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남쪽령으로. (10) (115/156)

115화. 남쪽령으로. (10)2021.08.07.

“…….”

혼잣말하며 엘리사의 앞을 서성거리던 여자가 멈췄다. 그녀는 뒤로 돌아선 채, 고개만 돌려 엘리사를 내려다 봤다.

“호오.”

입꼬리는 유연하게 올라가 있었지만, 엘리사를 담은 눈동자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날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

스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에 꽂혔다. 엘리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여자는 검을 빼 들고 그녀에게 겨눴다.

“행색을 보아하니 이 근방에 사는 건 아닌 것 같고.”

유일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입꼬리가 일직선을 그렸다. 눈동자가 더욱 형형하게 번뜩였다.

“정체를 밝혀라. 누구길래 내가 황태자비인 걸 알아본 거지?”

그걸 알아본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검까지 들이대는 건지. 엘리사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사실대로 밝히자니, 절대 정체가 탄로 나면 안 된다는 에드윈과 칼베른의 당부가 떠올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보기와 달리 난 인내심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야.”

날카로운 검 끝이 엘리사의 턱 끝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끼쳤다.

“그러니 얼른 정체를 밝히는 게 좋을 거다. 난 사람을 베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나에게 해를 가하려는 놈들은 가차 없이 베거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전하께, 아니 영주님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걸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다.”

높게 묶은 푸른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10초를 주겠다. 그 안에 정체를 밝히지 않거나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한다면, 그땐 널 죽이겠다.”

진심이다. 이 여자, 정말로 날 죽일 생각이야. 엘리사는 떨리는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발끝부터 치고 올라왔다.

“10, 9…….”

어떡하지.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한다고 해도, 그녀가 믿어줄지 의문이었다. 수도에 있어야 할 클라우드 공작부인이 이곳에 있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클라우드 공작부인인 걸 증명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을 텐데, 그조차도 아니니 엘리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5, 4, 3…….”

엘리사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1.”

마침내 황태자비가 마지막 숫자를 읊으며 검을 높게 치켜들자, 엘리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챙-. 그와 동시에 쇠붙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꼭 감았던 눈을 떴다.

“…….”

그러자 황태자비와 검을 맞대고 있는 칼베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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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는 그를 보니 확 안심돼서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

칼베른의 등장이 상당히 갑작스러웠는지, 황태자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내려다 봤다. 눈동자가 빠르게 구르며 칼베른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훑었다.

“뭐지?”

황태자비가 당황했다는 건, 떨리는 목소리에서 확연하게 느껴졌다. 황태자비는 검을 뒤로 빼며 물러났다. 칼베른 역시 검을 아래로 내렸지만, 여전히 황태자비를 경계했다.

“너 뭐야?”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이었지만, 목소리 톤이나 표정은 완전히 달랐다.

“누구길래 그 녀석이 어렸을 때와 똑같은 모습인 거지?”

황태자비가 말하는 그 녀석이 칼베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 머리에 자색 눈동자인 걸 보면 클라우드 공작가의 핏줄인 것 같은데…….”

헉, 그러고 보니 모자를 안 쓰고 있잖아.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엘리사는 당황했지만, 정작 칼베른은 태연했다.

“혹시 그 녀석의 아들인가? 잠깐, 칼베른이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황태자비는 혼자 묻고, 혼자 답하더니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그 아이구나! 칼베른의 먼 친척이라던 꼬마애!”

“…….”

“잠깐. 그 아이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럼 뭐지? 헉, 혹시 진짜 칼베른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는 건……?”

자문자답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시처럼 날카롭던 경계심은 어느덧 사라지고, 호기심만 남아 있었다. 황태자비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한 칼베른은 혼자서 노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엘리사를 돌아봤다.

“괜찮나?”

“아니요. 하나도 안 괜찮아요.”

