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돌아가다. (5)2021.10.13.
에드윈이 예상한 대로 칼베른은 감옥이 아닌 별궁의 방에 갇혀 있었다. 침대와 소파, 탁자 등 생활하는 데 불편하지 않게 기본적인 가구들이 갖춰져 있는 건 물론, 시간에 맞춰 제대로 된 식사도 나왔다. 칼베른이 원한다면 차와 간식을 먹을 수도 있었고, 책을 읽는 등 취미 생활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물론 방에서 하는 취미 생활만 가능했다. 그는 나갈 수 없었으니까. 혹시 칼베른이 탈출할 걸 대비해서 기사들이 철통같이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창문은 마법으로 굳게 걸어 잠가 열 수 없을뿐더러 혹시 연다고 해도 7층이라 뛰어내리는 건 불가능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지.’
칼베른은 창밖을 내려다봤다. 그는 여기서 뛰어내린다고 해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 아니, 잠깐 다치긴 하겠지.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나을 테지만. 칼베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돌아섰다. 방을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랬다간 없는 죄를 인정하게 될 테니 꾹 눌러 참았다. 어차피 곧 나가게 될 테고. 칼베른은 협탁 위에 있는 시계를 들었다. 오후 5시. 엘리사와 에드윈이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이제 곧……. 똑똑-.
“소공작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역시. 칼베른은 시계를 내려놓고 문을 쳐다봤다. 젊은 기사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와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면서 흘끗, 칼베른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의심과 혼란이 가득했다. 아침에 봤을 때만 해도 저러지 않았는데, 마리아 황녀의 일을 들은 모양이다.
“무슨 일이지?”
“황제 폐하께서 소공작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귀족들이 모인 알현실로 말인가?”
칼베른이 말하지도 않은 사실을 언급하자 젊은 기사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칼베른은 대답 대신 옷장에 넣어두었던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소공작님!”
그 뒤를 황급히 기사가 따라나섰다. 칼베른은 기사들의 철통같은 감시를 받으며 알현실로 향했다. 알현실의 커다란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칼베른이 도착하자 큰소리로 보고했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칼베른 클라우드 소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윽고 커다란 문이 열리자 칼베른은 기사들과 함께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수도 내에 있는 귀족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전부 오라고 황명을 내린 터라 커다란 알현실은 귀족들로 북적거렸다. 얼핏 봐도 수백 명은 넘어 보였다. 본디 알현실은 외국의 사신단 같은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였기에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굉장히 화려하고 밝게 꾸몄지만, 분위기는 밝지 않았다. 마치 이곳이 장례식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숙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
“…….”
눈짓으로만 조용히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은 칼베른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일제히 그를 쳐다봤다. 의심과 의혹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시선이 거머리처럼 칼베른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게 부담스럽거나 거북할 법도 한데 칼베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하다니…….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클라우드 소공작은 참 독한 것 같아요.”
“누가 아니래요. 저라면 심장이 떨려서 똑바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귀족들은 붉은 카펫을 똑바로 걸어가는 칼베른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나저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요. 정말로 그가 마리아 황녀를 죽이는 데 동참했을까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 마리아 황녀를 시해한 범인이라는 거죠.”
“확실한 증거가 나온 건가요?”
“어머, 모르셨어요? 마리아 황녀가 소공작 부인의 처녀 시절의 신분 패를…….”
쾅-! 황제가 손잡이를 세게 내려치자 귀족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황제를 쳐다봤다. 황제의 안색도 나빴지만, 그보다 황후의 안색이 더 안 좋았다.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열 달 꼬박 품고 있다가 배 아파 낳은 딸이 살해당했으니 당연히 그렇겠지. 안색이 나쁜 건 황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데아른도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도 황후를 위로해주려는 건지 파리한 얼굴 위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고 황후의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반면 황제의 왼쪽에 앉아 있는 황태자, 오스카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칼베른이 마리아 황녀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에 떨던 황태자파 귀족들은 오스카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깊게 안도했다. 칼베른이 상석과 연결된 계단 앞에 서자 황제가 오스카를 돌아봤다.
