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돌아가다. (3)2021.10.06.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소공작님께선 수도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황제가 아무 이유 없이 칼베른의 수도 출입을 막았을 리는 없으니, 뭔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상당히 안 좋은 쪽으로. 사람들은 어느덧 마차에서 내린 칼베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의 신분 패를 확인한 경비를 내려다봤다. 표정만 보면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저리 담담하실 수 있는 거지?”
“혹시 황제 폐하께서 단장님의 출입을 막으신 이유가 좋은 이유인 거 아니야?”
“에이, 그건 아닐걸. 만약 좋은 이유라면 못 들어오게 막는 게 아니라 당장 황궁으로 부르셨겠지.”
“그럼 황제 폐하께서 왜 못 들어오게 하는지 이유를 알고 계셨던 거 아닐까? 그래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거지!”
“만약 그렇다면 처음부터 안 들어가시려고 했을 것 같은데…….”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칼베른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는지 알고 있나?”
거봐. 역시 모르셨잖아. 황제가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경비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칼베른은 이유를 알지만, 마리아 황녀의 죽음이 수도에만 알려진 건 아닌지 확인하고자 물어본 거였다.
“송구하오나 제가 황제 폐하께 받은 명령은 그것뿐입니다.”
이유도 가르쳐주지 않고, 출입을 막다니. 역시 안 좋은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사람들이 또 수군거리는 가운데 칼베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이름이 뭐지?”
“리암 랜드만이라고 합니다.”
리암 랜드만. 랜드만 남작가의 가주이자 수도 경비 대장이었다. 그가 모르는 황명을 다른 경비들이 알 리가 없으니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걸로 마리아 황녀의 죽음이 수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게 확실했고. 이에 안심이 되면서도 걱정스러운 건, 이상할 정도로 황후와 데아른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역시 뭔가 있는데. 칼베른은 성벽 너머로 자그맣게 보이는 황궁을 바라봤다. 커다란 황궁도 먼 거리에서 보면 인형의 집처럼 작았다.
“소공작님?”
칼베른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경비대장, 리암 랜드만을 돌아봤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칼베른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이럴 순 없다고 패악이라도 칠까 봐 걱정하는 거겠지. 칼베른은 쓴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수도 출입을 금지하신 건 나뿐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분들은 신분 확인만 된다면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겪으면 왜 안 되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패악을 치거나, 황제를 직접 뵙고 이유를 들어봐야겠다고 우기기 마련인데 칼베른은 그러지 않고 깔끔하게 물러났다.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죄송한 마음이 든 리암 랜드만은 칼베른에게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신분 확인을 계속했다. 마차 같은 경우엔 신분 확인뿐만 아니라 내부 수색도 같이 진행했다. 물론 칼베른처럼 고위 귀족의 마차는 겉으로만 한 번 쓱 훑어볼 뿐, 내부까지 샅샅이 확인하지 않았다. 그건 크라임 대주교의 마차도 마찬가지였다. 대주교는 대륙 어디를 가도 황족과 같은 대우를 받는 만큼 그들은 크라임 대주교의 신분 패를 보자마자 마차 내부는 확인도 하지 않고 통과시켜주었다. 덕분에 엘리사는 경비들에게 들키지 않고 수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칼베른이 엘리사를 크라임의 마차로 보낸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혹시 모르니 수도의 성문에서 멀리 떨어질 때까지 마차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마차 안에 있는 그들을 대신해서 계속 바깥 상황을 살피고 있던 닉이 똑똑, 마차 창문을 두드려 이상이 없음을 알렸다.
“후우.”
그제야 엘리사는 안심하며 마차 의자에 똑바로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크라임이 어둠과 침묵이 내려앉은 고요한 거리를 확인하곤 엘리사에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클라우드 공작저에 도착한 이후의 계획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칼베른이 크라임 대주교에게 엘리사를 클라우드 공작저까지 무사히 데려다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 이후의 계획은 말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사과로 대답을 대신 했다. 크라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신 제 부탁을 한가지 들어주시겠습니까, 부인?”
