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깨달음, 그리고 각성. (2)2021.09.01.
서걱-. 몬스터를 베어낸 검을 타고 끈적한 초록색 피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몇 마리를 더 베어내니 검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범벅이 됐다. 투구 역시 피가 튀어 엉망진창이었다.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투구를 벗고 털어내고 있는데,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소공작님.”
남자의 정체는 바로 에드윈이었다.
“괜찮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약간의 이상 증상이 있었지만 칼베른은 외면했다. 아직은 물러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반응이 오신다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항상 근처에 있겠습니다.”
“그래.”
칼베른은 다시 투구를 쓰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어느새 많이 기울었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의미였다.
‘해가 뜨기 전에 끝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지금보다 더 많은 희생을 야기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원정대의 절반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걸 막으려면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덤벼드는 몬스터들을 다 죽이는 방법밖에 없으니 칼베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몬스터 무리로 뛰어 들어갔다. **** 엘리사는 살면서 단시간에 이렇게 많은 약을 만드는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마법 약이 아니라서 스탬프로 찍어내듯이 제조할 수 있었다. 지혈제나 평범한 상처약은 비교적 만들기 쉬웠지만, 문제는 해독제였다. 해독제는 만들기 어려울뿐더러, 제조하는 데 오래 걸렸다. 몬스터마다 가지고 있는 독의 성질이 달라서 그에 맞춰 일일이 제조하는 것도 상당히 번거로웠다.
‘마법 해독제를 만들면 일이 좀 줄어들 텐데.’
문제는 마법 해독제를 만들면 이 팔찌를 빼야 한다는 거였다. 엘리사는 팔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팔찌를 내려다봤다. 팔찌를 찬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빼도 금방 마나를 쓸 수 있겠지만, 괜히 팔찌를 뺐다가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웠다. 칼베른도 그걸 걱정해서 엘리사에게 팔찌를 차고 있으라고 한 거였고. 게다가 약제사와 달리 연금술사는 보기 드물어서 엘리사가 연금술사라고 나서는 순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노집사처럼 엘리사가 귀족인 걸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고, 재수가 없으면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인 것까지 들킬 수도 있었다. 여 귀족 중에 연금술사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조금만 수소문하면 엘리사인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엘리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나면 그녀뿐만 아니라 칼베른까지 곤란해졌다.
‘그건 안 돼.’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칼베른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엘리사는 팔찌를 빼지 않기로 했다. 그만큼 더 열심히 움직였지만,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마법약을 만들거나 지원이 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후자는 절대 불가능하니, 남은 건 마법 약을 만드는 것뿐.
“…….”
엘리사는 고민했지만,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니, 엘리사는 결국 팔찌를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팔찌를 빼자마자 심장 주변에 무언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감각. 마나였다. 팔찌를 끼고 있을 땐 무언가 빠진 것처럼 공허했는데, 비로소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혹 빨리 회복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금방 마나가 차올랐다.
“윽.”
그러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자, 엘리사는 심장을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옆에서 약을 만들던 약제사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았다. 주사를 맞는 것처럼 순간 따끔했을 뿐, 지금은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통증은 뭐였을까. 원래 마나가 회복할 땐 그런 통증이 느껴지는 건가? 모르겠다. 마나를 차단했다가 회복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알 턱이 없었다. 이젠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뿐더러,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엘리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가지고 온 가방에서 마나석을 꺼냈다. 혹시 몰라서 가지고 온 게 신의 한 수였다. 엘리사가 마나석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자 약제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연금술사였습니까?”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에게도 제가 연금술사라는 걸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마법약을 쓰면 들키겠지만,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약제사도 엘리사의 마음을 알았는지,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 칼베른이 활약할수록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찬 전쟁터에서 그의 존재는 마치 신과 같았다. 그렇다 보니 병사들은 치열한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무심결에 칼베른을 찾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사람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병사들은 쉽게 그를 찾아냈다. 칼베른이 입은 갑옷이 눈에 띄기도 하거니와 독보적인 검술 실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칼베른은 어릴 때부터 천재라고 불렸을 만큼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거기에 클라우드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검법이 더해지면서 대륙에 감히 그의 검술을 흉내 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물론 어쭙잖게 익혀서 흉내 내는 자들이 몇몇 있었지만, 칼베른처럼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분은 독보적인 존재이시니까.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이끌어준다는 사실에 병사의 가슴이 자부심으로 빵빵하게 차올랐다. 그나마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를 죽인 병사는 본능적으로 칼베른을 찾았다. 아, 저기 있군. 피가 흥건하게 묻었지만, 여전히 번쩍이는 칼베른의 갑옷이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든 검이 바람을 가르며 무자비하게 몬스터를 도륙했다. 그의 검술 실력은 무척 뛰어났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 거지? 병사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를 주시했다. 옆에 있던 동료 병사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단장님이…… 아니야.”
