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남쪽령으로. (2) (107/156)

107화. 남쪽령으로. (2)2021.07.10.

  몬스터가 무리를 지어 수도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곧바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오스카는 물론 데아른도 회의에 참석했다. 올랜드 공작과 각 부서의 장관들도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칼베른도 참석하고 싶었으나, ‘카일 브리슈’의 몸으론 참석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엘리사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에드윈은 오스카를 보좌하면서 긴급회의가 끝나자마자 신속하게 칼베른에게 상황 보고를 하기 위해, 황궁에 남아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내내 칼베른의 표정과 분위기는 상당히 심각했다. 저택에 도착했는데도 도착했다고 말을 꺼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말해야지.’

언제까지 마차에 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엘리사.”

“까, 깜짝이야.”

언제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재고 있던 엘리사는 칼베른이 불쑥 제 이름을 부르자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뭘 그렇게 놀라지?”

“칼이 제 입장이라도 놀랐을걸요.”

“그러니까 왜?”

“……아무것도 아니에요.”

엘리사는 전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칼베른을 이해시킬 자신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전 왜 불렀어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저한테 부탁하고 싶은 거요? 뭔데요?”

“날 원래대로 되돌려주는 약을 만들어줬으면 한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건 내심 그가 이런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돼요.”

엘리사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칼베른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가 거절할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이유는 제가 물어보고 싶은데요. 갑자기 왜 약이 필요하다는 거죠?”

“긴급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모습으로는 갈 수 없으니까.”

역시. 예상했던 이유였기에 엘리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거절한 이유를 말했다.

“약을 만드는 데 못해도 3시간에서 4시간은 걸려요.”

이것도 전에 쓰다 남은 재료가 있어서 이 정도지, 만약 재료 준비부터 해야 했다면 한나절은 걸렸다.

“회의가 아무리 길어도 그때쯤이면 마무리가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칼베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부정하지 않았다.

“뭐, 정말 예외적으로 그때까지 회의가 끝나지 않았다고 해도 칼이 바로 회의에 참석하는 건 무리예요. 당신도 알다시피 약 효과는 먹고 한참 뒤에 나타나니까요.”

칼베른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바로 나타날지도 모르잖아.”

어른 모습이었다면 억지를 부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겠지만, 어리니 귀여웠다. 엘리사는 새삼 외모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되물었다.

“만약 바로 나타나지 않으면요?”

“…….”

할 말을 잃은 칼베른이 입을 다물었다.

“모든 약에는 내성이라는 게 존재해요. 제가 만든 마법 약도 예외는 아니죠.”

엘리사가 팔짱을 끼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함부로 남용했다가 정작 필요한 순간엔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서 낭패를 볼지도 몰라요. 가령 공작위 계승식 같은 거요.”

그때까지 해독제가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리며 계산해봐도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마법 가마솥만 있었어도 어떻게든 시도해봤을 텐데.’

엘리사는 새삼 마법 가마솥을 훔쳐간 에이지가 미워졌다.

“공작위 계승식을 더 미룰 수 없는 만큼 그땐 무조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니, 이런 일은 답답하더라도 참으세요.”

  **** 칼베른을 설득하고 저택으로 들어온 엘리사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마자 연구실에 틀어박혀 마법진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오전에 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귀족 회의에 참석하느라 몹시 피곤했지만, 쉴 시간은 없었다. 얼른 마법진을 완성해야 했다. 마법진을 그릴 땐 마나뿐만 아니라 고도의 집중력도 필요했다. 선 하나라도 잘못 그으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니, 절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 됐다. 그런 이유로 엘리사는 작업할 때, 문손잡이에 [절대 방해 금지 – 노크도 안 됨.]이라는 커다란 팻말을 달아두었다. 엘리사에게 물어볼 게 있어 연구실 앞까지 찾아왔던 솔레이도 그걸 보고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데다가,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까지 더해져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됐다.

“으, 죽겠다.”

