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남쪽령으로. (4)2021.07.17.
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한 정적만 흘렀다. 다들 황당해하는 가운데, 오스카 혼자만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칼베른은 생각하면 할수록 오스카의 제안이 황당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멀쩡한 황태자의 보좌관들을 내버려 두고 에드윈에게 부탁할 게 있다고 말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아론 남작이라면 자네와 체격이 비슷하니 두꺼운 갑옷을 입어도 들키지 않을 거야.”
오스카의 설명이 이어졌다.
“어제 확인한 바, 내 호위 기사들이랑 대련해도 밀리지 않을 만한 검술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몬스터 토벌도 잘할 테고.”
“대련과 실전은 다릅니다. 그리고 그에게 검술 대련도 시켰습니까?”
“응.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니까.”
에드윈을 대타로 세우기로 이미 마음을 굳혔군. 칼베른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몬스터를 토벌할 땐 갑옷을 입지만, 작전 회의를 할 때나 일상생활에선 벗어야 합니다. 그땐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상생활이야 시중을 드는 하인 빼고 최대한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 돼.”
“그러면 사람들이 의심할 겁니다.”
“그럼 약을 먹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얼굴을 비추면 되지. 작전 회의도 그때하고.”
오스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칼베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몬스터 토벌을 하려면 최소 1년은 잡아야 하는데, 그동안 이 사실을 숨기는 건 무리입니다.”
“그건 여기 있어도 마찬가지지.”
그건……그렇지.
“그리고 자네에게 남쪽령 몬스터 멸족까지 시킬 생각은 없어. 일단 수도를 향해 진격하는 몬스터들을 막으면, 그땐 어떻게든 자네를 수도로 돌아오게 해주겠네.”
“어떻게 말입니까?”
“글쎄.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대책 없는 오스카의 계획에 칼베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더니 오스카도 황제처럼 허황한 계획을 세웠다.
‘황제보다 낫긴 해.’
황제는 아예 불가능한 계획을 세웠지만, 오스카는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거였다. 가능성을 따지면 10퍼센트 정도 될까.
“무리입니다.”
희미한 가능성에 걸고 싶지 않은 칼베른이 눈을 뜨며 단호하게 말했지만, 오스카도 쉬이 물러나지 않았다.
“분명 무리고, 어려운 일이지만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전하.”
“칼베른 클라우드. 이게 마지막 싸움이 될 거다.”
마지막 싸움이라니. 영문 모를 말에 칼베른이 쳐다보자, 오스카는 그들 말곤 아무도 없는 응접실을 쓱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부황 폐하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셔. 주치의의 말로는 올해를 넘기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
“!”
처음 듣는 이야기에 칼베른이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전에 연회장에서 뵀을 땐, 건강해 보이셨는데 어째서…….”
“속이 곪는 거라 겉보기엔 멀쩡해. 부황 폐하께서 멀쩡하게 보이도록 무던히 노력하고 있기도 하고.”
오스카의 얼굴에 약간 그늘이 졌다. 평소 황제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피를 나눈 부친이다 보니 그의 상태가 걱정되는 것이다. 걱정되는 건 칼베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아닌 오스카가 걱정됐다. 오스카가 황태자이긴 하나, 황후와 그녀의 세력이 데아른을 밀고 있어 황제가 갑자기 병사하면 오스카가 무사히 황제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수많은 반대가 있을 거고, 최악의 경우엔 데아른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누가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내가 알기론 나와 주치의뿐이야. 뭐, 황후 쪽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런데도 황후는 절 원정대장으로 추천한 겁니까?”
“그래서 더 추천한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자네를 없애버리려고.”
칼베른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엘리사의 반응부터 살폈다. 다행히 엘리사는 독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크게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제가 ‘카일 브리슈’라는 걸 알고, 그래서 제가 절대 원정대장직을 수행하지 못할 거라고 계산하고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받아들여야지. 그래야 저들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으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전하.”
“알아.”
오스카가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칼베른 클라우드.”
“…….”
“부디 이 싸움에서 내게 승기를 가져다줘.”
