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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남쪽령으로. (8) (113/156)

113화. 남쪽령으로. (8)2021.07.31.

5분 전, 칼베른의 객실. 칼베른은 간단하게 짐을 풀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에드윈과 엘리사가 신경 쓸까 봐 말은 안 했지만, 그 역시 제법 여독이 쌓인 상태였다.

‘고작 이 정도 일정에 지치다니.’

아무래도 몸이 어려지면서 체력도 줄어든 모양이다.

‘이러면 검도 오래 휘두르지 못할 텐데, 큰일이군.’

인간보다 생명력이 몇 배는 강한 몬스터를 상대할 땐 검술 실력만큼이나 체력이 중요했다. ‘카일 브리슈’ 몸으로 몬스터 토벌에 참여할 일은 없지만, 오스카가 따로 내린 명령 때문에 몬스터를 상대해야 했다. 그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이었다.

“목욕물 준비가 다 됐다고 합니다, 도련님.”

밖에서 칼베른의 호칭은 도련님이었다.

“목욕탕에 계시면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래.”

칼베른은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 목욕탕은 계단과 마주 보는 복도 끝에 있었다. 이 작은 여관에 손님이라곤 그들 일행밖에 없으니, 당연히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칼베른은 거침없이 목욕탕 문을 열었다. 드르륵, 오래된 여관이라 그런지 문이 열리는 소리가 굉장히 시끄러웠으나, 칼베른은 신경 쓰지 못했다.

“……!”

엘리사가 속옷만 입은 채,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칼베른은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그건 엘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칼베른이 들이닥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터라, 반쯤 넋이 나간 채 그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

“다, 당장 나가요!”

“!”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잠시 가출했던 이성을 돌아오게 만들기 충분했다. 칼베른은 그 어느 때보다 재빠르게 돌아서며 목욕탕 문을 닫았다. 쾅, 문 닫는 소리가 한적한 복도에 크게 울러 펴졌다. 칼베른이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내려오던 에드윈이 화들짝 놀라며 뛰어 내려올 정도였다. 목욕탕 문 앞에 주저앉아 있는 칼베른의 앞으로 황급히 다가온 에드윈은 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

“도련님.”

몇 번을 불러도 칼베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마치 열이 나는 것처럼 붉었다.

‘뭐지?’

어디 아픈 건 아닐 테고. 이상한 거라도 본 건가? 에드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굳게 닫힌 목욕탕 문으로 향했다. 에드윈이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자, 그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던 칼베른이 번개처럼 그의 손을 낚아챘다.

“열지 마.”

역시 목욕탕 안에 뭔가 있는구나. 에드윈이 그리 생각하며 입을 열려는 찰나.

“어머나, 여기서 뭐 하시는 건가요?”

여관의 주인이 불쑥 등장했다. 에드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 웃으며 일어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에드윈은 귀족 신분을 숨기고 하인인 척, 연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민인 여관 주인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그럼 다행이지만…….”

여관 주인은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칼베른을 흘끗 보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를 뱉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에게 동시에 말했네요.”

“두 사람이요?”

“도련님과 그 약제사 아가씨 말이에요.”

엘리사 역시 클라우드 공작 부인인 걸 숨기고, 평범한 약제사 예르카로 위장했다.

“그 아가씨에게 목욕물 준비가 됐다고 말한 걸 깜빡 잊고, 손님에게도 말했지 뭐예요. 호호.”

아하, 그렇게 된 거군.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에드윈은 안심하면서 픽, 웃으며 칼베른을 내려다봤다. 마침 고개를 든 칼베른과 눈이 정면에서 마주쳤다. 칼베른은 웃음기가 가득한 에드윈의 눈동자를 보더니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그리고 에드윈을 지나쳐 성큼, 계단 쪽으로 걸어가다가 계단을 올라가기 직전, 에드윈을 돌아보며 신신당부했다.

“목욕탕엔……절대 들어가지 마라.”

