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돌아가다. (7)2021.10.20.
칼베른의 친절한 배려에도 황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칼베른은 귀족들에게도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면 말하라고 했지만, 귀족들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엘리사의 알리바이가 완벽하게 증명된 지금, 그녀가 범인이 아니라는 게 확실하게 밝혀졌는데. 그래도 굳이 남은 의문을 찾자면, 마리아가 엘리사의 신분 패를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엘리사가 범인이 아니라면 그건 역시…….
“누군가 소공작 부인을 마리아를 죽인 범인으로 몰아세워 소공작 부인뿐만 아니라 클라우드 공작가도 무너뜨리려고 함정을 판 게 분명하다.”
오스카가 귀족들이 공통으로 한 생각을 대변해서 말했다.
“그 누군가는 분명 마리아를 죽인 범인일 테니 나 오스카 드 시아페 세르비안느는 황족과 황태자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다.”
“……그건 저와 데아른이 해야 할 일입니다, 황태자.”
황후가 툭,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데아른이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 숙여 부탁했다.
“마리아는 제 친동생이니, 제 손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부황 폐하.”
“그 일은 오스카에게 맡겨라, 데아른.”
“폐하!”
황후가 당황하며 불렀지만, 황제는 뜻을 바꾸지 않았다.
“황후의 마음은 알겠지만, 이런 일일수록 신중하고, 공정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지.”
황제가 오스카를 올려다봤다.
“그러니 오스카, 네가 이 일을 맡아 마리아를 죽인 극악무도한 놈을 반드시 잡거라.”
오스카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겠습니다, 부황 폐하.”
데아른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황후는 입술에 피가 맺힐 정도로 세게 깨물며 의자 손잡이를 꽉 잡았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오스카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하여 폐하께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이 자리에서 클라우드 소공작에게 공작위를 계승해주십시오.”
어라,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느닷없는 말에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오스카를 쳐다봤다. 그건 칼베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엘리사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오스카에게 이것저것 부탁했지만, 이런 것까지 부탁하진 않았다.
“앞으로 소공작이 흑마법을 비롯한 다방면으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선 공작위가 꼭 필요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스카가 황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공작위 계승식처럼 중요한 행사는 제대로 치러야 한다는 걸 알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간소화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몬스터 토벌 때문에 공작위 계승식이 미뤄지기도 했고요.”
“흠, 그렇긴 하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하던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털썩-.
“어마마마!”
“황후 폐하!”
갑자기 황후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데아른은 깜짝 놀라며 황후를 부축했고, 캠벌 후작과 후작 부인은 올라오고 싶었으나 저 위는 황족의 영역이었기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정신 차려보십시오, 어마마마!”
“당장 황후 폐하를 궁으로 모셔라!”
오스카의 명령에 호위 기사가 달려와 황후를 업고 다급하게 알현실을 나갔다. 그 뒤를 데아른과 시녀들, 캠벌 후작 부부는 물론 평소 황후를 따르던 귀족들이 따랐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던 알현실은 황후가 쓰러지면서 더 혼란스러워졌다.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황제는 몹시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쓰며 미간을 짚었다. 오스카는 그런 황제의 눈치를 살폈고, 엘리사는 귀족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칼베른에게 슬쩍 물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 같죠?”
칼베른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며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는 한참 생각하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남은 건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 알현실에 들어올 땐 기사들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았지만, 나갈 땐 아니었다. 아무도 그를 감시하지 않았다.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소공작님이 절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요.”
“암요. 소공작님께서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신 귀족들이 그를 에워쌌다. 대부분 황태자파 귀족이었다.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칼베른은 그들을 상대하는 게 상당히 귀찮았지만, 쳐내자니 그럼 앞으로의 일이 더 귀찮아질 것 같아 적당히 받아주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건 엘리사도 마찬가지였다. 칼베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다들 믿었다는 말보다 걱정했다는 말을 더 많이 했다는 거였다.
‘슬슬 황태자 전하께서 부를 때가 됐는데, 왜 소식이 없는 거지?’
