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남쪽령으로. (14) (119/156)

119화. 남쪽령으로. (14)2021.08.21.

  갑작스러우면서도 황당한 요구에 놀란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지금 당장 이혼하라는 건 아니야.”

세레나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반년, 넉넉잡아 1년 정도 뒤에 해달라는 거지. 그때쯤이면 오스카가 황위를 이어받고, 난 자유의 몸이 될 테니까.”

엘리사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세레나의 말을 곱씹어 생각했다. 그녀가 알기로 황제는 정정했다. 그런데 1년 뒤에 오스카가 황위를 이어받을 거라니. 선위한다는 걸까? 아니, 그것보다 오스카가 황위를 이어받으면 세레나가 자유의 몸이 된다는 말이 더 신경이 쓰였다. 그 말은 설마……?

“황태자 전하와…… 이혼하신다는 건가요?”

“쉿.”

세레나가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목소리가 너무 커. 혹시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 목소리를 낮춰 줬으면 좋겠어.”

“…….”

엘리사는 입을 꾹 다물며, 화려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테라스 창 안쪽을 쳐다봤다. 세레나의 걱정과 달리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방금 한 질문에 대답하자면, 맞아.”

엘리사는 다시 세레나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 시기에 맞춰서 그와 이혼해줬으면 좋겠어.”

추측했던 게 맞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이어진 그녀의 말이었다. 엘리사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 말은 칼과 결혼이라도 하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녀가 한 말을 그대로 해석해서 되물은 건데, 놀랐는지 세레나는 눈을 살짝 찡그렸다가 이내 상냥한 미소를 그리며 웃었다.

“맞아.”

허,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가격한 것처럼 어질어질해서, 엘리사는 머리를 짚으며 난간에 기댔다.

“이런, 많이 놀란 모양이네.”

“……전하께서 제 입장이었어도 놀라셨을 겁니다.”

“그런가.”

세레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렇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턱에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 세레나가 보여줬던 행동과 오스카와 이혼하고 칼베른과 결혼하겠다는 말 등 여러 가지를 복합해보면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칼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푸핫.”

왜 웃는 거지? 영문 모를 행동에 엘리사가 빤히 쳐다보자, 세레나가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네.”

“그 말씀은 아니라는 건가요?”

“단순히 칼베른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맞지만, 그를 남자, 이성으로서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아니야.”

그러니까 칼베른을 사랑하는 건 아니라는 거구나. 다행이다.

“방금 안심했지?”

“!”

쿡,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엘리사가 닭처럼 푸드덕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세레나가 픽, 웃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뭘 그렇게 놀라?”

그러게. 나 왜 이렇게 놀란 거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엘리사는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이런 거로 안심하는 걸 보아하니 역시 그를 좋아하는 모양이네?”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거죠?”

“아니라는 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건 제가 영주님께 묻고 싶은 말인데요.”

엘리사는 난간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세레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영주님이야말로 칼을 좋아하셔서, 그와 결혼하려는 거 아닌가요?”

“아무래도 그대의 머릿속에는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라고 정의되어 있나 보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뭐, 그건 그렇지. 사전에 정의된 의미니까.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세레나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몸담은 사람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그대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칼베른과 결혼한 거잖아.”

엘리사는 아니라고 반박하려고 했으나, 뒤이은 말에 하려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였으니까. 그와 자신 사이에 사랑은 없었다. 서로의 목적을 충족하는 계약만 존재할 뿐.

“이 세계에서 사랑 없이, 서로의 조건만 보고 결혼하는 건 상당히 흔한 일이지. 오히려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을 찾는 게 더 힘들걸?”

“…….”

“그런 의미에서 그대보다 내가 더 칼베른에게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사실인지라 엘리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칼과 결혼하고 싶으셨다면, 황태자 전하가 아닌 그를 선택하셨어야죠. 이미 황태자 전하를 선택하셔놓고, 인제 와서 이러시는 거, 우습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세요?”

