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남쪽령으로. (9)2021.08.04.
엘리사의 기분을 생각한다면 자리를 비켜주는 게 맞지만, 그녀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같이 있는 게 맞았다. 웬만하면 방에만 있을 테니, 위험할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혹시 모를 일이었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야 했기에 칼베른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남는 쪽을 선택했다. 에드윈이 떠나자, 방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엘리사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렸다. 정적이 무거운 돌덩이가 돼서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숨통이 턱턱 막혔다.
‘뭐든 해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저녁을 먹을 때까지 이 어색한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할 일이 떠올라, 엘리사는 탁자 위에 가지고 온 네모난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을 열자 공간 없이 꽉 채운 재료와 도구들이 보였다. 엘리사가 재료와 도구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을 때마다 칼베른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해독약을 만들 재료인가?”
엘리사는 흘끗, 칼베른을 보곤 꺼낸 재료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맞아요.”
“재료가 많이 들어가는군.”
“어떤 재료가 효과가 있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넣는 바람에 그래요.”
대답하는 와중에도 엘리사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안 그래도 공작저로 다시 돌아가면 재료를 하나씩 빼며 어떤 게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보려고요. 그래야 완벽한 해독약을 만들 수 있을 테니까요.”
칼베른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괜히 민폐만 끼치는군. 미안하다.”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을 어려지게 만든 놈이 미안하다고 해야지.”
“반드시 범인을 잡아서 그대에게 사과하게 만들지.”
“범인이 누군지 알고 잡아요?”
“짐작 가는 사람은 있어.”
뜻밖의 대답에 엘리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칼베른이 엘리사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답했다.
“황녀다.”
황녀라면…… 마리아?
“황녀 전하는 칼이 어려진 걸 모르시던데요. 게다가 당신을 어려지게 만들어봤자 황녀 전하한테 이득이 될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황녀, 혹은 내게 마법 약을 먹인 사람의 진짜 목적이 내가 어려지는 게 아니라면?”
“아!”
칼베른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단박에 이해한 엘리사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 마법 약이 어떤 이유로 변질해서 당신이 어려진 것일 수도 있겠네요!”
“바로 그거다. 조사해보니 황녀는 어떤 남자를 하인으로 위장시켜 몰래 황궁에 들였더군. 아마 그 남자가 마법 약을 만든 연금술사일 거다.”
마리아. 연금술사. 마법 약. 엘리사는 자연스럽게 마리아가 준 이상한 유리병을 떠올랐다. 혹시 유리병 안에 들어 있던 잔해가 칼베른에게 먹였던 마법 약인 걸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 보군.”
엘리사의 표정을 읽은 칼베른이 물었다. 어떡한다. 말할까, 말까.
“사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을 선택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칼베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때 그래서 주치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거군.”
“맞아요.”
“왜 바로 말 안 하고 숨겼지?”
이런. 숨겨서 화가 난 모양이네. 엘리사는 서둘러 변명을 늘어놓았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요. 별거 아닌데, 괜히 번거롭게 하고 싶진 않아서 성분 분석 결과를 보고 말하려고 했죠. 솔직히 황녀 전하가 준 게 맞는지도 의심되고요.”
칼베른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미안.”
변명을 듣고도 화가 안 풀린 줄 알았는데, 사과라니. 엘리사는 약간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추궁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렇게 느꼈다면 사과하지.”
아, 추궁한 게 아니었구나. 엘리사는 비로소 안심하며 웃었다.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으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칼베른을 생각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엘리사의 태연한 거짓말에 넘어간 칼베른이 옅게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항상 느끼는 거지만…….
“당신, 웃는 모습은 어른일 때랑 똑같네요. 예뻐요”
“뭐?”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어야 할 내용을 무심코 입 밖으로 꺼내고 말했다.
“…….”