이번 싸움이 정말 마지막 싸움이라면, 무모하지만 오스카가 제안한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황후와 데아른이 황위를 가지기 위해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데, 자신이 이 꼴이 됐다는 건 절대 알려서는 안 됐다. 같은 이유로 원정대장직을 받아들였다가 실패했을 때의 위험 부담이 커서 칼베른은 선뜻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데 죄송한데요.”
엘리사가 불쑥 손을 들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지금 황태자 전하의 말씀은 칼이 필요할 때마다 제가 만든 약을 먹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죠?”
“아, 그러고 보니 부인에게도 부탁해야겠네.”
오스카가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엘리사에게 말했다.
“부인, 일단 넉넉하게 약을 15개 정도만 만들어 줘. 그 정도면 두 달은 버티겠지?”
“…….”
“칼베른, 만약 못 버틸 것 같으면 절반 정도 남았을 때 부인이 우편으로 약을…….”
“거절하겠습니다.”
“응?”
엘리사가 거절하자 오스카가 눈을 크게 껌뻑이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칼베른과 에드윈도 약간 놀란 눈치였다.
“지금……뭐라고 했지, 부인? 거절하겠다고?”
“네.”
오스카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일관됐다.
“왜? 혹시 계획이 실패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땐 어쩔 수 없이 황후랑 전면전을 할 생각이니까.”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칼베른이 당황하며 물으려는데, 엘리사의 대답이 더욱 빨랐다.
“제가 거절한 건 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이지?”
“약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만든 마법약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유통……기한?”
“네. 유통기한 안에만 마법약의 효력이 발휘되는데, 그 유통기한은 마법약을 만들고 12시간밖에 안 됩니다.”
“뭐? 무슨 약이 그렇게 짧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약 안에 마나를 가둬둘 수 있는 한계가 12시간밖에 안 되거든요.”
마법 가마솥을 이용하면 유통기한을 좀 더 늘릴 수 있지만, 그래도 사흘이 한계였다. 마법 가마솥도 없었고.
“그러니 마법 약은 미리 만들어 드릴 수 없어요.”
“허.”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하자 오스카는 인상을 쓰며 머리를 짚었다. 칼베른은 마음속으로 측정해둔 가능성을 10퍼센트에서 0퍼센트로 줄였다. 오스카가 세운 계획은 엘리사가 만든 마법약이 없으면 실현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거 참…… 어쩔 수 없네.”
머리를 짚은 채 고민하던 오스카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씩 웃으며 말했다.
“부인도 칼베른과 같이 앙고라 영지로 가는 수밖에.”
“네?”
“전하!”
“황태자 전하!”
엘리사는 물론 칼베른과 에드윈도 당황하며 오스카를 불렀다. 오스카는 그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며 그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절대 안 됩니다.”
칼베른은 그가 출전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는 사람이나 몬스터를 죽이긴커녕 검을 제대로 손에 쥐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출전을 시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출전을 시키는 게 아니라 앙고라 영지까지만 동행하라는 거야. 이를테면 약제사 같은 거로?”
“그것도 안 됩니다. 곧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될 그곳에 그녀를 보낼 수는 없습니다.”
“부인은 현장에 나가지 않고 성안에만 있을 거야.”
“그래도 안 됩니다.”
마치 철옹성처럼 칼베른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자, 오스카는 볼을 긁적이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부인의 뜻도 칼베른의 뜻과 같은가?”
엘리사가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가고 싶진 않습니다.”
“이런.”
오스카는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마법약은 정말로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그럼 다른 연금술사를 데리고 가는 건? 그자에게 제조법을 주고 약을 만들라고 하면 되잖아. 아, 그러면 칼베른이 어려진 걸 들키려나.”
오스카는 자문자답하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 엘리사를 쳐다봤다.
“역시 부인이 칼베른과 함께 그곳에 가는 것밖에 없는데.”
“안 됩니다.”
“거절은 내 쪽에서도 거절하지.”
“전…….”
오스카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일어섰다. 덩달아 칼베른과 엘리사도 일어서자 오스카는 엘리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곳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지만, 부디 나와 클라우드 공작가, 그리고 칼베른과 부인을 위해서 가줬으면 좋겠군.”
