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남쪽령으로. (5)2021.07.21.
엘리사는 흔들리는 마차 벽에 기댄 채, 정원에서 칼베른이 한 말을 되새겼다. 그에게 주기가 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던 그 말. 주기라고 하면 클라우드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때문에 칼베른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수명을 흡수해야 하는 날을 의미했다.
‘그런데 나한테 왜 도망가라고 한 거지?’
난 주기랑 아무 상관이 없는데. 아, 혹시 폭주가 일어나는 건가? 주기가 왔는데 어떤 이유에서 수명을 흡수하지 않으면, 생존 본능에 의해 폭주가 일어난다고 했다.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것이다. 초대 클라우드 공작은 폭주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아내를 제 손으로 죽였다고 했다. 칼베른도 그런 실수를 할까 봐 걱정돼서 도망치라고…….
“……했을 리가 없잖아!”
이 가정이 성립하려면 칼베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어야 했다. 그러니 절대 아니라고,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고 엘리사는 머리에 새겨넣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예를 들어 폭주하면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에게도 해를 가한다던가. 그래, 그런 게 분명했다. 그러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한 거야. 폭주하지 않으려면 주기가 왔을 때, 수명을 흡수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대상은 칼베른이 좋아하거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뿐이었다.
‘보아하니 그 남자가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의 수명을 먹어야 한다는 건데 결혼한 지 5년이나 지난 지금, 칼베른을 좋아하는 여자가 과연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 마리아 황녀가 있긴 하네.’
마리아는 그녀의 결혼 축하 연회에서도 칼베른을 향한 마음을 접지 못해 패악을 부렸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해서 엘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리아를 보면 칼베른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더 있을 것 같지만, 그녀가 워낙 특이한 케이스다 보니 기대하지는 않았다. 칼베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한 것일 터.
“그럼 미리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칼베른은 물론 에드윈도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니 알아서 잘 준비했겠지만, 그래도 걱정됐다. 저택에 돌아가면 대책을 세워뒀는지 물어볼까. 아니야. 주기는 굉장히 민감한 부분인데 괜히 먼저 찌르지 말자. 하지만 궁금한데……. 어찌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덜컹, 흔들리던 마차가 멈춰 섰다.
“마님, 도착했습니다.”
“그래.”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는 연금술사 협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정겨웠다. 카운터를 보고 있던 사라도 엘리사가 반가운지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네요.”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존댓말은 어색했다.
“그러게.”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재료를 사러 왔어.”
칼베른과 함께 앙고라 영지로 가는 게 확실하게 정해진 만큼,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다. 특히 칼베른을 잠시나마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약을 만들 재료는 꼭 챙겨야 했다.
“여기 적힌 걸 전부 줘.”
엘리사는 미리 적어 온 재료 리스트를 사라의 앞에 내려놓았다. 리스트를 살펴본 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늘도 많이 사시네요. 그런데 대부분 해독약과 관련된…….”
“그만.”
엘리사는 사라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려고 하자 황급히 말을 잘랐다. 사라도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걸 빠르게 눈치채고 말을 돌렸다.
“재료들이 워낙 많아서 저 혼자 전부 찾는 건 힘들 것 같은데, 부인께서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나한테 도와달라고?”
“네. 재료 상태가 괜찮은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실 겸 도와주세요.”
그건 그렇지만, 보통 이런 건 같은 연금술사 협회 직원이 했었다. 엘리사는 지금까지 여러 번 재료들을 샀지만, 사라가 재료 찾는 걸 도와달라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라가 힐끗, 엘리사의 뒤에 서 있는 호위 기사들을 보며 재차 부탁했다.
“바쁘지 않다면 제발 도와주세요, 네?”
호위 기사 몰래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보네.
“그래.”
사라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아 엘리사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라가 제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기도 했다. 엘리사와 사라가 재료 창고 쪽으로 걸어가자 자연스럽게 호위 기사들이 따라왔다. 사라는 창고 앞에 도착하자 약간 곤란하다는 듯 호위 기사들을 돌아봤다.