칼베른도 뜻밖의 이야기에 약간 놀라며 시선을 탁자로 내렸다. 고갯짓에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귓불이 붉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엘리사는 자신이 뱉은 말을 수습할 방법을 고민하느라 붉어진 칼베른의 귓불을 보지 못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부드럽게 풀렸던 분위기는 다시 경직됐지만, 처음처럼 딱딱하지는 않았다. 어색하게 가라앉은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칼베른이었다.
“도와줄까?”
“네?”
“이거.”
칼베른이 턱 끝으로 미니 절구를 가리켰다.
“재료들을 가는 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엘리사는 괜찮다고 말하려다, 바꿨다.
“그럼 부탁할게요.”
혼자 해도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도와준다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칼베른도 뭔가 할 일이 있는 게 좋을 테니, 엘리사는 기꺼이 그에게 미니 절구를 넘겼다. **** 부지런히 재료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꼬르륵-. 아침이 밝아오는 걸 알리는 수탉처럼, 엘리사의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며 저녁 시간인 걸 알렸다.
“쿡.”
“…….”
배꼽시계가 울린 것도 창피한데, 칼베른이 웃으니 창피함은 배가 됐다. 엘리사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숙였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칼베른이 절굿공이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카운터에 가서 저녁을 주문하고 오겠다.”
“그건 제가 할게요.”
“됐어.”
“하지만 당신의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요?”
칼베른은 모자를 써서 검은 머리를 감췄다.
“이러면 됐지?”
칼베른의 재빠른 행동에 엘리사는 약간 떨떠름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문하고 오겠다. 되도록 방에서 먹겠지만, 혹시 모르니 홀로 내려올 준비도 하고 있도록 해.”
칼베른이 나가고, 엘리사는 여전히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러나 여름을 품은 바람은 얼굴에 몰린 열기를 제대로 식혀주지 못했다. 손부채질까지 하며 어떻게든 열기를 식히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엘리사의 시야에 누군가 들어왔다. 무더운 여름인데도 두꺼운 후드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인영이 여관 맞은편 골목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쩍고 이상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건지 그냥 휙휙 지나갔다. 엘리사도 신경 쓰지 않고 창문을 닫으려다, 인영이 이쪽을 바라보자 멈칫했다. 인영이 고개를 들자 후드가 약간 뒤로 넘어가면서 붉은 석양 아래 찬란하게 반짝이는 은발이 보였다. 그 밑으로 보이는 은색 눈동자와 앳된 얼굴을 확인한 엘리사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에이지……?”
그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수도에 있는 거 아니었나? 아니, 그것보다 정말 에이지가 맞는 걸까. 제 눈을 의심한 엘리사는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어느새 후드를 완전히 벗은 에이지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따, 라, 와?”
지금 나보고 따라오라는 건가? 왜? 어딜 가려고? 그는 내가 따라오라고 하면 순순히 따라오는 바보라고 생각하는 걸까? 머리는 에이지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몸은 에이지의 말을 따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리 와.]
귓가에 에이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엘리사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졌다.
[이리 와서 나와 우리 일족을 위해 일하도록.]
엘리사는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창틀에 발을 올렸다.
[그래야 우리의 숙원이 해결될 테니까…….]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던 목소리의 잔상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엘리사는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내가 그래서……!”
“와하하!”
1층 홀은 마치 시장통처럼 소란스러웠다.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들은 대부분 용병이었고, 그들은 다른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크게 떠들며 맥주를 마셨다.
‘역시 식사는 방에서 해야겠군.’
시끄러운 건 둘째 치고, 이렇게 용병이 많은 곳에 엘리사를 둘 수는 없었다. 칼베른은 카운터에서 음식을 주문한 뒤,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지만, 직원이 거절했다.
“우리 여관은 방까지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아. 방에서 먹길 원한다면 직접 가지고 가렴. 다 먹은 식기도 직접 반납해야 해.”
귀찮게 됐네. 칼베른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 여관의 규칙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칼베른은 카운터 옆에 서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간단하게 빵과 수프, 그리고 샐러드만 시켰는데 밀린 주문이 많아서 그런지 음식이 나오는 데 제법 오래 걸렸다.