**** 오스카를 만나러 가기 전엔, 식사하다가 졸만큼 몹시 졸리고 피곤했다. 하지만 오스카와 칼베른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면서 잠이 확 달아났다. 그래도 침대에 누우면 잠이 올 줄 알았는데 웬걸, 누운 지 한 시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양 이백오십칠 마리…… 에잇.”
그래도 어떻게든 자려고 양까지 셌지만, 결국 잠들지 못한 엘리사는 상체를 벌떡 일으키려다 다시 쓰러지듯 누웠다.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나를 많이 소모해서 몸은 극심한 피로를 호소했지만, 망할 의식은 좀처럼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게 다 황태자 때문이야.”
아니지, 오스카가 그딴 소리를 한 건 몬스터가 갑자기 수도를 향해 진격했기 때문이니까 이건 몬스터 탓인가? 더 근본적으로 따지면 칼베른이 어려진 탓이기도 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칼베른을 어려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엘리사는 진심으로 범인을 잡아다가 속마음을 들어보고 싶었다.
“일단 어떻게 할지부터 결정해야 하는데.”
사실 엘리사가 결정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오스카는 칼베른을 출전시키기로 마음먹었고, 그가 출전하면 엘리사는 약을 제조하기 위해 무조건 따라가야 했다.
“몬스터 토벌이라…….”
엘리사는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천장을 바라보며 몬스터 토벌에 대해 생각했다. 앙고라 영지에 가는 건 그렇게 두렵지 않았다. 오스카의 말대로 약제사로 참전한다면 전선에는 나서지 않을 테니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볼 일은 없을 테니까.
‘문제는 다친 사람들을 치료하는 거지.’
피투성이가 된 그들을 치료할 걸 생각하니 끔찍해서 엘리사는 몸서리를 치며 다시 일어섰다. 여전히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까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더니 허리가 아팠다. 비적비적 방을 나온 엘리사는 정원으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잠이 오겠지.
“어?”
그러려고 했는데,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엘리사?”
바로 칼베른이었다. 엘리사도 그를 보고 놀랐지만, 칼베른 역시 엘리사를 보고 놀라며 벤치에서 일어섰다.
“안 자고 왜 여기 있는 거지?”
“잠이 안 와서요.”
“표정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데.”
“정정할게요. 몸은 피곤해 죽겠는데, 정신이 말짱해요.”
그 이유가 오스카 때문이라는 걸 아는 칼베른이 약간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사과했다.
“미안.”
“칼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저 좀 앉아도 돼요?”
“그, 그래.”
칼베른은 서둘러 옆으로 비켜서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에 깔았다.
“고마워요.”
엘리사는 그 위에 앉아 다리를 쭉 뻗었다. 시원한 저택에 있다가 나오니 약간 덥긴 했지만, 그래도 햇볕을 쬐니 몸도,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칼베른은 말없이 엘리사의 옆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엔 이렇다 할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지만,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
먼저 대화의 장을 연 사람은 칼베른이었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알아서 어떻게 처리하시게요? 설마 당신이 ‘카일 브리슈’라는 걸 공개할 생각은 아니죠?”
정곡이었는지 칼베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지 말아요. 쉬운 길을 두고 왜 어려운 길을 선택하려고 해요?”
“그 길도 쉽지는 않지.”
“정정할게요. 그나마 쉬운 길이죠.”
엘리사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칼베른의 표정은 심각했다.
“나 때문에 자꾸만 그대가 자꾸 힘들어지는 것 같아 면목이 없군.”
“에이, 칼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전부 다 못된 놈들의 함정에 빠져서 그런 건데 괜찮아요.”
“…….”
“나중에 이것보다 더 큰 위기가 찾아왔을 땐, 어쩌려고 벌써 그런 얼굴이에요? 표정 좀 풀어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칼베른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짙어진 것 같았다. 얼어붙어 있던 자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칼?”
“…….”
“왜 그래요?”
뒤늦게 칼베른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안 엘리사가 그의 어깨를 잡으려고 하자, 칼베른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몇 발 뒤로 물러서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엘리사, 내게 주기가 온다면…… 그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