“네 말대로 수도 내의 모든 귀족들을 불러 모으고, 클라우드 소공작도 불렀다. 이제 뭘 어떻게 할 셈이냐.”
오스카가 옅게 웃으며 답했다.
“그야 칼베른 클라우드는 물론 그의 부인인 엘리사 클라우드의 무죄를 밝혀야겠지요.”
“지금 무죄라고 했습니까, 황태자?”
황후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핏줄이 선 눈동자엔 흰자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까, 황태자! 엘리사 클라우드가 황태자의 편인 클라우드 소공작의 부인이라 감싸주는 겁니까?”
“어마마마, 진정하세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니?!”
데아른이 황후의 팔을 잡으며 말렸지만, 황후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흥분한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내 딸이 그 여자한테 살해당해 죽었단 말이다! 당장 내 눈앞에 끌고 와 사지를 찢어도 모자랄 판국인데 그 여자의 무죄를 증명하겠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이냐!”
악에 받친 황후의 목소리가 넓은 알현실에 널리 울려 퍼졌다. 귀족들은 물론 황제도 안쓰러운 눈으로 황후를 바라봤지만, 칼베른은 아니었다. 그는 침착하게 황후를 바라보며 그녀가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저러는 것인지 판단했다.
“하! 지금 안식의 궁에 머무는 마리아가 이 소식을 들으면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겠구나! 통곡하겠어!”
일단 연기는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황후는 마리아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니 칼베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황후를 달래고 있는 데아른에게로 옮겨졌다.
“흑, 흑흑, 마리아, 내 딸 마리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황후는 체통도 잊고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마리아를 애타게 불렀다. 그런 황후의 곁으로 다가간 오스카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가 되어야 할 마리아가 이렇게 세상을 뜬 건 저도 무척 가슴이 아픕니다.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 마리아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고요.”
황후가 눈물 젖은 눈으로 오스카를 올려다 봤다.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이럴수록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태자는 끝까지 엘리사 클라우드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할 생각이군요.”
“네. 그녀는 범인이 아니니까요.”
황후는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칼베른을 내려다봤다.
“클라우드 소공작. 그대도 그대의 부인이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네.”
칼베른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하자 황후가 픽 웃으며 눈가에 남은 눈물을 오스카가 내민 손수건으로 닦았다.
“좋습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한 번 지켜보지요. 단!”
창백한 안색과 달리 오스카와 칼베른을 훑어보는 눈빛은 맹수보다 사나웠다.
“만약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 마리아를 죽인 범인이라는 게 확실하게 밝혀진다면 그땐 황태자도, 클라우드 소공작도 가진 걸 전부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할 겁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한 협박에 오스카는 잠시 멈칫했지만, 칼베른은 이번에도 바로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 황후가 다시 자리에 앉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황제가 오스카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클라우드 소공작 부부의 무죄를 증명할 거지, 황태자?”
“그건 제가 아니라 클라우드 소공작이 직접 증명할 겁니다.”
용의자가 스스로 무죄를 증명하다니. 흔치 않은 일에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특히 오스카가 무언가를 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던 황태자파 귀족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황제조차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오스카가 칼베른을 바라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클라우드 소공작이 직접 그와 부인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부황 폐하.”
“…….”
황제는 오스카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칼베른을 돌아봤다.
“그래, 클라우드 소공작. 어떻게 자네와 부인의 무죄를 증명할 생각이냐.”
긴 기다림 끝에 비로소 기회를 얻은 칼베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우선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신 경위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황제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것도 모르고 무죄를 증명하겠다는 건가?”
“스란 왕국으로 가시는 길에 피습당해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칼베른이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마리아 황녀 전하께서 피습당하시기 전 상황과 피습당한 후의 상황,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신 정확한 사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황제가 삐딱하게 의자에 기댔다.
“다 알고 있는데 일부러 물어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짐의 착각인가.”
