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깨달음, 그리고 각성. (3)2021.09.04.
가까이서 본 환자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상처 부위를 감싼 붕대는 피로 물들어 본래의 색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으윽, 윽.”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고통스러운 신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의 고통이 제게 전염되는 것 같아, 엘리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환자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혹시 부르면 정신을 차릴까 싶어, ‘저기요’ 하고 몇 번 불러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미안해요.”
그런 사람에게 허락도 없이 피를 뽑는다는 게 몹시 미안했지만, 전염 독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엘리사는 나중에 환자가 의식을 찾으면 또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유리병에 환자의 피를 담았다. 독 때문인지 피는 시커멨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피는 아니었다. 엘리사가 피를 담은 유리병을 가지고 방을 나오자 사람들은 기함하며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엘리사가 들어가는 걸 말렸던 조수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피, 피는 왜…….”
“이걸 분석해서 독의 정체를 알아내려고요. 그래야 해독제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 약제사님도 중독될 겁니다. 위험해요.”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위험해지는 건 똑같아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제가 하겠어요.”
단호하게 말하고 약방으로 들어온 엘리사는 가방에서 가지고 온 재료들을 꺼냈다. 인어의 눈물, 엉겅퀴 등 마법 약이나 독을 중화시키는 데 주로 쓰이는 재료들이었다. 그중 인어의 눈물에 검은 피를 톡, 떨어뜨리자 구슬의 매끄러운 곡면을 타고 검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반응이 없네.”
만약 세상에 존재하는 해독제가 10가지라면, 그중 8개에 들어갈 만큼, 인어의 눈물은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였다. 가장 포괄적으로 마법 약이나 독을 중화시켜주기도 했고. 그런데 반응이 전혀 없다는 건, 흔히 알려진 독은 아니라는 의미.
“그럼 이것도 반응이 없을 테고…… 아, 얘는 반응이 있겠다.”
만약 반응이 없으면 다른 재료로 다시 실험하는 등, 엘리사는 가지고 온 재료들을 모두 사용해서 확인해봤지만,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는 건 없었다.
“뭐지?”
아무리 흔히 알려지지 않은 독이라고 해도 한 가지 정도는 반응이 있어야 정상인데? 혹시 피를 너무 적게 떨어뜨린 건 아닐까. 재료를 혼합해서 써보면 반응이 있으려나? 엘리사는 자신이 아는 방법을 총동원해봤지만, 여전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아, 도대체 뭐야?”
엘리사는 쭈그려 앉아 유리병에 3분의 1 정도 남은 검은 피를 쳐다봤다. 이렇게 해도 반응이 없다는 건 이 피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거나, 독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전자는 확실히 아니야.”
누가 봐도 이 검은 피는 문제가 있어 보였으니까. 체내로 들어간 독이 피를 통해 온몸에 퍼진다는 건 일반인도 아는 기본 상식이었다.
“그럼 후자인가?”
독이 아니라면 뭐지? 전염병? 아니야. 만약 전염병이었다면 의원들이 전염 독이라고 진단을 내리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염병은 대게 며칠의 잠복 기간이 있으니 이렇게 빨리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독이라는 건데, 도대체 무슨 독이지? 독의 정체를 알아내겠다며 피까지 뽑아왔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에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쾅!
“연금, 아니, 약제사님!”
누군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문을 벌컥 열며 약방이 울릴 정도의 큰 소리로 엘리사를 불렀다.
“!”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유리병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병에 담겨 있던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 죄송해요.”
그녀를 놀라게 한 약제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어서 빨리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차피 남은 재료가 없어 피를 가지고 있어도 딱히 할 게 없었다.
“사방으로 튄 피를 닦는 것만 도와주세요.”
“그게……, 네에, 알겠습니다.”
약제사는 문제의 검은 피가 두려웠지만,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내민 수건을 받아 쭈그려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엘리사는 바닥에 묻은 피를 수건으로 닦으며 약제사에게 물었다. 약제사도 피를 열심히 닦으며 대답했다.
