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깨달음, 그리고 각성. (9)2021.09.25.
칼베른의 젖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던 엘리사의 시선이 멈춘 곳은 살짝 벌어진 샤워 가운 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가슴이었다. 잔근육으로 다부진 그의 가슴을 보니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베개나 이불인 줄 알고 그의 가슴을 막 더듬었던 것과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가 마주했던 그……!
“꺄……!”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가 소리를 지르려고 하자 칼베른이 황급히 그 입을 막았다.
“쉿.”
거리가 확 가까워지면서 상큼한 입욕제 향기가 섞인 그의 체취가 느껴졌다. 폐 깊은 곳까지 들어온 체취가 심장의 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용히 하도록.”
엘리사가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칼베른은 그제야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떨어졌지만, 체취가 남아 있어 계속 심장 문을 두드렸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러다 칼베른이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된 엘리사는 가슴께를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봤자 바로 뒤가 문인지라 물러날 곳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문에 딱 달라붙어 최대한 그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는데, 그걸 이상하게 본 칼베른이 물었다.
“뭐 하는 거지?”
“아, 아무것도 안 하는데요?”
칼베른의 눈이 가자미처럼 얇게 접혔다. 괜히 뜨끔한 엘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이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요.”
멋쩍고 어색해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으니 엘리사는 칼베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시간 좀 내줘요. 10분, 아니 5분이면 돼요.”
“……그래.”
이번에도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칼베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부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여기서요?”
“그럼?”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면 안 돼요?”
“뭐?”
칼베른이 당황하며 되묻자,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엘리사가 두 손을 격하게 저으며 말했다.
“이, 이상한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에요! 그저 여기 있다가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특히 토벌 원정대 사람들에게 들키면 안 되잖아요.”
사실 이것 때문이 아닌 칼베른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회피할까 봐 미리 그의 영역에 들어가 있으려는 거였다. 그러면 그가 피하려고 해도 억지로 붙잡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칼베른이 본인을 못 믿는 거냐며 언짢아할 수도 있으니, 엘리사는 다른 변명을 대며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당신이 옷 갈아입는 걸 훔쳐보려고 했다던가, 그런 이상한 의도는 절대로 없어요!”
칼베른이 픽 웃었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는 구태여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거였지만, 듣는 입장에선 ‘변명하지 마라.’로 들렸다. 엘리사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볼을 감싸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칼베른이 제 쪽으로 손을 뻗자 엘리사는 바짝 긴장하며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커다란 손은 그녀를 지나쳐 문에 닿았다. 끽,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대의 말대로 들어오는 게 나을 것 같으니, 들어와서 기다리도록.”
아, 단순히 문을 열려는 거였구나. 긴장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엘리사는 멋쩍게 웃으며 칼베른을 따라 들어갔다. 칼베른은 옷장이 아닌 반대편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테이블에는 칼베른이 원할 때 언제든지 차를 마실 수 있게 간단한 티포트 세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소파 근처에 서성이던 엘리사는 그가 티포트를 집어 들자 손을 뻗었다.
“제가 할게요.”
“됐어. 내 방에 온 손님이니, 내가 대접하지.”
손님. 명백하게 거리를 두는 말에 엘리사는 쓰게 웃으며 손을 거뒀다. 그가 수도로 돌아가면 자신을 내보낼 거라는 생각이 점점 확신으로 굳었다. 엘리사가 소파에 앉자 칼베른이 그녀의 앞에 차가 담긴 찻잔을 내려놓았다.
“옷 갈아입고 올 테니 마시고 있어.”
“네.”
“보고 싶으면 봐도 되고.”
“무슨…… 절대 안 볼 거예요!”
엘리사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치자 칼베른이 소리 내서 웃었다. 하여간 생긴 거랑 다르게 짓궂은 면이 있다니까. 엘리사는 곁눈질로 칼베른을 흘겨보곤 찻잔을 들었다.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준다는 캐모마일이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할 말이 뭐지?”
옷을 갈아입은 칼베른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았을 땐, 불안감이 최고치를 찍었다. 엘리사는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손을 꽉 움켜쥐며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엘리사?”
물어봐야 해.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기에 엘리사는 남아 있는 용기를 끌어모아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왜 절 피한 거예요?”
겁먹은 것치고 당돌한 질문에 칼베른이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피한 적 없어.”
“거짓말. 계속 절 피했잖아요. 제가 몇 번이고 당신이랑 이야기를 나누려고 찾아갔는데,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잖아요.”
칼베른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그건 바빠서 그런 거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그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럼 제가 당신을 찾는다는 걸 알면서 왜 절 찾아오지 않았어요?”
“그것도 바빠서…….”
“그럼 아론 경을 통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볼 법한데 당신은 그러지 않았잖아요.”
엘리사가 더 이상 변명하지 말라는 듯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칼베른이 입을 다물며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절 피한 게 맞는군요.”
“…….”
이젠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헛웃음을 지으며 거의 반쯤 포기한 어조로 물었다.
“수도로 돌아가면 절 내쫓을 건가요?”
칼베른이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려 엘리사를 쳐다봤다.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지?”
“아닌가요?”
“아니다.”
칼베른이 딱 잘라서 부정했다.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제가 계약을 어겼는데도요?”
“계약?”