에드윈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에드윈은 별 의미 없이 웃은 거지만, 칼베른의 눈에는 자신을 비웃은 것처럼 보여 속이 뒤틀렸으나, 뭐라 하는 대신 휙, 돌아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곧바로 그의 객실로 돌아온 칼베른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마른세수했다. 전부 실수였다. 고의는 조금도 없었다. 엘리사가 목욕탕에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특히 엘리사가 자신이 일부러 그랬다고 오해할까 봐 걱정됐다. 나중에 여관 주인한테 엘리사에게도 상황 설명을 해달라고 해야지. 그래야 이상한 오해가 쌓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엘리사가 화를 낸다면…… 받아줘야지. 실수였더라도 그녀의 입장에선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니, 화를 내도 묵묵히 받아주고 용서를 구하는 게 맞았다. **** 칼베른이 엘리사를 다시 본 건 다음 날 새벽, 떠날 준비를 하고 객실을 나왔을 때였다. 좀 더 일찍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엘리사가 저녁도 방에서 먹는 등 객실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칼베른은 직접 엘리사의 객실로 찾아갈까, 싶다가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건 자신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니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됐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됐다.

“…….”

엘리사는 칼베른을 보자마자 고개를 휙, 돌렸다. 누가 봐도 칼베른과 대화하기 싫은 것처럼 보였다.

“엘리사.”

“……밖에선 예르카라고 불러야죠.”

퉁명스럽게라도 대답하는 걸 보니 아예 대화하기 싫은 건 아닌 모양이네. 칼베른은 그 점을 다행으로 여기며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

엘리사가 반쯤 고개를 돌려 칼베른을 내려다 봤다.

“고의는 아니었다. 그대가 목욕탕에 있는 줄 모르고…….”

“알아요.”

“그래, 내가 잘…… 뭐?”

잘못했다고 말하려던 칼베른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알고…… 있다고?”

“네. 여관 주인이 어떻게 된 건지 다 말해줬어요.”

“……그렇군.”

그래도 엘리사의 표정이 안 좋은 건, 아직 화가 많이 났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화를 풀어줘야 하지. 바닥을 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엘리사가 칼베른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돌아섰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저 화난 거 아니에요. 창피한 거지.”

칼베른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엘리사를 올려다 봤다.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도 칼베른이 보고 있다는 걸 아는 듯, 엘리사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기운을 몰아내는 일출 때문일까.

“그래서 이러는 거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아니면 부끄럽기 때문일까. 엘리사의 얼굴이 평소보다 유난히 붉게 보였고, 칼베른은 그 얼굴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들어 손을 뻗었다.

“…….”

하지만 짧은 그의 팔은 엘리사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그 사실이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지는 건지. 칼베른은 뻗었던 손을 거두며 주먹을 꽉 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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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정은 굉장히 순조로웠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는 것 말고, 아무런 방해 요소가 없었던 터라 엘리사 일행은 예정보다 하루 일찍 첫 번째 목적지인 레사 영지에 도착했다. 레사 영지는 앙고라 영지에서 말을 타고 반나절 정도 떨어진 비교적 작은 영지였다. 엘리사 일행은 이곳에서 몬스터 토벌 원정대가 앙고라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며, 그들을 만날 만발의 준비를 끝낼 계획이었다.

“혹시 몬스터 토벌 원정대가 레사 영지에 오는 건 아니겠죠?”

엘리사가 걱정스럽게 묻자 칼베른이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 토벌 원정대는 좀 더 떨어진 카누아 영지에서 하루를 보내고, 곧바로 앙고라 영지에 갈 거다. 그래야 쓸데없는 시간 소모를 줄일 수 있으니까.”

“그럼 다행이고요.”

칼베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레사 영지의 내성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 앞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검문을 받기 위해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군.”

칼베른이 후드를 좀 더 깊게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레사 영지는 소도시급 되는 제법 큰 영지인 데다가, 사람도 많았다. 흑발과 자색 눈동자가 클라우드 공작가의 특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 무조건 조심해야 했다.

