, 형님.”

오스카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전혀 안 더운데 뭐가 덥다는 거지?”

“안 더우십니까? 흐음, 제가 형님보다 몸에 열이 많은 모양이군요.”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려면 나가.”

“왜 그렇게 테라스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겁니까?”

데아른의 목소리도 좀 더 가까워졌다.

“마치 저 너머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처럼요.”

“!”

테라스에 칼베른과 엘리사가 숨어 있는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에 엘리사는 흠칫 놀라며 숨을 곳을 찾다가,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 발로 테라스를 나가려고 했다.

“잠깐.”

칼베른이 그런 엘리사의 손을 잡았다.

“아.”

무심코 그를 돌아본 엘리사는 칼베른의 주변에 반딧불처럼 부유하는 보라색 마나를 보고 짧게 탄성을 뱉었다. 역시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로써 모든 가정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칼베른이 엘리사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나가면 더 의심을 받을 거다.”

엘리사는 무척 신경 쓰이는 마나를 애써 외면하며 대답했다.

“여기 계속 있어도 의심을 받을 거예요.”

“방법이 있어.”

“뭔데요?”

칼베른은 대답 대신 테라스 난간에 발을 올리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칼……!”

칼베른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엘리사가 그가 서 있던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칼베른은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게 더 기가 막혀 엘리사는 멍하니 칼베른을 쳐다봤다. 2층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뛰어내릴 만한 높이는 아닌데 어떻게 저리 멀쩡한 거지? 이것도 젤리아의 축복 덕분인 걸까?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닫힌 테라스 문 너머로 오스카와 데아른이 실랑이하는 소리가 들리자 엘리사는 문을 쳐다봤다.

“엘리사.”

그러다 칼베른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다시 그를 내려다봤다. 마치 뛰어내리라는 듯 칼베른이 엘리사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그는 젤리아의 축복이 있으니 여기서 뛰어내려도 멀쩡했지만, 엘리사는 아니었다. 발목을 접질리거나, 운이 나쁘면 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무섭지 않은 건, 칼베른이 받아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치맛자락을 잡고 난간에 걸터앉았다. 발이 허공에 뜨니 잊었던 두려움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엘리사가 머뭇거리는 기색을 느낀 칼베른이 양팔을 더 넓게 벌리며 말했다.

“이리 와.”

믿음직스러운 자색 눈동자가 두려움을 전부 몰아냈다. 엘리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뛰어내렸다. 더위를 머금은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외마디의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엘리사는 칼베른의 품에 떨어졌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칼베른은 아주 손쉽게 그녀를 받았다.

“당신, 힘세네요.”

순수한 감탄에 칼베른이 웃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면요?”

“좀 더 힘을 쓰려고.”

“꺅!”

엘리사는 칼베른이 저를 높게 안아 들자 깜짝 놀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배 언저리에서 그가 웃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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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지 말고 내려줘요!”

“장난 아닌데.”

“칼!”

“나도 이게 편하니까 가만히 있어.”

그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건가. 엘리사는 칼베른이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자 헛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거기서 뭐 해?”

그때, 테라스 쪽에서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몹시 황당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오스카가 보였다. 그 옆에는 데아른도 있었다. 오스카만큼은 아니었지만, 데아른 역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칼베른의 품에서 내려온 엘리사는 그들에게 낯뜨거운 장면을 보여준 게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반면 칼베른은 당당하게 데아른에게 인사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잠시 외출했다고 들었는데, 정원에 있었군요, 소공작.”

“부인이 아까 일 때문인지 기분이 안 좋다고 하길래 황자 전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정원 산책을 하며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고 했습니다.”

칼베른이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자, 엘리사는 장단에 맞춰 병약한 연기를 했다.

“그러게, 황궁의를 불러준다니까.”

오스카도 칼베른의 장단에 맞췄다. 그런 세 사람을 차례로 훑어보던 데아른이 실소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오스카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제대로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형님.”

오스카가 웃으며 맞받아쳤다.

“원래 적에겐 아픈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법이거든.”

“저는 적이 아니라 피를 나눈 가족입니다.”

“나한테는 그렇지만 소공작한테는 아니잖아.”

할 말이 없는지 데아른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칼베른을 내려다봤다.

“소공작에게도 할 말이 있으니 산책은 그쯤하고 이만 돌아오는 게 어떻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너무 기다리게 해서 송구합니다, 황자 전하.”

“알면 됐습니다.”

데아른은 얼른 오라는 말을 덧붙이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오스카까지 들어가자 칼베른은 엘리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응접실에 오지 말고 다른 방에서 쉬고 있도록 해.”

“그래도 돼요?”

“그래. 어차피 같이 있어봤자 좋은 이야기는 못 들을 거니 방에서 쉬도록 해.”

칼베른은 엘리사의 입술에 남은 핏자국을 엄지로 훔쳐냈다.

“남은 이야기는 공작저에 가서 차근차근 듣도록 하지.”

  **** 칼베른이 오스카와 함께 데아른을 상대하는 동안 엘리사는 근처 방에서 쉬면서 칼베른을 원래대로 되돌릴 때 썼던 방법을 곰곰이 되짚으며 정리했다.

“이만 돌아가지.”

그렇게 얼추 정리가 끝났을 때, 칼베른이 돌아왔다. 여전히 그의 주변에는 보라색 마나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신경 쓰여서 엘리사는 칼베른이 아닌 그 주변을 계속 살펴봤다. 쉴 새 없이 굴러다니는 눈동자를 본 칼베른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아니요, 아무것도.”

칼베른은 마나가 보이지 않는 데다가, 지금 말해줘봤자 이해하지 못할 테니 엘리사는 일단 숨겼다. 오스카는 엘리사의 몸이 좋지 않은 걸 배려해서 그의 마차를 내주었다. 본디 황궁 안에선 황족 말고 마차를 탈 수 없는 터라 황궁 입구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덕분에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이제 설명해 봐.”

칼베른은 황궁을 벗어나자마자 엘리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날 원래대로 돌린 거지? 그 방법은 그대의 몸에 무리가 가는 방법인가? 다른 방법은 없나? 만약…….”

“그만.”

쏟아지는 질문에 엘리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처음부터 말해줄 테니 조금 기다려 봐요.”

그러려고 아까 생각을 정리한 거였고.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떠돌아다니는 보라색 마나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이 사라진 것, 그 직후 칼베른이 어려진 것 등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했다.

“……그러면 혹시 제 마나를 당신에게 주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예요. 실제로 돌아오기도 했고요.”

칼베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내 주변에 떠돌아다니는 마나의 색이 보라색이라고 했나?

“네. 맞아요.”

“지금도 보이는 건가?”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베른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왜 그래요?”

“아니.”

칼베른은 마른세수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가 아는 보라색 기운은 마나가 아닌 생명력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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