목덜미는 아직도 검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서늘했고, 심장은 아직도 쿵쿵 뛰었다. 그나마 칼베른을 봐서 많이 진정된 거였다.

“일어설 수 있겠어?”

“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을 뿐, 어디 다치거나 한 건 아…….

“윽.”

……닌 줄 알았는데, 내가 착각한 거였구나. 엘리사는 일어서려는데 발목 부근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지자, 낮게 신음을 뱉으며 다시 주저앉았다. 칼베른이 황급히 엘리사를 부축했다.

“일어설 수 있다고 하더니 거짓말이었군.”

“저도 제가 발목을 다친 줄 몰랐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죠.”

엘리사가 따박따박 대꾸하자 칼베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고 일…….”

일어서라고 말하려던 칼베른은 뒤에서 누군가 손을 뻗자 깜짝 놀라며 황급히 옆으로 피했다.

“와, 다람쥐처럼 빠르네.”

손을 뻗은 사람은 황태자비였다. 그녀는 몹시 흥미롭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칼베른을 요목조목 다시 뜯어봤다.

“아무리 봐도 칼베른이랑 똑같이 생겼단 말이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야.”

“같은 사람입니다.”

“……응?”

“어?”

칼베른의 대답에 황태자비는 물론 엘리사도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정체를 밝혀도 되는 거야? 황태자비도 당황하며 칼베른에게 되물었다.

“지금……뭐라고 했니, 꼬마야? 같은 사람이라고?”

“네.”

“그 말은 네가 칼베른이라는 거야? 허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도 칼베른이 어려졌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땐 저랬었지. 엘리사는 황태자비에게 의문의 동질감을 느꼈다.

“사실입니다.”

“…….”

칼베른이 내가 ‘칼베른 클라우드’가 맞다고 강조하거나 혹은 믿어달라고 애걸복걸하면 의심했을 텐데, 너무 무덤덤하니 오히려 믿음이 갔다.

“정말로 네가…… 아니, 이건 말이 안 돼.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비상식적인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황당하군요.”

“……저 싹수없는 말투를 들어보면 그 녀석이 맞는데.”

황태자비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자, 칼베른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잠시 무례를 저지르는 걸 용서하십시오.”

“무례?”

“세레나.”

“!”

“15년 전에 한 약속을 지금 지켜주길 바란다.”

  ****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는 요란했지만, 마차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끊임없이 변하지 않았다면 마차가 달리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편안한 마차에 타고 있으니, 잡생각이 많아졌다. 엘리사는 마차 벽에 기대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갈팡질팡하던 황태자비, 세레나는 ‘15년 전 약속’이라는 말에 바로 칼베른이 어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뿐일까, 레사 영지에 있는 그녀의 저택으로 가자고 성화였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거절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세레나에게 그의 정체를 밝힌 것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도대체 뭘까. 엘리사는 곰곰이 생각하며 흘끗, 곁눈질로 칼베른을 흘겨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걸렸네. 엘리사는 움찔하면서도 칼베른이 준 기회를 거절하지 않았다.

“어째서 황태자비 전하께 당신의 정체를 순순히 밝힌 거예요? 이러면 우리의 계획이 틀어지잖아요.”

“전혀. 처음부터 그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으니, 달라질 건 없어.”

“처음부터 황태자비 전하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니. 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칼베른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전에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했을 텐데?”

그랬……었나? 칼베른이 저런 거로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그럼 확실히 들었다는 건데 기억을 더듬어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 혹시 전에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말한 건가?’

만약 그렇다면 기억을 못 하는 게 당연했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니까. 칼베른이 그의 작은 손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몸으로 앙고라 영지의 성에서 지내려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정체를 밝히고 그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래서 선뜻 ‘내가 칼베른이다.’라고 밝혔던 거구나. 그런 줄 알았다면 나도 고민하지 않고 공작부인이라고 밝히는 건데. 밝힌다고 해서 세레나가 믿어줄 리가 없으니 그게 그거였지만, 그래도 억울해서 엘리사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궁금한 건 다 물어본 건가?”

