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남쪽령으로. (12) (117/156)

117화. 남쪽령으로. (12)2021.08.14.

에드윈이 세레나의 저택에 온 건 달이 약간 기울어진 늦은 저녁이었다. 그 역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법 약을 먹고 외형을 바꿨다.

“너무하십니다.”

에드윈은 칼베른의 얼굴을 보자마자 불만을 토로했다.

“가시면 가신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지. 그 객실에 갔는데 다른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칼베른이 셔츠 단추를 풀며 무덤덤하게 되물었다.

“네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미리 말을 해주지?”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카운터에 쪽지를 남겨놨을 텐데? 그거 보고 여기 온 거 아닌가?”

“맞습니다. 문제는 그 쪽지를 너무 늦게 발견했다는 거죠. 그전까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돼서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군.”

칼베른은 시니컬하게 대답하며 셔츠를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에드윈은 자연스럽게 옷 시중을 들며 말을 이었다.

“설마 황태자비 전하께서 레사 영지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용병 문제로 레사 영주와 만났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몬스터 토벌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든 용병들이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켰다죠. 어떻게 된 게 용병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문제가 일어나는 건지.”

에드윈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 찼다.

“그런데 의심이 많으신 비전하께서 용케 소공작님이 어려진 걸 믿으셨군요. 왜 어려졌는지 이유는 묻지 않으시던가요?”

“물었지.”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가문의 저주 때문이라고 했다.”

“아아.”

에드윈이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레나도 황족인 만큼 클라우드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일이 복잡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 해결돼서 다행입니다.”

“그러게.”

“내일 앙고라 영지로 가십니까?”

칼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토벌 원정대는 이변이 없는 한 모레 오전 중에 앙고라 영지에 도착할 겁니다.”

“엘리사에게 그 전에 약을 준비해달라고 말해야겠군.”

“부인께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따로 말씀드릴 것도 있고요.”

“아니, 내가 말하지.”

에드윈은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말하는 대신 ‘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에드윈,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주치의에게 연락해서 엘리사가 맡긴 약에 대한 성분 분석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아봐.”

“약이요?”

게다가 성분 분석이라니? 처음 듣는 말에 에드윈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무슨 약이길래 성분 분석까지 하는 겁니까?”

“몰라.”

“네?”

“황녀가 선물로 준 약이라더군.”

마리아가 엘리사에게 약을 선물로 줬다고?

“혹시 그 약, 독약입니까?”

“독약이라면 대놓고 선물이라고 줬을 리가 없지.”

“아, 그건 그렇죠.”

“거기다 약병엔 찌꺼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게 어떻게 선물이 되는 겁니까?”

“나도 그게 의문이다.”

칼베른이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주치의에게 연락하면서 황녀에게도 은밀히 접선해서 그 약의 정체가 뭔지 물어봐.”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나 제어석이 박힌 장신구를 구해와라. 착용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

“흑마법사와 싸울 때 쓰시려고요?”

마나 제어석이 박힌 장신구를 착용하면 마법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단, 그걸 착용한 당사자도 마나를 쓸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칼베른은 마법사나 연금술사가 아니니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줄 거다.”

“부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잔소리를 할 게 분명하니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단호한 명령에 에드윈은 궁금증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흑마법사에 대한 조사는 나와 세레나가 할 테니, 넌 이만 손을 떼고 토벌 원정대 일에만 집중하도록 해.”

“네.”

칼베른이 이만 나가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에드윈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레나였다.

“바빠?”

에드윈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황족에 대한 예를 갖춰 인사하려고 하자 세레나가 손을 내저었다.

“어우, 부담스러우니까 그렇게 인사 안 해도 돼요.”

“알겠습니다.”

에드윈이 즉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자, 세레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아론 경은 여전하군요.”

“전하께서도 여전하십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리고 여기선 전하가 아니라 앙고라 후작 혹은 영주라고 불러줘요.”

“네, 영주님.”

이번에도 에드윈은 즉시 세레나의 말을 따랐고, 그런 에드윈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레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런데 두 사람, 무슨 이야기 나누고 있었어?”

“아무것도.”

칼베른이 대답하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별 건 아니고 흑마법사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흑마법사라면 중요한 이야기 아닌가. 에드윈이 같이 들어야 할지 고민하는데 세레나가 간단하게 정리해주었다.

“아론 경도 있어요.”

“네.”

세레나가 소파에 앉고, 에드윈이 칼베른의 뒤에 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러면 피해가…….”

“몇 명의 희생으로 흑마법사를 잡을 수 있다면…….”

“자칫 흑마법사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날 수도…….”

무거운 이야기인 만큼 분위기가 심각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곗바늘이 12를 지났다.

“너무 늦었네.”

시계를 확인한 세레나가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섰다.

“아침 일찍 앙고라 영지로 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하자. 남은 이야기는 내 성에 가서 하자고.”

칼베른도 시간을 확인하고 잠시 고민했다. 엘리사에게 모레 쓸 마법 약을 만들어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녀도 일정을 알고 있으니 내일 중으로 약을 만들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세레나가 오지 않았다면 아까 말하러 갔을 텐데, 지금 가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아마 자고 있겠지.

“……내 말 듣고 있어?”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던 칼베른은 세레나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쳐다봤다. 에드윈은 그새 나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했었지?”

“무슨 말을 했긴. 그 여자와 계약 결혼한 거냐고 물어봤지.”

“……그래.”

세레나도 클라우드 공작가에 걸린 저주에 대해 알고 있으니, 그 사실을 숨겨봤자 소용없었다.

“처음부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역시 그렇구나. 하긴 네 처지에 사랑 결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알면서 왜…….”