“물론이에요.”
크라임 대주교가 이상한 부탁을 할 리가 없으니 엘리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거.”
크라임 대주교가 내민 건 은색 십자가 목걸이였다.
“이걸 항상 몸에 지니고 계셔 주십시오.”
이상한 부탁은 아니었지만, 난감한 부탁이긴 했다. 딱 보기에도 신력이 깃든 물건인 것 같은데 저걸 끼면 마나를 사용할 때 마나 충돌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크라임 대주교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저런 부탁을 하니 난감하면서도 아까 미처 끝내지 못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목걸이를 제게 주시는 이유가 대주교님께서 번거롭게 수도로 돌아오신 것과 연관이 되어 있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크라임 대주교가 말없이 웃었다. 긍정이라는 의미였다. 신력이 깃든 물건을 주는 걸 보니 역시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면 안 되나요?”
“아직은 확실하지 않아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확실해지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확실하지 않아도 지금 말해주는 게 좋은데……. 엘리사는 답답한 마음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사는 크라임에게 알려달라고 집요하게 물어볼까 싶다가도, 괜히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참았다. 저 역시 그에게 비밀로 하는 게 있기도 했고.
“확실해지면 꼭 알려주세요.”
“물론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클라우드 공작저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에드윈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환한 웃음을 그린 입꼬리와 달리 눈동자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에드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는 짐 정리를 하는 사용인들을 쭉 훑어봤다. 그들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엘리사는 에드윈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마리아 황녀 일이 알려졌나요?”
에드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사용인들이 왜 이렇게 긴장한 거죠?”
“그게 황궁 기사단이 몇 번 찾아와 소공작부인의 행방을 물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직감한 거죠.”
“그렇군요.”
소곤소곤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앞으로 집사, 헤리엇이 다가와 물었다.
“남작님, 곁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엘리사에게 걸린 변신 마법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헤리엇의 입장에서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에드윈은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했다.
“이번 몬스터 토벌 때 큰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에드윈이 ‘분’이라고 말한 건 그보다 신분이 높거나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이니 헤리엇은 엘리사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클라우드 공작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는 이 저택의 총괄 집사인 헤리엇이라고 합니다. 현재 주인님과 마님께서 저택을 비운 상황인지라. 제가 대신 인사를 드리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변신 마법 약으로 외형은 바꿀 수 있어도, 목소리는 바꾸지 못하는 터라 혹 헤리엇이 제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엘리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으나, 고위 귀족이라면 그럴 수 있기에 그녀의 신분이 높다고 확신한 헤리엇이 더욱 공손하게 자세를 낮췄다.
“당분간 공작저에서 머무시는 거라면 손님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엘리사는 또 한 번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헤리엇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큰일을 앞둔 만큼 푹 자야 정신이 맑아져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엘리사는 칼베른이 걱정돼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어떻게든 자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엘리사는 해가 뜨자마자 에드윈에게 달려갔다.
“그이는 어떻게 됐죠? 무사한가요?”
엘리사와 마찬가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에드윈이 핼쑥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사하십니다. 어제 황제 폐하의 친위대가 찾아와 소공작님을 직접 모시고 갔다고 합니다.”
모시고 간 게 아니라 연행한 거겠지. 엘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서 지금 그이는 감옥에 있나요?”
“일단은요.”
엘리사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에드윈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감옥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감옥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소공작님과 같은 고위 귀족들은 이름만 감옥인 귀빈실에 모셔두니까요.”
“황족 시해 혐의로 잡혀갔는데도요?”
“아, 그 경우는 좀 다릅니다만…….”
에드윈이 잠시 멈칫했다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 죄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소공작님께서 용의자가 되신 것도 아니니 진짜 감옥에 가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엘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칼베른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몹시 마음이 아팠다. 얼른 가서 그를 구해주고 싶었다.