“보급품과 의원들이 왔습니다. 레사 영지에서 지원을 보내줬어요.”
“와, 그거 진짜 기쁜 소식이네요.”
안 그래도 치료소를 폐쇄하는 바람에 그 뒤에 다쳐서 온 병사들을 치료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이걸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그런데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어서 지원군이 오기 힘들다고 하더니, 용케 왔네요.”
“기력을 회복한 마법사님들이 도와주셨습니다.”
“마법사도 있었나요?”
“네. 세례나 님이 전투에 대비해서 미리 고용하셨어요. 마법사님들 덕분에 몬스터들이 북쪽 성벽을 타고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었습니다.”
약제사도 지원군이 와서 안심했는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임시 치료소를 짓고, 그곳에서 지원 온 분들이 환자를 돌보기로 했습니다.”
“붕대나 약 같은 보급품은 충분한가요?”
“안 그래도 그 부분 때문에 남은 약재가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그럼 당장 준비해서 보내야죠.”
그전에 이 카펫부터 버려야지. 바닥이나 벽에 묻은 피는 쉽게 닦였지만, 카펫에 묻은 피는 이미 흡수돼서 문질러도 닦이지 않았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니, 엘리사는 카펫을 돌돌 말았다. 그러자 카펫 아래 숨겨뒀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얇은 카펫을 투과한 핏방울이 마법진에도 얼룩덜룩 묻어 있었다.
“이거 태워서 버려주세요.”
엘리사가 돌돌 만 카펫을 약제사에게 맡기고, 마법진에 묻은 핏방울을 닦으려는 순간. 파지직-.
“아!”
손끝에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몸이 마비되거나 화상을 입을 정도로 강력하진 않았지만, 사람을 놀라게 하긴 충분했다.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아요.”
엘리사는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저릿한 손끝을 감싸 쥐며 마법진에 묻은 핏방울을 쳐다봤다. 지금 알게 된 사실인데 핏방울 주변의 마법진 색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이건 마나 충돌?’
마법진의 색이 변한 건 마나 충돌과 상관없었지만, 스파크가 일어난 걸 봐서 마나 충돌이 확실했다. 그 말인즉, 핏방울에 마나가 스며들어 있다는 건데 설마……. 머릿속을 스치는 안 좋은 생각에 엘리사는 막 카펫을 들고 나가려는 약제사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당장 마법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 주세요!”
**** 엘리사는 아무나 빨리 와서 이걸 봐줬으면 했지만, 애석하게도 전염 독이 퍼져 폐쇄된 치료소 안에 선뜻 들어오려는 마법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가지고 나가서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엘리사는 피가 묻은 카펫과 쪽지를 치료소 밖에 있는 사람에게 주며 마법사들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이것도 같이 전해주세요.”
쪽지를 본 마법사들은 기함하는 것과 동시에 쪽지의 내용을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의심은 하겠지. 의문도 가질 것이고. 대체로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많아, 한 번 품은 의심과 의문은 해결될 때까지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쪽지에 적힌 내용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움직일 거야.’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마법사들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해서 종국엔 모두를 잡아먹고 말 테니 엘리사는 두 손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그런 엘리사의 간절한 바람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녀가 애타게 찾던 마법사들이 굳게 걸어 잠근 치료소의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치료소 안의 사람들은 열어주지 않으려고 했다. 귀한 전력인 마법사들에게 혹 전염 독이 옮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돌아가십시오, 마법사님! 여기는 위험한 곳입니다!”
“그걸 알고 있으니 열어달라는 겁니다!”
“얼른 문을 여세요! 이게 사실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조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문을 세게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영문 모를 마법사의 행동에 다들 어리둥절하고 있는 가운데 엘리사가 나서서 걸쇠를 풀었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사람들이 당황하며 엘리사를 말리려고 하자, 약제사가 가로막았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기다려주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 있길래……!”
“이러다 마법사들까지 중독되면 책임질 겁니까!”
