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돌아가다. (2)2021.10.02.
“제가 한 일 아니에요.”
에드윈의 보고를 받은 엘리사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칼베른이 약간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줄곧 그녀와 같이 있었으니까. 설령 따로 있었다고 해도 칼베른은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죽은 마리아 황녀가 엘리사의 처녀 시절 신분 패를 쥐고 있었던 것만 해도 큰데, 하필 엘리사가 휴양한다며 클라우드 공작저를 비운 상태인지라 의심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검술을 전혀 모르는 엘리사가 철통같은 호위를 뚫고 마리아 황녀를 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황상의 증거가 엘리사가 범인이라고 가리키고 있었고, 신분 패라는 명확한 증거까지 나왔으니 진범을 찾지 않는 한 그녀는 누명을 벗기 힘들었다. 엘리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희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이제 잡혀가는 건가요?”
“아니.”
칼베른이 떨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
엘리사는 마주 잡은 손에 다른 손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당신까지 공범으로 몰릴 수가 있어요.”
“맞습니다.”
에드윈이 엘리사의 말을 거들었다.
“황족 시해는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치부되는 대역죄. 어설프게 나섰다가 소공작님뿐만 아니라 클라우드 공작가 전체가 큰 타격을 입을 겁니다.”
칼베른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렇다고 아무 잘못 없는 그녀가 고초를 겪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다.”
“물론입니다.”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인 엘리사가 마리아 황녀 시해범으로 찍히는 것 자체가 클라우드 공작가에 큰 오점으로 남기 때문에 무조건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찾아야 했다.
“수도에 도착하기까지 약 나흘 정도 남았으니, 그동안 진범을 찾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우선 그 신분 패가 정말 소공작 부인의 신분 패가 맞는지 확인해봐야겠군요.”
“아마 맞을 거예요. 전에 제가 살던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신분 패를 잃어버렸는데 그 신분 패가 거기서 발견된 것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죠.”
내심 발견된 신분 패가 가짜이길 바랐던 에드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리아 황녀가 죽은 경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봐라.”
“네.”
“그리고…….”
칼베른이 에드윈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는 동안 엘리사는 멍하니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제 좀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황당하면서도 화가 났다. 당장 신을 찾아가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고 바락바락 따지고 싶었다.
‘아니, 이건 신에게 따질 문제가 아니야.’
마리아 황녀를 죽이고, 제게 누명을 씌운 놈을 찾아가서 따지는 게 맞았다. 엘리사는 단순히 따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놈을 있는 힘껏 후려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클라우드 공작령에 있는 솔레이에게도 전언을 보내라.”
솔레이의 이름이 언급되자 엘리사는 칼베른을 쳐다봤다.
“황실 기사단이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을 긴급 체포하기 위해 찾아와도 놀라지 말라고.”
“아, 그러고 보니 그 부분도 대책을 세워야 하는군요. 클라우드 공작령에 있어야 할 부인께서 왜 안 계시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크게 책잡힐 겁니다.”
“지금이라도 제가 클라우드 공작령에 가면 안 되나요?”
엘리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에 황태자 전하께서 주신 텔레포트 스크롤을 이용하면 황실 기사단보다 먼저 클라우드 공작령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괜찮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사의 말에 동의했다.
“솔레이 양이 부인인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건 믿을 수 있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아무도 모르니, 부인께서 황실 기사단보다 먼저 공작령에만 도착한다면 부인의 무죄를 증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럼 당장 출발할게요.”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늦지 않게 도착할 테니 짐만 챙겨 들고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칼베른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럴 필요 없다.”
엘리사가 의아해하며 칼베른을 돌아봤다. 에드윈도 비슷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 말은 클라우드 공작령에 가지 말라는 건가요?”
“그래.”
무덤덤한 대답에 에드윈이 당황하며 말했다.
“부인께서 공작령에 가지 않으시면 상황이 더 복잡하고 악화할 겁니다.”
“해결할 방법이 있다.”
“무슨 방법이요?”