“이거 받으십시오, 부인”
에드윈이 내민 건 오스카가 보내 준 약제사 ‘예르카’의 신원 보증서였다. 칼베른의 계획대로 엘리사의 무죄를 증명하려면 엘리사는 황제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변신 마법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황궁에 들어가야 하는데, 황궁에 들어가려면 신원이 확실해야 하니 황태자인 오스카가 그녀의 신원을 보증해준 것이다. 엘리사는 신원 보증서가 구겨지지 않게 잘 말아서 챙겼다.
“언제 황궁으로 갈 거죠?”
“아직 시간이 이르니 약 네 시간 뒤에 출발하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시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네. 당장 뛰어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전부 잘 해결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부인.”
하는 말과 달리 걱정이 가득한 에드윈의 표정을 본 엘리사는 쓰게 웃었다. ****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약 두 시간 뒤, 하녀장인 안네케가 엘리사의 외출 준비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왔다. 안네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엘리사가 놀라 쳐다보자 안네케가 공손히 말했다.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른 아이를 부르겠습니다.”
엘리사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하녀장이 직접 올 줄은 몰라서 놀랐던 거예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안네케는 반 박자 늦게 대답하더니 함께 온 하녀들에게 가지고 온 상자들을 내려놓으라고 말했다. 드레스, 액세서리, 신발 등 상자 안에 든 것들은 하나같이 보석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왜 화려한 것만 가져온 거죠?”
엘리사는 안네케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게 최대한 목소리를 변조해서 말했다.
“남작님께서 황궁에 가실 거라고 말씀하셔서 그에 맞는 것들로만 가져왔습니다.”
평소라면 이게 맞지만, 오늘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엘리사는 상자 안에 든 드레스들을 전부 살펴본 뒤 안네케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것 말고 수수한 드레스로 부탁할게요. 그대로 입고 장례식에 가도 괜찮을 만큼 아주 수수한 것들로요.”
황궁에 간다면서 장례식에 가는 것처럼 수수하게 입고 가겠다니. 이상한 요구에 하녀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안네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 엘리사가 목욕할 동안 안네케는 엘리사의 요구대로 수수한 옷과 소품들을 가져왔다.
“그래도 황궁에 가시는데 진짜 장례식에 갈 때처럼 검은색 드레스를 입는 건 아닌 것 같아 짙은 남색 드레스로 가지고 왔습니다.”
“훌륭해요.”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짙은 남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뒤, 머리를 높게 틀어 올렸다. 옷에 맞게 화장도 수수하게 하고, 액세서리는 작은 보석이 달린 귀걸이와 크라임이 준 목걸이만 착용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와 같은 색의 망사 베일을 써서 얼굴을 가렸다.
이 정도면 괜찮으려나. 거울을 보며 이상한 곳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굳이 하녀들을 전부 내보내고 그녀의 머리를 만져주던 안네케가 말했다.
“주인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님.”
“……!”
마님이라니.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안네케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안네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안네케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걸 확신한 엘리사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절 알아본 거죠? 제 목소리 때문인가요?”
목소리를 최대한 변조를 했어도 티가 났을 테니 그것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안네케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처음 마님을 알아본 건, 제 소개를 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하녀장인 걸 알아보셨기 때문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엘리사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혀를 깨물었다.
“물론 그때는 혹시 마님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만 하였지만……그 뒤로 마님의 습관을 확인하고 맞는다고 확신을 내렸습니다.”
“제 습관이요?”
“네. 마님께선 목욕하실 때…….”
안네케는 엘리사도 스스로 깨닫지 못한 습관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엘리사는 제게 이렇게 많은 습관이 있다는 것과 그 모든 것들을 안네케가 알고 있다는 것에 무척 놀랐다.
“안네케가 저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엘리사가 신기하다는 듯 말하자 안네케가 웃었다.
“마님을 모신지 어언 5년째인데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