오스카를 핑계로 빠져나갈 생각을 하고 있던 칼베른은 갑자기 귀족들이 홍해처럼 양쪽으로 갈라지자 눈을 가늘게 떴다. 갈라진 귀족들의 사이를 유유히 걸어오는 남자는 바로 올랜드 공작이었다. 엘리사도 올랜드 공작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칼베른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엘리사의 등을 다독이며 올랜드 공작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 각하.”
올랜드 공작이 웃었다.
“무슨 일이긴. 자네가 무사히 누명을 벗은 걸 축하해주기 위해 왔지.”
“저희가 그런 말을 나눌 만큼 친분이 있었는지 조금 의문이 드는군요.”
“하하, 그렇게 가시 세우지 말게. 난 정말로 축하해주려고 온 것뿐이니까.”
칼베른은 낮게 조소했다. 데아른과 손을 잡고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고 했던 자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명을 벗은 걸 정말 축하하네. 큰 위기를 넘겼어.”
올랜드 공작은 칼베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갔다. 칼베른은 올랜드 공작이 만졌던 어깨의 위쪽, 셔츠 옷깃 아래를 쓱 훑었다. 옷깃 아래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올랜드 공작이 그의 어깨를 두드릴 때 교묘하게 붙인 거였다. 이렇게 은밀하게 쪽지를 전해줬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을 적어뒀다는 의미. 그게 뭘까. 칼베른은 지금 당장 확인하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그러지 못하고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소공작님,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가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때마침 찾아온 시종을 따라 황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 황후의 궁, 정원 깊은 곳. 기절한 황후가 황궁의에게 진찰을 받는 동안 데아른은 외사촌인 파시스 캠벌과 은밀하게 접선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전하.”
파시스 캠벌 역시 알현실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저들이 만약 우리가 한 짓이라는 걸 알게 되면…….”
“입을 조심해.”
데아른이 눈을 지그시 감고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도록.”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은 파시스 캠벌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데아른은 긴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섰다. 당연히 등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칼베른이 떡하니 앙고라 영지에 등장해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마침 엘리사가 저택을 비웠길래 이 계획을 실행한 건데 설마 칼베른과 같이 앙고라 영지로 갔을 줄이야. 거기까진 괜찮았다. 변신 마법 약을 썼든, 뭘 했든 간에 본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 여자가 엘리사일 리가 없다고 우기면 됐으니까. 물론 우기는 것만으론 엘리사를 처벌할 수 없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발목을 잡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최종 목적을 이루려고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그들이 누명을 벗은 것까진 좋았지만, 설마 황제가 마리아의 일을 오스카에게 맡길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괜찮아.’
들키지 않을 거야. 증거는 전부 없앴으니까. 애초에 증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리아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게 아닌 스스로 죽은 거였으니까. 흑마법에 조종당해 제 손으로 심장에 칼을 꽂은 거였다. 그러니 범인 따위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상대가 칼베른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 불안감이 증폭됐다.
‘역시 그때 칼베른 클라우드를 죽였어야 했어.’
그딴 엉터리의 말을 믿는 게 아니라 제 손으로 칼베른을 확실히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게 후회됐다. 비싼 값을 치르고 알아낸 흑마법이 칼베른의 발목조차 잡지 못한다는 사실이 몹시 짜증 나기도 했고.
‘과거는 생각하지 말자.’
한탄하고 후회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화만 더 날 뿐이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칼베른 클라우드의 발목을 붙잡아 오스카를 무력하게 만든 뒤, 황태자 자리를 빼앗아 올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가능하다면 황제 자리까지 아예 가져오고 싶은데. 무능한 부황은 누가 황제의 자리에 잘 어울리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칼베른보단 황제 쪽이 처리하기는 쉬웠지만. 만약 실패했을 시 리스크가 큰 쪽은 황제 쪽이었기에 어느 쪽도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황제를 처리할 완벽한 계획이 있다면 모를까……. 휘익-.