엘리사의 질문에 칼베른은 대답 대신 에드윈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크라임 대주교를 불러와라. 그리고 편지를 적어줄 테니…….”
칼베른은 잠시 멈칫하더니 엘리사를 흘끗 보곤 말을 이었다.
“……황태자비 전하께 보내도록.”
**** 황족 시해는 대역죄로 분류되는 만큼, 가문의 일원 중 누군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해도 가문에 피해가 갔다. 직계는 개인 재산을 몰수하는 건 물론 귀족 신분을 빼앗았고, 두 번 다시 귀족 반열에 오르지 못하게 붉은 줄을 그었다. 가문의 일원은 중앙 관리가 되지 못하는 건 물론 수도에서 쫓겨났으며 최악의 경우엔 가문이 멸족하게 되기도 했다. 엘리사는 명백한 클라우드 공작가의 일원이었다. 그것도 클라우드 공작가의 안살림을 담당하는 소공작 부인이었고, 차기 공작 부인이었다. 그러니 칼베른은 자신에게도 황실 기사단을 보내는 등 어떤 영향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황실은 잠잠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 최소한 마법 전령새를 통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야 정상인데 그조차도 없었다. 심지어 황실은 마리아 황녀가 죽었다는 사실도 숨겼다.
‘왜 숨기는 거지?’
보통 이렇게 큰 사건은 대대적으로 공개하고 수사하는데, 그러지 않는 게 의아했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 막으신 건가?’
엘리사가 용의선상에 오른 게 알려지면 클라우드 공작가의 위신이 떨어질 테고, 그럼 공작가가 지지하는 오스카의 위신 역시 덩달아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오스카가 막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황후와 데아른이 걸렸다. 배 아파 낳은 친딸이자 친동생인 마리아가 살해당했는데,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길길이 날뛰며 이 일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유력한 용의자인 엘리사와 공범일지도 모르는 칼베른을 잡아야 한다고 발악해야 정상이었다. 그게 정상인데, 잠잠하다는 건…… 마리아를 죽인 배후에 데아른과 황후가 있다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칼베른은 고개를 저으며 문득 든 끔찍한 망상을 지웠다. 아무리 그들이 황위에 목숨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혈육을 살해하는 미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어야 하는데.
“우음.”
굳어 있던 칼베른의 표정이 풀린 건 엘리사의 잠꼬대를 들었을 때였다. 그의 어깨에 기대 곤히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는 눈빛이 따스했다.
칼베른은 엘리사가 불편하지 않게 자세를 고친 뒤, 그녀의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손을 살포시 잡았다. 작은 손이 보자기에 감싸지듯이 사라졌다. 마리아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엘리사는 범인이 아니라는 것. 반드시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리라. 설령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놓더라도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하리라. 그리 다짐하면서도, 가장 그녀를 다치게 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기에. 자신 때문에 그녀가 제 명을 살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녀를 정말 위한다면 놓아주는 게 맞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칼베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창밖을 내다봤다. 붉게 물든 지평선 너머로 수도를 둘러싼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 수도에 도착하기 전, 엘리사는 짐을 챙겨 들고 크라임의 마차로 옮겼다.
“어서 오십시오, 부인.”
칼베른에게 미리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크라임이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닉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 번 흘겨보곤 말을 걸지 않았지만, 엘리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칼베른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서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래도 아예 정신을 팔고 있는 건 아닌지라, 엘리사는 크라임을 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대주교님.”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도움이 돼서 기쁩니다.”
크라임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럼 소공작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움직이면 되겠습니까?”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크라임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엘리사는 칼베른을 계속 생각했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앞서 달리고 있는 칼베른의 마차를 볼 수 없었다. 그의 마차가 보이지 않으니 더욱 불안했다. 괜찮겠지. 아니, 괜찮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는…….
“괜찮습니다.”
크라임이 떨리는 엘리사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를 다독여주었다.
“지금까지 제가 본 클라우드 소공작님은 실패를 모르는 분이었으니 이번에도 보란 듯이 성공하실 겁니다.”