“보아하니 대부분 용병인 것 같습니다.”

“앙고라 영지에서 용병을 모집한 건가?”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몬스터 토벌이 코앞이니까요.”

“쓸데없는 짓을.”

칼베른은 혀를 쯧, 차며 말을 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내성에 들어가는 게 오히려 더 눈에 띌 것 같으니, 외성에서 머물도록 하지.”

에드윈은 길게 늘어진 행렬을 쭉 보곤, 대답했다.

“곧바로 여관을 알아보겠습니다.”

  **** 에드윈은 곧바로 외성의 여관을 알아보러 다녔지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내성이 붐비는 것 이상으로 외성이 붐빈다는 거였다. 어떤 이유로 내성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이미 자리를 잡아 내성에 들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용병들로 외성은 북적거렸다.

“죄송하지만 남아 있는 객실이 없습니다.”

“모든 객실이 다 찼습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 여파로 빈방을 찾는 게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에드윈은 두 시간 넘게 돌아다니고, 같은 여관을 몇 번씩이나 확인한 후에야 가까스로 빈방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에드윈이 구한 방은 2인실로, 작은 방에 침대 두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에드윈은 침대 상태나 창문 등 이것저것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엘리사와 칼베른에게 말했다.

“이 방은 두 분이 쓰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아론 경은요?”

“전 방을 좀 더 구해보거나, 정 안 되면 여관 홀에서 밤을 지새우면 됩니다.”

“밤을 지새우면 피곤할 텐데요.”

“하루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 주변과 앙고라 영지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봐야 했는데, 이참에 하도록 하죠.”

“그렇군요.”

엘리사는 대답하며 흘끗, 칼베른을 내려다 봤다. 에드윈이 2인실을 잡았다고 했을 때부터 칼베른과 같은 방을 쓰게 될 거라고 예상했던 터라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칼베른과 같은 방을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고. 그런데 마음이 불편한 건, 며칠 전에 있었던 목욕탕 사건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마음이 불편한 게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고 볼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칼베른과 단둘이 있거나, 그와 대화를 길게 나눠야 할 상황은 최대한 피했다. 하지만 같은 방을 쓰면 단둘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 길게 대화를 나눌 상황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게 걱정됐다. 그때 얼굴을 붉히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말아야 할 텐데.

“…….”

칼베른은 약간 어두워진 엘리사의 표정을 흘끗 보곤, 에드윈에게 말했다.

“조사하는 거라면 나도 같이 가지.”

엘리사가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칼베른은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진 게 자신과 같은 방을 쓰는 게 싫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말했다. 엘리사와 칼베른의 마음을 둘 다 모르는 에드윈이 순진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로도 충분합니다.”

칼베른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평소에는 눈치가 빠르면서 왜 이럴 때는 눈치가 없는 건지.

“따로 할 일도 있으니 같이 가겠다.”

“따로 하실 일이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다.”

그 명령이라면 지금 수행할 수 없을 텐데, 왜 같이 가겠다는 거지? 어리둥절하던 에드윈은 칼베른이 간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돈 엘리사를 보고, 칼베른이 왜 이러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아직도 목욕탕 사건의 앙금이 안 풀린 모양이네.’

칼베른이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여관 주인의 실수로 일어난 사고였다. 그뿐인가. 두 사람은 부부였다. 부부 사이에 맨살 한 번 본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아직 꿍해 있는 건지. 에드윈은 엘리사가 이해가 안 되면서도, 앙고라 영지에 가서도 이러면 어쩌나 걱정됐다.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없으려면 엘리사와 칼베른의 관계가 개선되어야 했다. 아주 사이가 좋아지는 것까진 바라지 않아도, 이렇게 내외하는 분위기를 풍겨선 안 됐다. 그 외에 문제점이 한 가지 더 있기도 했고.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 밤에 둘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화해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 에드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공작님의 눈과 머리카락 색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용병들이 득실거리는 여관에 마님 혼자 둘 수는 없으니 부디 소공작님께서 마님의 곁을 지켜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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