“일단은요.”

“그럼 이제 내가 물어보지.”

칼베른의 표정이 약간 심각해졌다.

“왜 그곳에 있었지?”

“저도 몰라요.”

“모른다고?”

엘리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베른이 눈썹을 찡그렸다. 엘리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말로 몰라요. 제가 왜 거기 있었는지, 어떻게 거기 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거든요.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이었어요.”

“정신을 잃었던 건가?”

“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누군가 때린 것처럼 머리가 지독하게 아팠어요.”

칼베른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처음부터 말해 봐. 기억나는 건 전부.”

“음, 그러니까 당신이 저녁 식사를 주문하러 나가고, 전 창문을 열고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어라?”

“왜 그러지?”

“그다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조명이 팍, 꺼진 것처럼 기억이 새카맸다. 창밖에서 누군가를 본 것까진 알겠는데 누굴 봤는지, 그 뒤로 뭘 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카매진 기억을 더듬으며 유일하게 보이는 빛을 향해 달려가자, 자신을 두고 음담패설을 하던 용병들의 얼굴이 보였다.

‘잊자.’

그딴 놈들의 얼굴을 기억해서 뭐해. 정작 기억나야 할 사람은 안 나고 이상한 놈들이 떠오르니 머리가 아파서 엘리사는 인상을 팍 썼다.

“머리가 아픈 모양이지?”

“조금 아프긴 한데, 괜찮아요.”

이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하자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황태자비 전하가 나타나 절 구해주셨죠. 그 뒤는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고요.”

“그렇군.”

칼베른이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그게…….”

똑똑-. 칼베른이 뭐라 말하려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세레나였다. 엘리사는 창문을 열었다.

“이제 곧 저택에 도착하니까, 내릴 준비 해.”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까지야.”

세레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앞서 달려갔다. 엘리사는 창문을 닫고 커튼까지 완벽하게 쳤다. 칼베른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가방을 엘리사에게 내밀며 말했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그래요.”

지금 당장 듣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니 엘리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뒤, 가방을 열어 전에 에드윈에게 받은 보라색 물약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물약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났다. 엘리사는 코를 틀어막고, 약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으, 죽겠다.”

“그런 것치고 잘 먹던데.”

“어쩔 수 없이 먹은 거죠. 억지로요.”

엘리사가 ‘억지’를 강조하자 칼베른이 말없이 웃었다. 엘리사는 거울을 꺼내 제 얼굴을 비췄다. 거울에 비치는 여자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였다.

“마법 약이 잘 들었네요.”

“효과는 일주일 정도인가?”

“네. 약효가 사라진 뒤에는 이틀 정도 쉬어야 해요.”

“알아. 그때 잠시 영지를 떠나 있도록 하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마차가 멈췄다.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칼베른은 후드를 꾹 눌러 쓰는 등 내릴 준비를 했다.

“당신도 그냥 변신 마법 약을 먹는 게 어때요? 그편이 정체를 숨기기 더 편하잖아요.”

“평범한 사람은 그렇겠지만, 난 아니다. 아무리 강한 마법 약을 먹어도 효과가 한 시간도 채 안 가거든.”

“왜요?”

“내가 클라우드 공작가의 핏줄이기 때문이지.”

칼베른은 비소하며 마차 문을 열었다.

“그래도 축복받은 몸이라고, 몸에 들어온 약을 전부 해독하는 모양이야.”

“!”

칼베른의 대답에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엘리사는 마차에서 내리려는 칼베른의 팔을 황급히 잡으며 물었다.

“지금, 몸에 들어온 약을 전부 해독한다고 그랬어요?”

엘리사가 쏘아붙이듯 묻자, 칼베른은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사가 눈동자를 한계까지 키우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당신을 어려지게 만든 정체불명의 마법 약은 어째서 해독하지 못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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