엘리사가 또박또박 따지자, 세레나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깜빡였다. 엘리사가 이렇게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엘리사는 세레나의 당황한 얼굴을 봤지만, 전혀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쾌했다. 그 이유를 몰라서 짜증이 나기도 했고.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기분으로 그녀와 더 이야기를 나누면, 그땐 정말 무례를 저지를 것 같아 엘리사는 도망치듯 테라스를 나왔다. 밝은 조명과 맛있는 냄새가 가득한 홀로 돌아온 엘리사는 무의식적으로 칼베른을 찾았다. 그새 어딜 간 건지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아니, 그것보다 난 왜 그를 찾고 있는 걸까. 그에게 딱히 볼일이 있는 것도, 그를 찾는다고 해서 말을 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엘리사는 작게 실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중충한 그녀의 기분과 달리 홀 안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했다. 만찬을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 피었다.

“…….”

그 속에 끼어 있으니 이물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단 걸 먹으면 좀 나으려나. 엘리사는 근처 식탁에 있는 초콜릿을 와그작와그작, 씹어먹었다. ****

“딸꾹-.”

초콜릿에 술이 들어 있는 건지, 먹으면 먹을수록 취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손을 멈출 수가 없는 건, 초콜릿이 굉장히 맛있기 때문이었다. 먹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칼베른과 세레나에 관한 것도 전부 잊을 수 있었다.

“딸꾹, 딸꾹-.”

끝내 산처럼 쌓여 있던 초콜릿 한 접시를 말끔하게 비운 엘리사는 연신 딸꾹질을 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올 때도 혼자 걷지 못해 하녀의 도움을 받았고, 방으로 돌아온 뒤에는 씻어야 한다는 하녀의 말에도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으시겠어요?”

“나중에, 나중에 할래.”

엘리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만사가 귀찮아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옷을 입고 주무시는 건 불편하실 텐데요.”

“괜찮아아…….”

엘리사가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며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자, 하녀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엘리사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한숨 푹 주무시고, 제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하녀가 나가고, 엘리사는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물…….”

그대로 잠이 들었던 엘리사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지독한 갈증 때문이었다.

“자.”

엉거주춤 일어나 협탁 쪽으로 손을 뻗으려는데, 누군가 물컵을 내밀었다.

“고마워.”

당연히 하녀라고 생각한 엘리사는 짤막하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을 마시니 흐릿했던 정신이 조금은 또렷해졌다.

“물 좀 더……!”

왜, 왜, 왜 이 남자가 여기에 있는 거지? 뒤늦게 물을 준 사람이 하녀가 아닌 칼베른이라는 걸 안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물컵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빈 컵이라 컵이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만 났다. 칼베른은 엘리사가 떨어뜨린 컵을 주워 협탁에 올려놓았다.

“조심성이 없군.”

“…….”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설마 술을 마신 건가?”

“……안, 마셨어요.”

“정말인가?”

“!”

칼베른이 얼굴을 확 들이밀면서 목 언저리에 그의 뜨거운 입김이 닿자, 엘리사는 그를 봤을 때보다 더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쿵, 침대 헤드에 부딪힌 등이 약간 욱신거렸지만, 그보다 그의 입김이 닿은 부위가 더 신경 쓰였다.

“뭐, 뭐 하는 거예요?”

“확인.”

놀라서 햄스터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사와 달리 칼베른은 태연하게 대답하며 기울였던 상체를 세웠다.

“술을 안 마셨다는데, 술 냄새가 나니 내 코가 잘못됐나 싶어 확인해 본 거다.”

“다, 당신의 코가 잘못된 건 아니에요.”

엘리사는 그의 입김이 닿았던 부위를 비볐다. 아직도 그의 입김이 남아 있는 것처럼 느낌이 이상했다.

“술은 안 먹었지만, 대신 술이 든 초콜릿을 먹었거든요.”

