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남쪽령으로 (1)2021.07.07.
평생 칼베른의 부인으로서, 클라우드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살아가기로 했지만 당장 안주인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칼베른의 대리직만 해도 벅찬데, 그를 원래대로 되돌릴 약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해서 엘리사는 어쩔 수 없이 솔레이에게 계속 안주인 역할을 맡겨두기로 했다.
‘그래도 미리 말해둬야겠지.’
언젠가 그만둬야 한다고.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말해두는 편이 그녀도 마음의 준비를 할 테니 엘리사는 솔레이를 불렀다. 그런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솔레이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아, 그 이야기라면 아론 남작에게 이미 들었어요. 소공작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만, 부인을 대신해서 일해달라고 말이죠.”
벌써 말했다니. 아직 아침 10시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인데, 상당히 빨랐다.
‘하긴 새벽에 그 제자를 심문해서 얻은 정보도 아침 해가 밝자마자 바로 나한테 와서 말해줬지.’
그러고 보니 에드윈이 추궁해서 얻어낸 정보가 정말인지 칼베른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봐야 하는데, 크라임을 배웅하느라 잊고 있었다.
‘솔레이 양을 보내고 바로 가서 물어봐야겠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상대가 보낸 편지에 적힌 대로 행동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에드윈이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그 제자가 거짓말을 한 게 틀림없었다.
“참, 새벽에 있었던 일을 들었어요.”
솔레이가 혀를 끌끌 내찼다.
“세상에 미친놈이 많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그런 미친놈은 또 처음이네요.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보낸 편지대로 행동하다니.”
“그 이야기도 들었어요?”
“네. 아론 남작이 말해주던데요.”
저렇게 막 말해도 되는 건가. 약간 걱정됐지만, 에드윈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넘겼다.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기도 했고.
“솔레이 양은 그 제자가 정말로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보낸 편지대로 행동했다고 생각해요?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보통 때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론 남작이 직접 심문해서 알아낸 정보잖아요. 그럼 진짜예요.”
‘진짜일 거예요’가 아닌 ‘진짜예요.’라고?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건가요?”
칼베른이야 에드윈을 믿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솔레이까지 이러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
엘리사의 질문에 되레 솔레이가 더 놀라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혹시 부인, 아론 남작이 과거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세요?”
“몰라요.”
“아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솔레이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하여간 아론 남작만큼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은 없으니, 믿으셔도 돼요.”
**** 솔레이는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저렇게 말하는데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나중에 칼베른이나 에드윈을 만나면 물어봐야지.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일에 치이고, 새로 산 가마솥에 마나를 부여하느라 신경 쓰다 보니 그 사실을 새카맣게 잊었다.
“아!”
그랬던 그녀가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린 건 다음 날 오전, 칼베른에게 보고를 마치고 1층 홀로 내려온 에드윈을 발견했을 때였다. 또 잊으면 안 되니까 떠오른 김에, 그리고 에드윈을 발견한 김에 물어봐야지.
“아론 경, 바빠요?”
“아닙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궁금한 게 있어서요.”
에드윈이 물어보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보좌관이 되기 전에 무슨 일 했어요?”
“간수였습니다.”
“간수요?”
“네. 주로 죄인을 심문해서 자백을 받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아, 그래서 솔레이 양이 그런 말을 한 거였나. 엘리사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아직 의문이 남아 있긴 했다.
“간수 일을 엄청 잘했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솔레이 양이 말하길 아론 경만큼 심문하는 일을 완벽하게 잘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믿으라고 했거든요. 일을 잘해서 그런 말이 나온 거 아닌가요?”
“아아.”
에드윈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하긴 했죠. 죄인에게 자백을 받아낸 확률이 백 퍼센트였으니까요.”
“……백 퍼센트요?”
그 말은 담당한 모든 죄인에게 자백을 받아냈다는 의미가 아니던가.
“그게 가능해요?”
“저는 가능했습니다.”
와, 어쩜 저리도 대답을 한치의 고민도 없이 자신감 넘치게 할 수 있는거지. 하여간 에드윈의 말이 사실이라면, 솔레이가 그의 말을 믿어도 된다고 말한 게 이해가 됐다.