“창고에 직원이 아닌 사람은 한 명 밖에 못 들어가요. 창고가 협소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 번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고요.”
“그럼 한 명만 들어가면 되겠다. 엔트, 네가 따라 들어 와.”
“네, 마님.”
엘리사는 제일 만만한 엔트를 데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는 도서관처럼 진열장들이 일렬로 빼곡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통로는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았다.
“괜히 물건 건드리면 큰일이니까, 엔트는 여기 입구에 서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첫 번째 재료부터 찾으러 가자.”
엘리사는 엔트를 두고 사라와 창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사라는 곁눈질로 계속 엔트를 흘겨보며 거리를 재더니, 이쯤 되면 괜찮다고 판단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틀 전에 웬 여자가 찾아와서 부인에게 이걸 전해달라고 했어요.”
사라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리본이 예쁘게 묶인 상자를 보니 칼베른이 재를 담아주었던 상자가 떠올랐지만, 이건 절대 칼베른이 준 상자가 아니었다.
“누가 이걸 줬다고?”
“어떤 여자요.”
“아는 건 그것뿐이야? 이름이나 다른 건?”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물어봤는데, 이걸 부인에게 전해달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귀부인인 건 알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면서 귀부인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말투나 행동을 보고 알았죠. 평민에게선 볼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던데요.”
“그런 게 있어?”
“그럼요. 지금 부인에게도 느껴져요.”
나에게도 그런 게 느껴진다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엘리사는 볼을 긁적였다.
“하여간 귀부인으로 보이는 웬 여자가 나한테 전해주라면서 이걸 줬다는 거지?”
“맞아요.”
“정체를 밝히지도 않은 수상한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사라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의아해서 묻자 사라가 씩 웃으며 엄지와 검지를 붙이며 동그라미를 그렸다.
“보상으로 이걸 많이 줬거든요.”
“……얼마나 줬는데?”
“백금화 하나요.”
……많긴 하네. 엘리사는 푼돈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지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사라에게 백금화까지 주며 이걸 맡긴 걸 보면, 안에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 같은데 그 귀부인이 수상쩍으니 상자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열었는데 폭발하는 거 아니야?’
엘리사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며 상자를 흔드는 등 살펴봤다. 사라가 그런 엘리사를 약간 한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안에 이상한 물건은 안 들었으니까 안심해도 돼요.”
“열어봤어?”
“열어보진 않았고, 마법 스캔만 해봤어요. 만약 폭발물이 들어있으면 탐지가 됐을 텐데 안 된 걸 봐서 안전한 건 확실해요.”
“그래?”
사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봐서 안심해도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귀부인이 정체를 안 밝힌 것도 수상했고, 사라에게 이걸 부탁했다는 건 더 수상했다. 사라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직접 클라우드 공작저로 가지고 오는 게 더 확실하고 빨랐을 텐데, 이런 선택을 한 이유가 뭘까?
“…….”
“그렇게 걱정되시면 제가 대신 열어볼까요?”
“응? 아, 아니야. 내가 열어볼게.”
일단 안에 든 게 뭔지 확인해보자.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한 뒤,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 든 건 작은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안에는 정체불명의 물약이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아주 조금 들어 있었다.
“이게 뭐지?”
“유리병이네요.”
“그건 나도 알아. 유리병 안에 든 게 뭐냐고.”
“글쎄요. 궁금하시면 열어보세요.”
엘리사가 질색하며 되물었다.
“그러다 독약이면 어쩌려고?”
“독약이라도 먹지 않으면 안 죽을 것 같은데요.”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리고 냄새만으로도 상대의 후각이나 시각을 마비시키는 독도 있어.”
“설마 그런 독을 넣어뒀겠어요? 그것도 이렇게 찔끔?”
확실히 독을 넣어뒀다고 하기엔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그럼 이건 뭐지?’
엘리사는 좀 더 가까이서 확인하기 위해 유리병을 들었다. 그러자 유리병 뒤에 숨겨져 있던 작은 쪽지가 보였다.