말하고 보니 그를 놀리고자 말장난을 한 것 같아 약간 민망해서 엘리사는 시선을 길게 내리깔았다. 그녀가 칼베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건, 오랜만에 보는 어른 모습이 어색한 탓도 있었다.

“누가 그대에게 술이 든 초콜릿을 준 거지?”

“누가 준 게 아니라…… 차려놓은 걸 제가 집어먹었는데요.”

“차려놓았다고?”

“네. 홀 테이블에 있던데…….”

“저녁 만찬에 참석한 건가? 그러고 보니 제복을 입고 있군.”

이불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제복을 확인한 칼베른이 눈썹을 찡그렸다. 마치 네가 왜 저녁 만찬에 왔냐는 듯한 눈빛에 순간 울컥한 엘리사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저도 가고 싶어서 간 거 아니에요. 영주님이, 황태자비 전하께서 부르셔서 어쩔 수 없이 간 거라고요.”

세레나를 언급하니 그녀가 테라스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 감정이 더 격해지면서 서러워졌다. 내가 도대체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엘리사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가에 물방울이 아롱아롱 맺히자 칼베른은 당황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울지 마.”

“……당신 때문이에요.”

“그래.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울지 마.”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하기는. 엘리사는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한결 기분이 나아져 그가 준 손수건에 눈물을 쓱, 닦았다.

“이거.”

엘리사가 진정되자 칼베른은 손바닥에 들어갈 만큼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푸른색 보석이 박힌 팔찌가 들어 있었다.

“이건 마나 제어석이네요.”

“바로 알아보는군.”

“연금술사니까요.”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엘리사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칼베른이 팔찌를 집어 들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내가 채워주지.”

“네? 그 말은 저보고 이 팔찌를 끼고 있으라는 건가요?”

“그래.”

“왜요? 혹시 마나 제어석이 마나를 차단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죠?”

“알고 있다. 그래서 끼고 있으라는 거고.”

대답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 엘리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나? 흑마법사가 그대에게 이상한 수작을 부린 것 같다고.”

엘리사는 기억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는 레사 영지와 앙고라 영지에 흑마법사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말 그대로 가정이니 확실하게 방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서 팔찌를 끼라는 거군요.”

“그래.”

엘리사는 칼베른이 들고 있는 팔찌를 쳐다봤다. 저 팔찌를 끼면 흑마법사의 공격을 확실하게 방어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럼 저도 마나를 사용하지 못해요. 즉, 당신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마법 약도 만들지 못한다는 거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마나를 써야 할 때 팔찌를 빼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나를 제어한 후유증으로 팔찌를 빼도 일정 기간 마나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없나요?”

“상관없다.”

칼베른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정말 괜찮아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데요. 가령 정말 필요할 때,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던가.”

“그땐 다른 해결 방법을 찾으면 돼.”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대의 안전이 우선이다.”

단호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전해졌다. 쿵쿵, 기분 좋은 울림이 가슴 속에 응어리진 나쁜 기분들을 썰물처럼 밀어냈다.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대가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난 했으면 좋겠군.”

“……알았어요.”

저렇게 말하는데 어찌 거절할까.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베른은 손수 그녀의 팔목에 팔찌를 끼워 주었다. 팔찌를 차는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지는듯한 느낌이 들면서 약간 어지러워, 엘리사는 머리를 짚었다.

“괜찮나?”

“네.”

“안색이 안 좋은데.”

“마나가 갑자기 차단돼서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엘리사의 허락을 받고 들어온 사람은 세레나의 전속 하녀였다. 그녀는 칼베른과 엘리사에게 각각 인사한 뒤, 칼베른을 보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이 밤에…… 세레나가 칼베른을 찾는다고?

“알았다. 지금 가지.”

안 돼. 싫어. 가지 마. 날 두고…….

“그 여자한테 가지 말아요!”

칼베른의 넓은 등을 끌어안은 엘리사의 애절한 외침이 방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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