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남쪽령으로. (13)2021.08.18.
칼베른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자, 세레나는 귀찮게 됐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곤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엘리사만 혼자 남은 어두컴컴한 복도. 그녀의 눈 밑에 음영이 짙어졌다.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하필 그때 등장하냐.”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세레나가 일부러 그걸 계산하고 말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상한 오해가 쌓이기 전에 해명해야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세레나가 이상한 말을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한 거라고. 사실은 나도 그를…….
“……좋아한다?”
내가 그를, 칼베른 클라우드를 좋아한다고? 이성으로서?
“말도 안 돼.”
칼베른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가족처럼 혹은 아버지를 도와준 은인으로서 그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것뿐이었다. 그래, 그런 것뿐인데……어째서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두려운 걸까. 마치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를 마주한 어떤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 오해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칼베른에게 그를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마법 약을 전해주는 일이었다. 내일 오전 중에 몬스터 토벌 원정대가 이곳, 앙고라 영지에 도착하니 무조건 지금 전해줘야 했다.
“후우……!”
엘리사가 크게 심호흡하며 노크하려는 그때, 뒤에서 불쑥 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손을 거세게 뿌리치고 뒤를 돌아봤다.
“아, 죄송합니다.”
낯선 남자가 두 손을 어깨높이까지 들고 서 있었다. 엘리사는 뒤늦게 이 남자가 마법 약으로 외형을 바꾼 에드윈이라는 걸 깨닫고 바짝 조이고 있던 긴장의 끈을 풀었다.
“예르카라고 이름을 몇 번 불렀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잘못한 건 이쪽이었으니까.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이것 때문에요.”
엘리사가 가지고 온 마법 약을 보여주자 에드윈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오해를 풀기 위해선 직접 전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은 에드윈이 있어서 칼베른과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힘들기도 했고, 자신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울렁이는 마음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부탁할게요.”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 엘리사는 칼베른과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칼베른이 동이 트기도 전에 에드윈과 함께 앙고라 성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약을 먹고 적당한 곳에 숨어 있다가, 어른 모습으로 돌아오면 다시 성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곤 하나,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엘리사는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앓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 어느덧 시곗바늘이 12를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창밖이 소란스러워지자, 탁자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던 엘리사는 일어나 창밖을 쳐다봤다.
“드디어 왔네.”
황실에서 보낸 몬스터 토벌 원정대가 앙고라 성에 도착한 것이다. 마차와 말, 그리고 수백 명의 사람이 들어서 있으니 커다란 마당도 무척 좁아 보였다. 잠시 후. 깃을 세운 재킷에 바지를 입고, 허리춤에 검까지 찬 세레나가 나와 몬스터 토벌 원정대를 환영했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야.”
황태자비가 한 영지의 영주라는 것도 특이했지만, 가장 특이한 건 세레나의 말과 행동이었다. 그녀는 엘리사가 지금까지 본 영애나 귀부인들과 상당히 달랐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했으며 호쾌했다. 엘리사가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자꾸 날 따돌리는 것만 빼면 말이지.”
아. 이상한 말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포함해야지. 창틀에 앉아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레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몰라도 세레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엘리사는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친 뒤, 대답했다.
“들어와요.”
앙고라 성에 도착한 뒤, 엘리사의 전담으로 배치된 하녀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가씨.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무슨 준비를 말하는 거지? 엘리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보자 하녀가 말을 덧붙였다.
“저녁 만찬에 참석하셔야지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전 저녁 만찬에 참석하지 않아요.”
저녁 만찬은 몬스터 토벌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였다. 물론 엘리사가 클라우드 공작부인의 신분으로 이곳에 있다면,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췄겠지만 지금 그녀는 약제사 ‘예르카’였다. 만찬에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다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약 십 여분 후, 방을 나갔던 하녀가 다시 돌아와 공손히 보고했다.
“하녀장님께 물어봤는데, 아가씨께서 저녁 만찬에 참석하는 게 확실하다고 하십니다.”
당연히 착오였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누가 그런 결정을 한 거죠?”
“주인님이십니다.
세레나가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엘리사는 황당함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리 엘리사가 마법 약을 먹고 외형을 바꿨다곤 하나,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 되도록 다른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았다. 그 사람들이 귀족이라면 더더욱. 세레나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저녁 만찬에 참가하라니 황당했다. 그 여자,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아가씨?”
“제가 영주님을 직접 만나야겠어요.”
무슨 생각인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고, 저녁 만찬 참석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애석하게도 세레나는 토벌 준비로 바빠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이러다 세레나의 명령을 어기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하녀를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 엘리사는 어쩔 수 없이 저녁 만찬에 참석하기로 했다. **** 엘리사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쳐다봤다. 마법 약 때문에 외형이 바뀌어 그런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옷 때문이었다. 지금 엘리사는 기사들이나 입을 법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만찬에 참석해야 한다길래 당연히 드레스를 입을 줄 알았는데, 웬걸 하녀가 가지고 온 의상은 이 제복이었다. 빳빳하게 세운 옷깃과 다리를 감싼 부드러운 옷감이 어색했다. 세레나처럼 높게 틀어 묶은 머리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세레나를 따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도 않았다.
“정말로 영주님이 이 차림으로 만찬에 참석하라고 하신 거 맞죠?”
“그럼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하녀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 여자, 무슨 생각인 거지.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이만 가시죠, 아가씨.”
“그래요.”
엘리사는 하녀를 따라 저녁 만찬이 열리는 별관의 홀로 향했다. 내일 당장 몬스터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저녁 만찬이라니. 속 편한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전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이 저녁 만찬은 아주 중요했다. 인생의 마지막 만찬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동료를 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실컷 웃을 기회가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기에 저녁 만찬은 연회 수준으로 성대하게 열렸다.