“그렇지만 좋아하지?”

뒤이어 나온 질문에 칼베른이 멈칫하자, 세레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여자를 좋아하는 모양이네. 아,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가.”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네?”

세레나가 얄밉게 웃자, 칼베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등을 밀었다.

“잠깐…….”

달칵, 쾅-. 문이 열리는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찰나의 틈을 두고 연달아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방에서 쫓겨난 세레나는 황당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달칵-. 잠시 후, 철옹성처럼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다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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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베른은 고개만 빼꼼 내밀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세레나에게 경고했다.

“노파심에 미리 경고하는데, 엘리사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

쾅-.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세레나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칼베른은 다시 문을 세게 닫았다.

“허.”

세레나는 몹시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편하게 대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내가 황태자비인데. 뭐, 내가 아닌 다른 황족들에게도 저럴 녀석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진짜로 그 여자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네.”

만약 마음이 없었다면 엘리사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칼베른이 좋아하는 여자라. 세레나는 엘리사를 떠올렸다. 그녀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들꽃 같은 여자였다. 그래서 칼베른이 그 여자에게 끌렸는지도. 그리고 그 여자도 아마…….

“흠, 기름을 좀 부어볼까.”

칼베른은 엘리사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서 정해지는 법이었으니까. 세레나의 입술이 호선을 매끄럽게 그리며 올라갔다. **** 다음날, 이른 아침. 세레나의 저택은 앙고라 영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용인들은 감히 말을 걸기 무서울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녔고, 그건 세레나와 칼베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몬스터들이 진군하는 속도를 봤을 때…….”

“내일 원정대가 도착하면 즉시 전투 준비를 시켜야겠군.”

두 사람이 바쁜 건 몬스터 토벌 때문이었다.

“용병들도 고용해서 투입하려고. 싸울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사공이 너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알아. 그래서 말인데…….”

밥 먹을 때도 온통 몬스터 토벌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번에도 대화에 끼지 못한 엘리사는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으며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과 달리 엘리사는 식사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가 먼저 식사를 끝냈다. 입맛이 없어서 조금 먹은 탓도 있었다. 엘리사가 포크를 내려놓기 무섭게 세레나가 물었다.

“식사 끝났어요?”

“아, 네.”

“그럼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줄래요? 이 녀석이랑 긴히 할 말이 있어서요.”

그냥 내쫓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이겠지.

“네, 그럴게요.”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제 저녁 식사 때, 따돌린 것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던 세레나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엘리사는 순순히 식당을 나왔다. ****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나.’

엘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아침 식사 이후, 세레나는 엘리사가 칼베른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귀신같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갔다. 레사 영지에서 앙고라 영지로 갈 때도 따로 할 말이 있다며, 두 사람이 같은 마차를 탔다. 어쩌다 세 명이 같이 있게 되면, 세레나는 과거, 몬스터 토벌, 황실 같은 엘리사가 대화에 참여하기 힘든 주제로 칼베른과 이야기를 나누며 교묘하게 그녀를 따돌렸다. 너무 교묘해서 왜 따돌리냐고 묻거나 따지면, 엘리사만 예민해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때문에 엘리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며 세레나가 왜 저러는 건지 고민했다. 처음에 사과한 걸 보면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아니지. 그 사이에 악의가 생겼을지도.’

그런데 악의가 생길만한 일이 있나? 엘리사는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럼 왜 저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이유라도 알면 그나마 나을 텐데, 전혀 모르니 몹시 답답했다. 답답해도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엘리사는 일시적이지만 칼베른을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마법 약을 만들어 그의 방으로 향했다. 엘리사의 방은 앙고라 성의 4층 동쪽 끝, 칼베른의 방은 5층 서쪽 끝에 있었다.

‘설마 방 배치도 일부러 이렇게 멀리한 건 아니겠지?’

에이, 그럴 리가. 엘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의심을 털어냈다. 엘리사가 어둠이 내린 긴 복도를 가로질러 칼베른의 방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예르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엘리사는 뒤를 돌아봤다. 세레나가 어둠을 등지고 서 있었다.

“예르카, 여긴 어쩐 일이야?”

예르카가 누구…… 아, 나구나. 내 가명이었지. 엘리사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리고 대답했다.

“동생에게 볼일이 있어서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그렇게 늦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여자, 엄청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네. 물론 평민으로 위장하고 있으니 세레나가 반말하는 게 맞고 저 역시 그러라고 대답했었지만, 그래도 조금 거슬렸다. 거기에 자꾸만 저를 따돌렸던 게 떠올라 엘리사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영주님도 제 동생 보러 오신 거 아닌가요?”

“흐응.”

세레나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눈빛 역시 오묘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질투?”

“네?”

“지금 내가 그를 찾아가서 질투하는 거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엘리사는 헛바람을 찼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야?”

“물론이죠.”

“흐응. 내가 보기엔 맞는 것 같은데.”

이건 뭐 뫼비우스의 띠도 아니고 같은 대답을 몇 번 해야 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아닙니다.”

“그 말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가?”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튀는 거지. 엘리사는 황당했지만, 아니라고 대답하면 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될 것 같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렇다는군.”

왜 내가 아닌 뒤를 보면서 대답을……!

“칼……?”

뒤를 돌아본 곳엔 언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칼베른이 서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등장에 당황해서 굳은 엘리사와 달리 칼베른은 무심하게 그녀를 지나쳐 세레나를 쳐다봤다.

“그녀에게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쓸데없는 말 안 했어. 그냥 객관적인 상황을 물어봤을 뿐이지.”

칼베른은 세레나에게 한소리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엘리사와 다른 인기척이 없는 복도를 쓱, 훑어보곤 말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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