약제사가 사람들과 싸우는 사이 엘리사는 걸쇠를 전부 풀었다. 걸쇠가 풀리자마자 마법사들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세레나가 고용한 4명의 마법사가 전부 있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데다가 푸른 구슬이 박힌 지팡이를 짚은 마법사가 주변을 쭉 훑어보더니 엘리사에게서 시선을 멈췄다.
“자네군. 우리한테 쪽지와 카펫을 보낸 사람이.”
엘리사는 앞으로 나서서 자기소개하려다 멈칫하며 웃었다.
“어떻게 알아본 거죠?”
“그야 이곳에서 그런 걸 알아낼 수 있는 실력자는 아무리 봐도 자네밖에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으니까. 엘리사는 마법사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러분이 직접 오셨다는 건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는 거죠?”
“그래.”
마법사가 인상을 굳히며 거뭇한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좀 더 확실하게 알아봐야 하니 그 피의 주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겠나.”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엘리사가 마법사들을 전염 독에 중독된 사람들을 모아둔 방으로 안내하려고 하자 의원이 그녀를 말렸다.
“그곳으로 마법사님들을 데리고 가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물론 마법사들도 깔끔하게 의원을 무시했다. 의원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지만, 다들 눈치만 볼 뿐 나서지 않았다.
“여기에요.”
엘리사는 그 환자가 있는 방을 열어 마법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스승님 이건…….”
“……그래.”
스승으로 불린 가장 나이 많은 마법사가 지팡이 끝을 방 안에 넣었다. 그러자 푸른색 구슬 주변으로 요란한 스파크가 튀면서 구슬의 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흑마법이 확실하다. 누군가 사악한 흑마법으로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있어.”
**** 엘리사가 마법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같은 시각, 앙고라 북쪽 영지의 숲속. 칼베른은 약효가 끝나 어려지기 직전, 병사들의 눈을 피해 이 숲으로 들어왔다.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에도 칼베른을 계속 주시하고 있던 에드윈 역시 그를 따라 숲속으로 들어왔다. 칼베른은 숲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어려졌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병사들 앞에서 어려지는 아찔한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다. 칼베른은 갑옷을 벗고 에드윈이 미리 준비해 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칼베른이 벗은 갑옷을 입은 에드윈이 그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칼베른은 제 갑옷을 입고 있는 에드윈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에드윈을 담은 자색 눈동자에 걱정과 불안이 일렁거렸다.
“에드윈, 네가 내 흉내를 낸다고 해서 정말 내가 된 건 아니다. 그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조심해라. 위험한 일엔 나서지 말고, 네 목숨을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진심과 걱정 어린 말에 에드윈이 웃었다. 물론 투구를 쓰고 있어 칼베른은 그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에드윈이 떠나고, 칼베른은 그가 떠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여기 있다가 병사들에게 들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니 어서 영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걸 잘 알고 있지만, 에드윈이과 남은 병사들이 걱정돼서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겠지.’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칼베른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뗐다. 쉬익, 쉬익-.
“…….”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몬스터와 마주한 탓에 멈춰 서야 했다. 뱀처럼 생긴 이 몬스터는 덩치는 크지 않지만, 이빨에 맹독을 품고 있어 조금만 스쳐도 목숨이 위험했다. 불사의 축복을 받은 칼베른은 물려도 죽지 않았지만, 맹독인 만큼 회복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무조건 물리기 전에 죽여야 했다. 칼베른은 몬스터들을 예의주시하며 주변을 크게 둘러봤다.
‘세 마리뿐인가.’
제대로 된 무기가 없지만, 이 정도면 나뭇가지로도 처리할 수 있었다. 칼베른은 단단한 나뭇가지를 꺾어 손에 쥐었다.
평범한 나뭇가지라도 칼베른 정도의 실력자에겐 살벌한 무기가 되는 법이었다. 칼베른이 창처럼 나뭇가지를 던지려는 그때.
“!”
누군가 밧줄로 몸을 꽁꽁 묶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리 움직이려고 노력해도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사아아악-. 경계만 하던 몬스터들은 마치 그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안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