“…….”
세레나의 결정에 계획에도 없던 저녁 만찬에 반강제적으로 참가하게 된 엘리사는 홀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혹 아는 얼굴이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다가 한두 번 본 것 같은 사람은 몇몇 있었지만, 다행히도 잘 아는 얼굴은 없었다. 즉, 칼베른도 이곳에 없다는 의미. 엘리사는 다시 한번 연회장을 크게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칼베른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온 건가?’
설마 마법 약이 들지 않은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만약 그랬다면 진작 문제가 생겼다고 날 찾아왔겠지.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칼베른의 얼굴을 볼 때까지 안심할 수가 없어 엘리사는 계속 연회장 입구를 쳐다봤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보기 드물게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세레나가 어른이 된 칼베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홀로 들어왔다.
‘그가 왜 저 여자를 에스코트하는 거지?’
이건 미리 듣지 못했는데. 엘리사는 당황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엘리사를 더 당황하게 만드는 건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이야기였다.
“두 분, 잘 어울리시네.”
“그러게. 솔직히 말해서 난 비 전하께서 황태자 전하가 아닌 단장님과 결혼할 줄 알았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두 분, 어렸을 때부터 같이 검술 훈련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셨으니까.”
“그뿐인가. 선대 후작 각하와 공작 각하께서도 두 분이 결혼하길 바라셨잖아.”
칼베른과 세레나가 보통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건 짐작했지만, 설마 집안 간에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간 사이였을 줄이야.
‘그런데 왜 황태자랑 결혼한 걸까.’
공작부인보다 황태자비가 더 높은 신분이긴 하지만, 세레나의 행보를 생각해봤을 때 그것 때문에 오스카와의 결혼을 선택한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정략결혼, 뭐 그런 건가? 칼베른을 좋아하지만, 후작 각하 등 주변에서 황태자비가 되는 걸 선호해 어쩔 수 없이 오스카와 결혼했다던가?
“…….”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시선은 칼베른과 세레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세레나가 손을 까딱이자 칼베른이 살짝 허리를 숙여 키를 맞췄다. 세레나는 칼베른의 귀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고 뭐라 속닥였고,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건지 칼베른이 옅게 웃었다. 지끈-.
“아.”
그 순간, 심장 부근에서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자 엘리사는 눈썹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설고 두려운 정체불명의 감정이 가슴과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 세레나는 앙고라 영주로서, 그리고 황족의 대표로서 몬스터 토벌에 참여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만찬을 즐기라며 잔을 높게 치켜들었다. 사람들은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잔을 높이 들고 건배했다. 엘리사도 건배한 뒤, 잔을 기울였다. 잔에 든 건 알코올이 전혀 없는 음료수였다. 술을 먹으면 다음 날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술을 먹는 건 엄격하게 금지됐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거지. 엘리사는 손부채질하며 얼굴에 몰린 열을 식히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 와중에도 엘리사의 눈동자는 칼베른을 계속 쫓아다녔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키가 훤칠해서 그래도 잘 보였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홀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그를 신경 썼지만, 그는 아니었다. 엘리사가 이곳에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자신이 저녁 만찬에 참석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으니까. 세레나가 칼베른에게 그 사실을 말해준 것 같지도 않았고. 만약 드레스를 입고 왔다면 눈에 띄었겠지만, 제복을 입고 있어 엘리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 속에 스며들었다. 세레나도 이걸 생각하고 제복을 입게 한 게 아닐까? 엘리사는 하녀에게 새 잔을 받아 입가에 기울이며 세레나 쪽을 쳐다봤다. 그녀 역시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칼베른과 달리 세레나는 엘리사 쪽을 한 번씩 쳐다봤다.
“쿨럭.”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우연히 그녀와 눈이 마주친 엘리사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음료수를 잘못 삼켜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뒤통수로 세레나의 시선이 계속 꽂혔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기선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엘리사는 세레나를 피해 테라스로 나갔다.
“하아, 숨 막혀.”
겸사겸사 얼굴에 몰린 열도 식힐 생각이었는데, 테라스로 나가자마자 홀보다 더 후덥지근한 공기가 그녀를 덮쳤다. 지금이 여름인 걸 잠시 잊고 있었어. 엘리사는 그새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남쪽 지방이라 그런지 수도보다 더 더운 것 같았다. 엘리사는 다시 홀로 들어가려다 세레나가 떠올라 그러지 않고 난간에 기대섰다. 조금만, 세레나의 관심이 사라질 때까지만 이곳에 있을 생각이었다.
“여기 있었네.”
그런데 왜 이 여자가 여기에 온 건데. 엘리사는 황당해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세레나를 쳐다봤다.
“한참 찾았잖아.”
세레나는 기탄없이 엘리사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엘리사가 움찔하며 조금 옆으로 비켜섰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맛있는 건 많이 먹었어?”
“네.”
“거짓말. 음료수 말곤 전혀 안 먹던데.”
“……절 보고 계셨던 건가요?”
“뭐, 그렇지? 아무래도 내가 부른 손님이니까 신경이 쓰여서.”
“절 왜 부르신 거죠?”
엘리사는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세레나는 엘리사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눈을 크게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끌어올렸다.
“내가 왜 그랬을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물어본 거고요.”
“이유는 간단해.”
세레나가 난간에 상체를 기대며 산뜻하게 웃었다.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부탁이요?”
“그래.”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람이 세레나의 흐트러진 옷자락을 스치고 엘리사에게 닿았다.
“칼베른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럼 그와 이혼해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