그 집중력이 바닥이 나면서, 계속 숙이고 있던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자 엘리사는 허리를 통통 두드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9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9시밖에 안 됐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의아해하며 커튼을 걷은 엘리사는 어르스름한 새벽녘의 기운이 만연한 정원을 보고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가 봤던 시곗바늘은 시침이 아니라 분침이었다. 시침은 5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후 9시가 아니라 오전 5시 45분이었다.

“이런. 밤을 지새웠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밤을 지새울 생각은 없었는데, 집중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다.

“하암.”

엘리사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약간 무거운 눈을 비볐다. 밤을 지새운 데다가 마나를 잔뜩 소모해서 무척 피곤했다. 그래도 조금씩 형태를 보이는 마법진을 보니 뿌듯했다.

‘조금만 더 할까.’

어차피 곧 아침 식사 시간이니, 그때까지만 작업하다가 아침 먹고 자러 가야지. 그 전에 긴급회의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아보고. 아무리 방해하지 말라고 팻말을 걸어놨어도, 큰일이 터졌다면 당장 말하러 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태 잠잠하다는 건 큰일이 터진 건 아니라는 의미이니 엘리사는 안심하며 다시 쭈그려 앉아 마법진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노크하지 말라고 팻말까지 걸어놨는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엘리사는 눈꼬리를 홱 치켜들며 문을 쳐다봤다.

“부인.”

아, 칼베른이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던 눈꼬리가 슬금슬금 제자리로 내려왔다.

“들어와요.”

칼베른은 문을 열었지만, 안으론 들어오지 않고 입구에서 말했다.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됐다고 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엘리사는 시침 바늘이 7에 있는 걸 확인하고 일어섰다. 계속 쭈그려 앉아 있었더니 몸을 움직일 때마다 관절들이 우두둑, 비명을 질렀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래, 지금 내려갈게.”

칼베른이 존댓말을 쓴다는 건 듣는 귀가 있다는 의미이니 엘리사도 상황에 맞게 말을 놓았다. **** 식당으로 내려온 엘리사와 칼베른이 각자 자리에 앉자, 하녀가 따뜻하게 데운 수프를 두고 나갔다. 식당에 남은 사람은 칼베른과 엘리사, 그리고 헤리엇뿐이었다. 엘리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를 빤히 쳐다봤다. 피곤하니 딱히 식욕도 들지 않았다. 눈꺼풀도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머릿속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칼베른을 보면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게 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얼른 먹고 가서 자야겠네.’

엘리사는 얼른 먹어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수프를 크게 한술 떴다. 쨍그랑-.

“……?”

그러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엘리사는 당연히 칼베른이 식기를 떨어뜨린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쳐다봤는데, 이상하게도 칼베른 역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헤리엇이 자신의 앞에 새 스푼을 내려놓는다는 거였다.

“스푼이 있는데 또 왜…… 어?”

내가 쥐고 있던 스푼이 어디 갔지? 엘리사는 뒤늦게 스푼이 사라진 걸 눈치채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프를 흩뿌리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스푼을 발견했다.

“스푼이 왜 저기에…….”

“그대가 떨어뜨렸다.

“제가……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 엘리사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되묻자, 칼베른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저 눈빛이나, 떨어진 스푼의 위치를 봤을 때 자신이 떨어뜨린 게 확실한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스푼을 크게 뜬 순간부터 기억이 없었다. 설마 나…….

“깜빡 졸았나 보군.”

칼베른이 간단명료하게 엘리사가 어떤 상태였는지 말해주었다. 밥 먹다가 졸다니. 머쓱해진 엘리사는 밤을 새우는 바람에 약간 거칠어진 뺨을 쓸었다.

“밤을 지새운 건가?”

“네. 마법진을 그리는 데 집중하다 보니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그만…….”

엘리사가 변명하자 칼베른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전하가 하신 말씀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하신 말씀이니까.”

오스카가 한 말? 아, 얼른 해독제를 만들라고 재촉한 거 말하는구나.

“그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영향이 아예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이유는 콩 한 쪽만큼 작았다. 엘리사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건 순전히 그녀의 의지였다. 칼베른을 얼른 원래대로 되돌리고 싶다는 의지.