‘정말 사실이라면 말이지.’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문득 의심이 들자 엘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이 뭣 하러 이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하겠는가. 이게 다 거짓 이중장부 때문에 의심병이 도진 탓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좌관이 된 거예요?”
간수랑 보좌관은 전혀 연관이 없는데? 궁금해서 묻자 에드윈이 턱을 치켜들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제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은 소공작님께서 직접 절 스카우트하러 오셨습니다.”
에드윈이 정말 일을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재수 없었다. **** 새로 산 가마솥은 엘리사의 집무실 옆에 마련된 연구실로 옮겨졌다. 엘리사는 가마솥을 연구실 중앙에 두고, 가마솥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마법진을 그렸다. 낙서하듯이 그냥 그리는 게 아닌 선 하나하나에 마나를 부여해야 해서 마법진을 그리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다. 거기에 가마솥에 마나를 부여하는 등 칼베른을 원래대로 돌릴 약을 만드는 준비를 하는 데만 짧으면 3주, 길게 잡으면 한 달에서 그 이상이었다. 문제는 이게 준비 과정이라는 거였다. 준비가 끝나도 해독약을 만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칼베른을 일시적으로 되돌리는 약을 찾긴 했지만, 그게 언제까지 통할지도 의문이니 얼른 해독약을 만들어야 했다.
‘얼른 만들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엘리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원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황실 외궁에 위치한 귀족 회의장으로, 오늘은 2주에 한 번 있는 비공식 귀족 회의 날이었다. 비공식 귀족 회의는 말 그대로 비공식이라서 같은 계파 귀족들만 모였다. 예를 들면 지금 이 귀족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황태자인 오스카를 미는 귀족들이었다. 이 계파의 수장은 클라우드 공작이었다가 그가 죽으면서 칼베른으로 변경됐는데, 그 칼베른이 현재 부재중이니 엘리사가 대리로 참가했다. 비공식 회의인 만큼 꼭 참가할 필요가 없었지만, 같은 계파 귀족들이 한 번 흔들린 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칼베른은 엘리사를 대리인으로 보냈다.
“전 정치는 아무것도 모르는 데 가도 괜찮을까요?”
괜히 갔다가 민폐만 끼치는 건 아닌지, 엘리사가 걱정하자 칼베른이 다독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에드윈이 동석할 거고, 만약 공작가의 의견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그가 대신 말해줄 거다. 그대는 자리만 지켰다가 오면 돼.”
그 자리를 비키는 게 부담스러운 건데……. 어둡게 가라앉은 엘리사의 표정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자 칼베른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가기 싫다면 안 가도 좋아.”
어째서일까. 차오르는 긴장감에 쿵쾅거리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엘리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공작부인으로서 살다 보면 소공작님, 아니 칼을 대신해서 나설 일이 종종 있을 텐데, 그때마다 피할 수는 없으니 연습하는 셈 치고 나가볼게요.”
엘리사의 말에 칼베른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그땐 귀족 회의에 참석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칼베른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했다. 특히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기묘했다. 뭔가 슬퍼 보이면서도 혼란스러운 것 같은 표정이라고나 할까.
“……부인.”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봤던 걸까. 엘리사는 잉크가 묻지 않은 깃펜을 괜히 종이 위에 끄적이며 고민했다. 예전에는 칼베른이 어떤 표정을 하든 간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은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와 같은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을 바꿨기 때문일까.
“……소공작 부인!”
“!”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엘리사는 귀를 강타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텅 빈 의자들이 보였다. 방금까지 귀족들이 앉아서 열띤 토론을 나누고 있었는데 다들 어디 간 거지? 엘리사가 의아해하며 빈자리를 쳐다보자 에드윈이 혀를 찼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셨길래 다른 사람들이 전부 다 나가도, 제가 불러도 반응이 없으셨던 겁니까?”
“다 나갔어요? 왜요?”
“그야 회의가 끝났으니까요.”
아, 벌써 회의가 끝났구나. 이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엘리사가 멋쩍게 웃으며 일어섰다. 곧바로 회의장을 나온 엘리사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으니.