부드럽게 퍼지는 음색과 인자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엘리사가 희미하게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대주교님.”
“아닙니다. 그것보다 부인.”
부드럽게 올라갔던 크라임의 입꼬리가 살짝 내려왔다. 그는 엘리사의 얼굴을 크게 훑어보며 물었다.
“요즘 잠을 못 주무십니까?”
왜 저런 걸 물어보는 거지. 혹시 내 안색이 별로인가? 엘리사는 마른 뺨을 쓸었다. 자신이 마리아를 죽인 범인으로 지목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약간 불안해져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긴 했다. ……칼베른이 곁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요즘 부쩍 마차에서 자는 시간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밤에는 못 자도, 낮에 칼베른의 곁에서 잘 잤으니 안색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 안색이 많이 안 좋나요?”
“아니요. 음, 식귀 사건 때 끔찍한 걸 봤으니 혹 부인이 잠을 설치시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본 겁니다.”
아닌 것 같은데. 엘리사는 미심쩍었지만, 증거가 없으니 깊게 물어보지 않았다. 말을 돌린다는 건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고. 괜히 캐물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에게 궁금한 게 있었는데. 엘리사가 크라임 대주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주교님께선 왜 저희를 따라 다시 수도로 오신 건가요?”
“그야 앙고라 영지에서 일어난 식귀 사건에 대해 제국의 대신전에 보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끔찍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건 그가 제국이 아닌 성국의 소속인 데다가 직함이 무려 대주교라는 거였다.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 하나로 대륙의 모든 신관들을 부릴 수 있는 직함인 그가 제국의 대신전까지 직접 찾아가 보고할 이유는 없었다. 뭐, 크라임이 아주 한가롭고 시간이 남아돌거나, 마침 수도로 가는 길이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었다.
“정말 그것뿐인가요?”
그렇다 보니 의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아까 크라임 대주교가 느닷없이 요즘 잠을 잘 자냐고 물어봐서 더욱 의심스러웠다.
“혹시 대주교님께서 수도까지 다시 오신 이유가 저 때문인가요?”
그냥 한 번 던져본 건데 크라임 대주교가 말없이 웃었다. 엘리사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크라임 대주교가 정말 자신 때문에 수도에 온 거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제 몸에 걸린 흑마법이 아직 정화되지 않은 건가요?”
“아닙니다. 그건 완벽하게 정화됐습니다.”
“그럼…….”
뭐 때문이냐고 물어보려는데 덜컹, 마차가 멈춰 섰다. 어두컴컴했던 창밖이 한순간 밝아지자 엘리사는 창밖을 내다봤다. 횃불을 든 경비들이 마차 주변을 에워싸는 게 보였다.
“……수도에 도착했구나.”
긴장감이 차오르면서 크라임과의 대화가 잊혔다. 엘리사는 커튼 뒤에 숨어 마른침을 삼키며 바깥 상황을 살폈다. **** 본디 수도의 성문은 안전을 위해 해가 떠 있는 시간에만 개방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긴급 전언이나 황명 등 특별한 상황에는 예외적으로 열었다. 몬스터 토벌 원정대의 귀환도 특별한 경우였다. 경비들은 토벌 원정대라는 걸 확인하고 성문을 열었다. 성문이 열렸다고 해서 그냥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혹 불순한 자가 몰래 끼어 수도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신분 패로 신분을 증명해야 했다. 그건 칼베른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마차 창문을 열고, 횃불을 들고 있는 경비에게 신분 패를 보여주었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문장이 떡하니 찍힌 신분 패와 칼베른의 얼굴을 확인했는데도 경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칼베른이 탄 마차 앞을 가로막은 경비들도 멀뚱멀뚱 서 있었다.
“당장 안 비키고 뭐 하는 거지?”
에드윈이 몹시 언짢아하며 소리치자, 신분 패를 확인했던 경비가 똑같이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칼베른을 향해 꾸벅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라 소공작님께선 수도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