“저희 결혼 계약 말이에요. 서로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로 결혼 전에 계약했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계약을 했었지.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칼베른이 쓰게 웃었다. 그 이후로 엘리사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어 그런 거였다. 하긴, 그럴 만하지. 나도 그랬으니까. 칼베른은 엘리사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런 불안감을 안고도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만나러 온 엘리사의 용기에 감탄했다. 그럼 나도 용기를 내는 게 맞겠지. 칼베른은 크게 심호흡한 뒤,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대가 나한테 계약서를 넘겨준 순간부터 계약은 파기됐으니까.”
“아,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래. 그리고 계약을 먼저 어긴 사람은 그대가 아니라 나다.”
“네? 그게 무슨 의미죠?”
“무슨 의미긴.”
칼베른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먼저 그대를 좋아했다는 거지.”
“……!”
전혀 생각지 못한 고백에 엘리사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칼베른은 보기 드물게 긴장하며 두 손을 꼭 마주 쥐었다. 그들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엘리사는 반쯤 넋을 놓고 칼베른을 바라봤다. 일방통행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감히 바라선 안 되는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가 먼저 자신을 좋아했다니.
‘이건 꿈인가?’
그래, 꿈이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 엘리사는 꿈에서 깨기 위해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파.’
아프다는 건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의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엘리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칼베른이 말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지.”
엘리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점차 아래로 떨어져 탁자를 응시했다. 두 손이 꼼지락거렸다.
“당신이…… 절 좋아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가 날 좋아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칼베른이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만졌다.
“기적이 일어났군.”
기적. 그의 말대로 이건 기적이었다. 5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와 결혼할 때만 해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벌어졌으니까.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걸 확인했음에도 두 사람은 마음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특히 칼베른은 엘리사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지은 것 같은 게 아니라 확실하게 큰 죄를 지었다. 그녀의 수명을 흡수했으니까. 지금 그가 이렇게 살아 숨 쉴 수 있는 것도 엘리사의 수명을 흡수한 덕분이었다. 그동안 엘리사를 피한 것도 죄책감 때문이었고.
“그대도 알다시피 난 누군가를 좋아해선 안 되는 몸이다.”
칼베른이 한층 숙연해진 얼굴로 엘리사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떠나는 게 그대에게 좋을 거야.”
엘리사도 진지한 얼굴로 칼베른을 바라봤다.
“절 내쫓지 않는다면서요?”
“내쫓는 게 아니야.”
“아, 그렇네요. 제 발로 떠나라고 권유하는 거니까.”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말에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이 더욱 무거워져 숨을 쉬기가 약간 버거웠다. 칼베른은 깊은숨을 토해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른 사람의 수명을 흡수해야만 살 수 있다니. 확실히 무서운 저주예요.”
저벅, 푹신한 카펫이 미처 흡수하지 못한 발소리가 귀에 꽂혔다. 칼베른은 눈을 뜨고 어느새 제 앞까지 다가온 엘리사를 올려다봤다.
“정말로 무서운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어요.”
“……그게 뭐지?”
“당신을 잃는 거요.”
“……!”
“그래서 망설임 없이 당신에게 제 수명을 줄 수 있었어요.”
주기가 온 칼베른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엘리사가 한 생각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를 살리자. 설령 내 수명이 줄어들더라도 무조건 그를 살려야 해.
“지금도 전 그때 제 수명을 바쳐 당신을 살린 걸 후회하지 않아요.”
“…….”
“그러니까 저한테 떠나라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뭐, 그렇게 말해도 떠날 생각은 없지만.”
분명 제국어인데, 다른 나라의 언어를 듣는 것처럼 그녀의 말이 이해가 안 돼서 칼베른은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엘리사가 봄날에 핀 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칼베른을 꼭 안아주었다.
“좋아해요.”
귓가에 나지막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비로소 그녀의 말을 이해한 칼베른의 눈동자가 커졌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요.”
“……나도.”
칼베른이 두 팔을 뻗어 엘리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도 사랑한다.”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
“그대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난 두렵다.”
툭, 벗은 옷이 뱀의 허물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가 나 때문에 불행해질까 봐, 그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욕심 때문에 그대를 놓아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
엘리사가 웃으며 칼베른을 끌어안았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어요?”
“……아니.”
칼베른이 엘리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그대가 지금,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평생 날 원망하더라도……이젠 놓아줄 수 없다.”
****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한 걸 후회하십니까?”
그게 언제였던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확실한 건 공작부인의 수명을 흡수한 공작이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술을 마시고 있을 때라는 거였다. 그 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묻자 클라우드 공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 어미와 결혼한 건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괴로워하시면서도요?”
“그래.”
술잔이 기울었다.
“그녀를 놓쳤더라면 더 후회했을 거다. 평생 땅을 치고 후회하며, 지금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았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겠지. 이 마음을 이해하기엔 넌 아직 너무 어리니까.”
공작은 술잔을 내려놓고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너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 말을 이해할 거다. 가장 좋은 건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거지만.”
****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햇볕에 칼베른은 눈을 떴다. 그러자 제품에 고이 안겨 자고 있는 엘리사가 보였다. 칼베른은 짓궂은 햇빛이 그녀를 깨우지 못하게 품으로 끌어당기며 꿈에 대해 생각했다. 빛 바란 오래된 기억이 꿈에서 나온 건 비로소 클라우드 공작의 말을 이해했기 때문일 터. 평생 그의 말을 이해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였다. 그럼 이 저주가 풀리는 날도 오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지.’
선대 공작들이 저주를 풀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풀지 못했었다. 오히려 아등바등할수록 저주는 당사자의 목을 졸랐다. 그러니 괜한 기대를 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 저주가 풀려야지만 엘리사도,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