“부인.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바로 오스카의 전속 시종이었다. 엘리사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황태자가 부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에드윈과 함께 황태자의 궁으로 향했다.
“어서 와, 소공작 부인.”
오스카는 응접실에서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칼베른과 함께.
‘언제 온 거지?’
황궁에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엘리사는 칼베른을 쳐다보며 그의 옆에 앉았다.
“내가 불렀어.”
엘리사의 의문을 풀어준 사람은 오스카였다.
“이래저래 할 말이 있어서.”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데요?”
“부인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요 몇 년 동안 제국의 남쪽령에서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잖아. 오늘 귀족 회의에서도 그 일이 회자했고.”
그랬었나. 엘리사는 회의 내내 딴생각하느라, 저 주제가 정말 회자가 됐는지 모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남쪽령 귀족들이 용병을 고용하는 등 알아서 해결했지만, 슬슬 한계인지 황실에 도움을 요청했어. 몬스터 토벌 원정대를 보내 달라고 말이지.”
“그 말씀은 소공작님이 출정해야 한다는 건가요?”
엘리사가 깜짝 놀라며 묻자 오스카가 고개를 저었다.
“원칙대로라면 그래야 하지만, 일단 부황 폐하를 설득해서 이번 몬스터 토벌 원정대는 다른 사람이 이끄는 거로 해뒀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지난 100년간, 몬스터 토벌 원정대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일원이 원정대장이 되어 이끌었다. 그런데 갑자기 원정대장을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쉽지 않았지.”
오스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내 벗이 이 상태니 어떻게든 설득했어.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진 패를 하나 내놓아야 했지만.”
“가진 패요?”
“음. 말해도 되려나.”
오스카가 고민하자, 칼베른이 대신 말했다.
“남쪽령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온순하고 은둔형이라서 몬스터 토벌을 할 때도 항상 제외됐다. 그런데 갑자기 폭주한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테니, 황태자 전하와 난 오래전부터 그 이유를 찾아다녔다.”
“어라, 그렇게 다 말해도 돼?”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제 부인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부인과 믿을 수 있는 사람……. 어쩐지 낯간지러운 말에 엘리사는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남쪽령 숲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마법진을 발견했다. 은밀하게 알아본바 흑마법이랑 관련이 있는 것 같더군.”
“흑마법이라니……. 그건 엄격하게 금기된 마법이잖아요.”
“금기됐다고 해서 쓰지 못하는 건 아니야.”
오스카가 턱을 괴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오래전, 그 여자가 초대 클라우드 공작을 불사신으로 만들고, 저주를 걸었던 것처럼 말이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엘리사도 자연스럽게 칼베른을 쳐다봤고, 그건 소파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에드윈 역시 마찬가지였다. 졸지에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칼베른이 인상을 팍 쓰며, 오스카에게 말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삼가주시죠.”
“쓸데없는 이야기라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데.”
“퍽이나요.”
심드렁한 대답에 오스카는 픽 웃었다.
“하여간 부황 폐하께 남쪽령의 몬스터 소동이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클라우드 소공작에게 은밀하게 조사를 하라고 지시를 내린 거라고 말씀 드렸어.”
“그러면 오히려 더 몬스터 토벌 원정대를 파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요.”
“물론 그러셨지. 하지만 그러면 흑마법을 부린 잔당들이 깊은 곳으로 숨을 수도 있으니 은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더니 부황 폐하께서 이해하셨어.”
하긴 흑마법사들은 워낙 교활하고 잔인한 데다가 은둔형이니 한 번 숨으면 찾기가 힘들다고 책에 적혀 있었다. 그러니 진짜 흑마법사의 소행이라면 잡겠다고 대대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보다 은밀하게 추적하는 게 맞았다.
“이걸로 시간은 벌었지만 잠깐이야.”
오스카가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어서 그를 원래대로 돌릴 약을 만들도록 해, 소공작 부인. 부인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거야.”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저렇게 짚어주니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눌렀다. 엘리사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본 칼베른이 오스카에게 한마디 하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황태자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
오스카가 허락하자마자 들어온 시종이 표정만큼이나 다급하게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전하! 지금 남쪽령의 몬스터들이 무리 지어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