“여기, 가지고 가렴.”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주문한 음식을 받은 칼베른은 쟁반을 들고 객실로 돌아갔다.
“……엘리사?”
그런데 객실에 엘리사가 없었다. 혹시 화장실에 있나 싶어, 화장실도 확인해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늦게 돌아와서 날 찾으러 1층으로 내려간 건가?
‘아니야. 그럼 내가 봤어야 해.’
카운터는 계단 옆에 있었으니까. 만약 엘리사가 계단을 내려왔다면,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의아하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얼른 그녀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칼베른은 황급히 객실을 나섰다. 그가 쓰고 있던 모자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
“아윽, 머리야.”
정신이 드는 것과 동시에 지독한 두통이 찾아왔다. 엘리사는 인상을 팍 쓰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지, 눈앞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렸다.
“아가씨, 괜찮아?”
눈을 연신 깜빡이며 초점을 잡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사는 제게 말을 건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시야가 흐려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엘리사를 보며 쑥덕거렸다.
“안 괜찮아 보이네.”
“이 여자, 약 한 거 아니야?”
“그럼 유흥가 쪽 여잔가 보네.”
“그렇게 안 보이는데.”
“뭘 모르네. 원래 이런 여자가…….”
차마 귀에 담기 더러운 음담패설에 엘리사는 인상을 팍 썼다. 동시에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시야가 확 트이면서 자신을 둘러싼 남자들이 보였다.
‘용병인가.’
허리와 등에 찬 칼이나 입고 있는 옷을 봤을 때, 단순한 거리의 부랑배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 정신이 들었나 보네.”
“아가씨, 일어날 수 있겠어?”
엘리사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야는 트였지만, 여전히 머리는 아파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을 두고 음담패설을 지껄인 상대라면 더더욱 대화하기 싫었다.
“어이, 아가씨. 사람이 말하는데 무시하면 안 되지.”
“그럼, 그럼. 버릇이 없는 아가씨네.”
“우리가 그 버릇을 고쳐줘야겠어.”
도대체 누가 버릇이 없고, 누구의 버릇을 고쳐준다는 건지. 엘리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와, 이제 비웃기까지 하네.”
“이봐, 아가씨. 우리가 무섭지 않은가 봐?”
남자 중 한 명이 발끈하며 엘리사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이거……!”
엘리사가 이거 놓으라고 소리치며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당장 그 손 놔.”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쳐다보니, 말을 탄 한 인영이 보였다. 역광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와 실루엣을 통해 여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
“여, 영주님.”
엘리사는 여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남자들은 봤는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여자가 말에서 내리자 딸랑, 하고 방울 소리가 났다. 여자가 차고 있는 칼집에 달린 방울에서 나는 소리였다.
“남자 여럿이서 여자 한 명을 괴롭히고 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길래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네놈 때문에 쓰러진 건 아니고?”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 하, 하.”
“그럼 저,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들이 부리나케 도망치자, 여자는 콧방귀를 꼈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한심한 놈들 같으니.”
혀를 끌끌 내차던 여자가 엘리사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석양과 대비되는 푸른 머리카락이 눈에 박혔다.
“황태자비 전하께선 어떤 분이세요?”
엘리사는 문득 수도를 나설 때 칼베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어떤 분인지 알아야 나중에 뵙게 되더라도 이상한 실수를 안 하죠. 특히 싫어하는 게 있으시면 꼭 말해주세요.”
“싫어하는 거라.”
그때,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비 전하께서 뭘 싫어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
“뭔데요?”
“푸른색. 특히 비 전하의 머리색과 같은 짙은 푸른색을 쫗아하신다.”
“대답이 없네. 안색도 안 좋고. 의원을 불러와야 하나?”
딸랑, 딸랑-.
“그리고 특이하게도 검집에 방울을 달고 다니시지.”
“황태자비……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