“이거 들고 있어 봐.”
엘리사가 유리병을 건네주자 사라는 질겁하며 마치 더러운 물건을 만지는 것처럼 손끝으로 살짝 잡았다.
‘나한테는 괜찮다고 하더니 자기는 무서운가 보네.’
엘리사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사라를 바라보다가 쪽지를 확인했다. [내가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입니다. - 마리아 드 시아페 세르비안느-] **** 시녀는 데아른과 올랜드 공작의 앞에 각각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데아른은 평온한 얼굴로 차를 마셨지만, 올랜드 공작은 몹시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찼다.
“칼베른 클라우드가 정말로 원정대장직을 받아들일 줄이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그 몸으론 원정대장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텐데…… 베짱인 걸까요?”
“베짱일 수도 있고, 뭔가 대책이 있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연회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아, 그 일 말씀이시군요.”
올랜드 공작이 혀를 찼다.
“설마 원래 모습으로 나타날 줄이야. 정말 놀랐습니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중으로 쳐 놓은 덫을 그렇게 빠져나갈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쓸데없이 마리아에게 본래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좀 더 이용할 수 있었을 텐데. 데아른은 그러지 못한 걸 안타까워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보아하니 클라우드 소공작은 원할 때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원정대장직도 받아들인 거겠죠.”
“그럼 카일 브리슈와 칼베른 클라우드가 동일 인물이라는 걸 밝히기 힘들겠군요.”
올랜드 공작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이거야 원, 칼베른 클라우드의 발목을 잡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됐으니 곤란하군요.”
“날개가 아니라 족쇄를 채운 겁니다.”
“족쇄 말입니까?”
“네.”
데아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자고로 전쟁터란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원인을 제대로 밝힐 수 없는 곳이죠. 사람 한 명이 죽어도…… 아무도 우리 탓이라고 생각지 않을 겁니다.”
올랜드 공작의 눈썹이 기울어졌다.
“칼베른 클라우드를…… 죽일 생각입니까?”
“글쎄요.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그는 불사신이니까요.”
“그건…… 그렇죠.”
올랜드 공작이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데아른이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웃었다.
“올랜드 공작, 그런 생각 해 본 적 있습니까?”
그 미소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장이 보기에도 섬뜩해서 올랜드 공작은 약간 떨리는 손을 말아쥐며 담담하게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불사신은 과연 목이 잘려도 살아 있는 걸까.”
“……!”
웃는 얼굴보다 더 섬뜩한 말에 올랜드 공작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하하하.”
올랜드 공작의 놀란 얼굴을 본 데아른은 마치 아주 재미있는 연극을 본 사람처럼 배를 잡고 웃었다.
“…….”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올랜드 공작의 귓불이 약간 붉어졌다.
“미안합니다, 공작.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
“농담이니 놀라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요, 농담입니다.”
정말로 농담이 맞는 걸까. 올랜드 공작은 물어보고 싶었으나,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약간 무서워 묻지 못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벌써 가는 겁니까? 하긴, 계속 이곳에 있다가 오스카가 보면 큰일이니 가는 게 좋겠죠.”
올랜드 공작은 분명 제 입으로 가보겠다고 말했는데, 쫓겨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데아른에게 대놓고 날 쫓아내는거냐고 물어볼 수 없으니, 올랜드 공작은 찝찝한 기분을 삼키며 2황자 궁을 떠났다.
“…….”
데아른은 창틀에 앉아 시가를 피우며 점점 멀어지는 올랜드 공작을 물끄러미 내려다 봤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데아른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안타깝게도 이빨이 빠지면서 패기도 같이 빠진 모양이군.”
후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새하얀 연기가 허공에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이렇게 재미있는 걸 알아보지 못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마리아?”
데아른의 목소리가 커다란 방 안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데아른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아무도 없는 방을 쭉 훑어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그러고 보니 마리아는 더 이상 대답을 못 하지.”
하하, 이거 참. 나도 기억력이 다 됐나 봐. 데아른은 픽 웃으며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은 무차별한 힘에 짓밟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