“오늘은 연구실에 가지 말고 푹 쉬어. 잠도 보충하고.”

“그럴 수는 없어요. 얼른 마법진을 완성해야 다음 작업을 한다고요.”

“천천히 해도 돼.”

“어떻게 천천히 해요. 칼이 얼른 원래대로 돌아가야 전처럼 2황자나 올랜드 공작이 우리를 공격해도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거 아니에요.”

칼베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새삼 마리아의 결혼 축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인상을 쓴 거지만, 엘리사의 눈에는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것처럼 보였다.

“충분히 몸 생각하면서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칼베른이 코웃음을 쳤다.

“안색이 어두운데 충분히 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이건 잠을 못 자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잠을 충분히 자라는 거다. 또 밤을 지새우지 말고.”

“알았어요. 충분히 잘게요.”

충분히, 라는 건 개인마다 기준치가 달랐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부족하다고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우길 생각이었다.

“헤리엇. 엘리사의 연구실에 자물쇠를 채우고, 저녁 9시부터 아침 9시까진 절대 그녀에게 열쇠를 주지 마라.”

그런 엘리사의 속셈을 눈치챈 칼베른이 엄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

헤리엇은 고개 숙여 대답했고,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12시간이나 문을 잠그면 전 어떡해요?”

“어떡하긴. 그동안 잠을 자고 쉬면 되지.”

“그래도 12시간은 너무 길어요!”

“안 길어. 그 정도는 쉬는 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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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미한 실랑이의 연속이었다. 엘리사는 칼베른이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자 욱하는 마음에 소리쳤다.

“제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요!”

“…….”

칼베른의 얼굴이 굳으면서 식당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아, 그게, 그러니까…….”

뒤늦게 자신이 너무했다는 걸 깨달은 엘리사가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입을 여는 찰나.

“알아.”

칼베른이 의자에서 내려오며 말했다.

“그대가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알아.”

자색 눈동자는 엘리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더욱 그대가 몸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나 때문에 그대가 아픈 건 보고 싶지 않거든.”

끄응. 저렇게 말하니까 더욱 양심에 찔리는데. 엘리사는 양심상 칼베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저녁 9시부터 아침 9시까진 연구실에 가지 말고 쉬어.”

“……알았어요.”

엘리사는 말실수한 것도 있고, 자신이 그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을 생각해서 그런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기회 봐서 열쇠를 슬쩍 복사해야겠다는 시커먼 꿍꿍이를 마음속 깊은 곳에 품으며. **** 이번엔 헤리엇이 엘리사의 시커먼 꿍꿍이를 읽었는지, 그는 평범한 자물쇠가 아닌 마법 자물쇠로 연구실의 문을 잠갔다. 마법 자물쇠는 열쇠에도 마법이 걸려 있으므로 복제가 아예 불가능했다.

‘이러면 열쇠를 몰래 훔치는 방법밖에 없나.’

그런데 열쇠를 어떻게 훔치지? 사실 훔쳐도 십중팔구 헤리엇에게 들킬 테고, 그러면 칼베른도 그 사실을 알게 될 테니 문제가 생겼다. 그럼 어떡한다. 자물쇠를 부셔야 하나? 그런 다음, 내가 안 부순 척 연기할까? 엘리사가 마법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모습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본 칼베른이 말했다.

“혹시 자물쇠를 부술 생각이라면 접어. 그 자물쇠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열리면 즉시 내 방으로 신호가 오게 되어 있으니까.”

“…….”

엘리사는 기껏 떠올린 방법이 소용없다는 것보다, 칼베른이 제 마음을 읽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며 그를 내려다봤다. 신호가 경비실이 아닌 그의 방으로 간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 와중에도 엘리사의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 내려앉고 있었다. 칼베른이 한숨을 내쉬며 엘리사의 등을 떠밀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방에 가서 자.”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지금은 너무 피곤해서 마법진을 그리라고 등을 떠밀어도 그럴 수가 없는 터라 엘리사는 순순히 돌아섰다. 그렇게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헤리엇이 황급히 다가와 보고했다.

“마님, 아론 남작님과 오웬 자작님께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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