“!”
벼락을 맞은 것처럼 병사가 푸드득, 놀라며 다시 그를 쳐다봤다. 동료의 말대로였다. 저 남자는 칼베른이 아니었다. 칼베른의 갑옷을 입고, 그의 검법을 흉내 내며 그인 척 연기하고 있는 거였다. 저 남자는 누구지? 왜 단장님 흉내를 내는 걸까? 그럼 진짜 단장님은 어디 계신 거지? 병사가 휙,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칼베른은 보이지 않았다.
“단장님이 보이지 않아.”
“단장님은 어디 계시지?”
다른 병사들도 칼베른을 찾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의지할 신을 잃은 어린 양들이 하나둘씩 방황하기 시작했다. **** 엘리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약을 만들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가 만든 마법약이 효과가 없는 게 아니라 환자들이 갑자기 더 늘어난 탓이었다.
“갑자기 부상자가 왜 이렇게 늘어난 거죠? 설마 몬스터들이 더 몰려온 건가요?”
치료소 한쪽에 마련된 약방에 틀어박혀 마법약을 만들다가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엘리사가 묻자 약제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병사들이 방심해서 당했다고 합니다.”
“방심했다고요?”
조금만 한눈을 팔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천만한 전쟁터에서 방심이라니. 황당한 이야기에 엘리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약제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도 처음엔 황당했는데, 병사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게…….”
약제사는 주변을 쓱 살펴보더니, 엘리사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우드 소공작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모양입니다.”
“!”
“게다가 이상한 남자가 소공작님인 척 연기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병사들이 봤다고 하네요.”
약제사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며, 칼베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된다며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저도 걱정이네요.”
엘리사는 약제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 거야.’
아니, 몸이 어려졌으니까 무슨 일이 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간에 확실한 건 칼베른은 무사하다는 거였다. 불사신의 몸을 가진 그가 다치거나 죽었을 리가 없었다.
‘정말 무사한 게 맞을까?’
문득 든 생각에 엘리사는 고개를 크게 저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듯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좋을 건 없었다. 그래, 좋은 생각만 하자. 칼베른이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는 거야. 엘리사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병사들이 봤다던 칼베른의 흉내를 내는 이상한 남자. 그 남자는 에드윈이 틀림없었다. 오스카의 계획대로 칼베른이 어려지자마자 그의 갑옷을 뒤집어쓰고 그인 척 연기했지만, 결국 들킨 모양이다.
“물론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닌 병사들의 이야기입니다. 병사들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렇군요.”
아직 완전히 들킨 건 아니구나. 다행이다. 엘리사는 가슴 깊이 안도했다. 직접 확인한 게 아니라면 병사들이 착각한 거라고 시치미를 잡아뗄 수 있었다. 그런데 칼베른이 사라진 것과 병사들이 방심해서 다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걸까. 엘리사가 약제사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노크도 없이 약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크, 큰일 났어요, 약제사님!”
느닷없는 조수의 방문에 엘리사는 황급히 카펫을 이용해서 마법진을 덮었다. 다행히 마법진을 보지 못했는지 조수는 목청 높여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전염 독이 생겼어요!”
“전염 독이요?”