역시 황제는 황제인가. 눈썰미가 상당히 좋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칼베른이 다 알면서 시치미를 잡아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이렇게 해야지만 확실하게 자신과 엘리사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황제는 칼베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을 들었다.
“브누아 백작.”
상석과 연결된 계단 앞에 서 있던 보좌관, 브누아 백작이 한 발 앞으로 나와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마리아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신 걸 발견한 건 닷새 전 아침으로, 처음 발견한 사람은 황녀 전하의 시녀인 마샬 영애입니다.”
마샬 영애는 평소와 같이 마리아를 깨우기 위해 그녀가 머문 객실에 들어갔다가 살해당한 마리아를 발견한 것.
“황녀 전하의 호위 기사가 다급하게 스란 왕국 소속 의원을 불러왔지만, 이미 황녀 전하께선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의원의 말에 따르면 돌아가신 지 5시간 남짓 됐다고 했습니다.”
“흑.”
마리아의 죽음에 대해 듣던 황후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자 데아른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마리아 황녀 전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칼이 심장을 관통했기 때문입니다.”
브누아 백작이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항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 봐서 괴한이 황녀 전하께서 곤히 주무시는 틈을 타서 심장을 찌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칼베른이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황녀 전하께서 저항하신 흔적이 전혀 없는 게 확실합니까?”
“네. 확실합니다. 어제 아침, 안식의 궁에 도착하신 황녀 전하를 궁의와 감식관들이 직접 살피고 올린 보고니까요.”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하다고?”
브누아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곳곳에서 술렁거렸다. 대부분 기사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었다. 검술 같은, 몸을 쓰는 일에 무지한 브누아 백작은 어리둥절하며 술렁이는 귀족들을 둘러봤다.
“……브누아 백작.”
황제가 시퍼런 힘줄이 설 정도로 황좌의 손잡이를 꽉 잡으며 백작을 불렀다. 황제도 기사 작위가 있었다.
“정말로 황녀가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었나?”
“네, 네. 확실하게 없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황후가 의아하면서도 불안한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녀 전하께서 저항한 흔적을 보이지 않으셨다는 건 전하께서 반항할 틈도 없이 일격에 심장이 관통됐다는 의미.”
대신 칼베른이 대답했다.
“하지만 심장은 갈비뼈에 둘러싸여 있어 평범한 사람의 힘으론 한 번에 뚫을 수가 없습니다.”
칼베른은 데아른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황자 전하께 묻겠습니다. 전하께선 제 부인에게 그럴 힘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귀족들은 물론 황제도, 심지어 황후도 데아른을 쳐다봤다.
“…….”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데아른은 잠시 침묵했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반적으론 불가능한 일이죠. 하지만.”
데아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세상에는 예외가 있는 법입니다. 더구나 알아본 바에 의하면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은 어렸을 적 검술과 체술을 조금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긴 한데……그래도 불가능에 가깝긴 해.”
“그렇지. 칼날이 갈비뼈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면 모를까…….”
귀족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데아른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곳에 소공작 부인의 처녀 시절 이름이 적힌 신분 패가 있었다는 겁니다. 만약 소공작 부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그곳에 부인의 신분패가 왜 있었는지 설명해줘야 할 겁니다, 클라우드 소공작.”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범인이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서죠.”
데아른이 실소했다.
“무죄를 증명한다더니 억지 주장을 펼칠 생각이었습니까?”
“억지 주장이 아닙니다. 제 부인은 범인이 아닙니다.”
“말로만 아니라고 하지 말고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죠, 클라우드 소공작.”
“그러겠습니다.”
칼베른은 흔쾌히 대답하며 오스카를 쳐다봤다. 그러자 오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귀족들의 시선이 꼬리처럼 오스카를 따라붙었다. 오스카는 궁정인들이 사용하는 문을 열더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누구지? 혹시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인가? 다들 의아해하며 짙은 베일을 쓴 여자를 바라보는 가운데, 여자가 베일을 천천히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