“……!”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와 파시스 캠벌이 서 있는 바로 옆 나무에 꽂혔다. 조금만 옆으로 틀었으면 화살을 맞을 뻔한 파시스 캠벌은 깜짝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데아른도 놀라며 화살을 바라봤다. 이곳은 황후의 궁. 그만큼 경비가 철저한데 화살을 쐈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화살을……!
“비켜!”
문득 오래전의 일이 떠오른 데아른은 황급히 파시스 캠벌을 밀치고 나무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화살 끝에는 작은 쪽지가 달려 있었다. 데아른이 그 쪽지를 풀지 화살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역시 그 남자가 맞았어. 곧바로 쪽지의 내용을 확인한 데아른의 입술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데아른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파시스 캠벌을 내버려 둔 채 성큼, 황후의 궁으로 들어갔다. ****
“마리아 황녀 전하를 죽인 사람은 2황자일 겁니다.”
칼베른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 말이었다. 오스카는 마시려던 찻잔을 내려놓고 칼베른을 쳐다봤다.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는?”
“없습니다.”
“단순한 심증이라는 건가?”
“네. 2황자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니까요.”
불과 오늘 아침만 해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알현실에서 데아른의 반응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마리아 황녀를 죽인 사람은 2황자가 확실합니다.”
“나도 데아른이 의심스럽긴 한데 증거가 없으니, 그가 범인이라는 걸 중점으로 두고 조사해보지.”
“어떻게 조사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일단 마리아를 호위했던 놈들을 족쳐야겠지.”
족친다니. 황족답지 않은 거친 언사에 엘리사가 약간 놀라며 쳐다보자 오스카가 웃었다.
“뭘 그리 놀라? 부인은 이런 말 안 써?”
“안 씁니다.”
“난 부인에게 물었는데, 왜 네가 대답하는 건데?”
“부부니까요.”
“흠?”
의미심장한 대답에 오스카가 팔짱을 끼고 칼베른과 엘리사를 쳐다봤다. 칼베른은 덤덤하게 앉아 있었지만, 엘리사는 양심에 찔린 사람처럼 오스카의 시선을 피했다.
“뭐야, 두 사람.”
오스카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앙고라 영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없었긴. 표정을 딱 보니 있었는데.”
오스카가 턱을 괴고 상체를 기울였다. 짓궂게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혹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라도 한 건가?”
“쓸데없는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시죠.”
“쓸데없긴. 평생 사랑 같은 건 모르던 놈이 드디어 사랑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이제 겨우 제대로 된 부부 생활을 하겠구먼.”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 그…….”
“황태자비 전하와 정말 이혼하실 겁니까.”
재잘재잘 말을 뱉어내던 입술이 풀을 붙여놓은 것처럼 딱 달라붙었다. 이번엔 엘리사가 오스카를 쳐다봤고, 오스카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칼베른 쪽도 쳐다보지 않았다.
“정말로 이혼하실 생각이시군요.”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
“혹시 그사이에 생각이 바뀌었는지 확인차 물어본 겁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 그녀한테 물어봐야지. 그녀의 결정이니까.”
문장의 끝이 씁쓸하게 맺어졌다.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설마 황태자 전하는 비 전하를 좋아하시는 건가?’
오스카의 말과 표정만 보면 그런 것 같은데, 대놓고 물어볼 수 없으니 답답했다. 칼베른은 뭔가 알고 있으려나. 만약 모른다면 그를 찔러서 물어보라고 해볼까. 이래저래 고민하며 칼베른을 돌아본 엘리사는 그의 몸 주변에 부유하던 보라색 기운이 알현실에 있었을 때보다 확연하게 줄어든 걸 발견했다. 3분의 2는 사라진 것 같았다.
‘뭐지?’
이런 게 몸 주변에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갑자기 줄어든 건 더 이상했다. 일단 이게 뭔지 알고 싶은데. 만져지기는 하는 걸까? 호기심에 보라색 기운을 건드리자 비눗방울처럼 톡, 터지면서 엘리사의 손끝에 흡수됐다.
그걸 본 엘리사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이건……마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