전염병은 들어봤는데, 전염 독은 뭐란 말인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엘리사는 어리둥절하며 약제사를 쳐다봤다. 약제사도 처음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전염 독이 뭔가요?”
“말 그대로 전염되는 독이에요. 중독된 사람과 접촉한 것만으로도 중독돼서 극심한 근육통에 고열, 그리고 몸에 검은 반점이 생겨요.”
“세상에.”
그런 무서운 독이 존재했다니. 엘리사는 물론 약제사도 기함했다.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해질 거예요. 어서 해독제를 만들어주세요, 약제사님.”
어떤 독인지도 모르는데 해독제를 만들어 달라니.
“그건…….”
터무니없는 요구에 약제사가 안 된다고 말하려고 하자, 엘리사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알았어요. 바로 만들어서 가지고 갈 테니, 먼저 나가 있어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조수가 나가자, 약제사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어떤 독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몰라요.”
“그런데 해독제를 만들겠다고 한 겁니까? 해독제가 통하지 않으려면 어쩌려고요.”
“일반적인 해독제라면 통하지 않겠지만, 제가 만들려는 건 마법 해독제잖아요.”
마법 해독제는 일반 해독제와 달리 여러 종류의 독을 한꺼번에 해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의 정체를 모를 때 유용하게 쓰였다.
“아, 그렇군요!”
그제야 엘리사의 의도를 알아챈 약제사가 손뼉을 짝, 치며 환하게 웃었다.
“연금술사님이 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시름 덜었어요.”
다소 호들갑스러운 행동에 엘리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법진을 가리고 있던 카펫을 걷었다.
“저도 도움이 돼서 기뻐요.”
**** 도움이 돼서 기쁘다고 생각했었는데……. 엘리사는 크게 절망하며 창문 너머로 고열과 근육통으로 괴로워하는 환자를 쳐다봤다. 의문의 전염 독에 걸린 환자였다. 엘리사가 만든 마법 해독제를 먹였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고, 의원이 말했다. 물론 엘리사가 만든 마법 해독제 때문이 아닌 독이 온몸에 퍼진 탓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마치 제 탓인 것처럼 신경이 쓰여 엘리사는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치료소의 상황 역시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전염 독에 중독된 환자는 물론 그 환자와 접촉한 의원, 조수들도 한 곳에 격리한 탓에 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환자는 백 명이 넘어가고, 지금도 환자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데 의원은 고작 2명. 조수는 4명밖에 남지 않았다. 영지민들과 성에서 온 사용인들이 도와주고 있지만, 그들은 의료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옆에서 도와주는 게 전부였다.
“저, 전염 독이에요!”
더 큰 문제는 전염 독에 중독된 환자가 속출한다는 거였다. 환자들과 같이 격리된 사람들은 물론 밖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전염 독에 중독돼서 쓰러졌다. 이대로 있다간 치료소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무고한 영지민들까지 전염 독에 중독될 것 같다고 판단한 관리는 치료소를 폐쇄했다. 치료소에 한 번이라도 들어왔던 사람들은 전부 치료소에 격리됐다. 그 바람에 의원들이 전부 격리돼서 이후에 다쳐서 온 병사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급하게 임시로 지은 병상에 몸을 눕히는 게 고작이었다.
“제발, 제발 의원을 보내주세요!”
“살려주세요! 살고 싶어요!”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는 병사들의 통곡이 걸쇠를 굳게 걸어 잠근 치료소 안까지 전해졌다. 의원들은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울음을 터뜨리는 의원도 있었다. 그런 치료소의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엘리사는 천으로 입을 틀어막고 전염 독에 중독된 환자들을 격리한 방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엘리사를 발견한 조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당장 나오세요! 위험해요!”
“위험해도 피를 뽑아야 해요.”
독은 보통 피를 통해 온몸에 퍼지니, 피를 뽑아 분석하면 어떤 독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럼 해독제도 만들 수 있을 거야.’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뭐든 해야겠다고 생각한 엘리사는 피를 뽑기 위해 가장 상태가 심한 환자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