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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벽을 넘어서면. (7) (104/156)

104화. 벽을 넘어서면. (7)2021.06.30.

  엘리사의 말을 끝으로 그들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칼베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엘리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아까와 같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머쓱해진 엘리사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을 열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칼베른이 문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며 대답했다.

“들어와.”

곧장 문이 열리면서 헤리엇이 듬성듬성한 백발을 휘날리며 다급하게 들어와 보고했다.

“주치의의 제자 중 한 명이 몰래 저택을 나가려다 경비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그 말에 칼베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팔짱을 꼈다.

“정말인가요?”

반면 엘리사는 약간 놀라며 헤리엇에게 물었다. 칼베른에게 그럴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듣긴 했지만, 실제로 그 상황을 마주하는 건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마님?”

그제야 엘리사가 있다는 걸 안 헤리엇이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째서 이곳에……?”

“소공작님과 할 말이 있어서요. 그래서, 정말로 주치의의 제자가 도망치다가 경비한테 붙잡혔나요?”

“네, 그렇습니다.”

역시 붙잡혔구나. 이로써 그 제자가 가짜 이중장부를 만들었다는 게 확실해졌다.

“지금 그 제자는 어디 있죠?”

엘리사가 헤리엇이 대답하는 순간 뛰쳐나갈 것처럼 굴자 칼베른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진정해.”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동안 절 골탕 먹인 놈을 드디어 잡았다는데!”

“그래, 잡았지. 잡았으니까 조급해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 녀석은 도망가지 못하니까. 그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침착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격하게 뛰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칼베른이 한 말 덕분이기도 했다.

‘그래, 맞아.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그놈을 만날 수 있어.’

엘리사는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자고 생각하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엘리사가 안정되자 칼베른은 그녀의 팔을 놔주며 헤리엇에게 물었다.

“그놈은 어디 있지?”

“아론 남작님께서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런. 얼른 가봐야겠군.”

칼베른은 눈을 찡그리더니 휙, 방을 나갔다. 자신보곤 조급해하지 말라고 해놓고, 그는 저러는 게 이상했지만, 엘리사는 군말없이 칼베른의 뒤를 따라갔다. **** 지하 감옥은 경비원 숙소의 지하에 있었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유일한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들은 칼베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경비들의 눈에는 칼베른이 6살짜리 꼬마 ‘카일 브리슈’로 보이니 그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마님, 정말로 도련님을 지하 감옥에 데리고 가실 겁니까?”

“그래.”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지하 감옥은 이렇게 어린 도련님께서 가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아론 남작님께서 계셔서 더욱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에드윈이 안에 있는 거랑 칼베른이 들어가면 안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아악!”

“!”

엘리사는 두꺼운 철문 너머로 비명이 들리자 깜짝 놀라며 철문을 쳐다봤다.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런데 비명이 여기까지 들린다는 건 그만큼 크게 소리를 지른다는 의미.

‘안에서 뭘 하는 거지?’

궁금해서 철문을 빤히 보고 있는 엘리사와 달리 칼베른은 혀를 차며 미간을 짚었다.

“결국 시작됐군.”

헤리엇이 칼베른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그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칼베른은 여전히 철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엘리사를 흘끗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부인이 보기엔 끔찍한 모습일 테니까.”

“끔찍한 모습?”

철문 너머의 비명에 정신이 팔린 와중에도 그 부분을 들은 엘리사가 칼베른을 돌아봤다.

“끔찍한 모습이라니…… 설마 아론 경이 그 제자를 고문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왜 갑자기 존댓말을…… 아, 여기 경비병들이 있었지. 엘리사의 시선이 칼베른에서 경비병으로 갔다가, 다시 철문으로 향했다. 아까보단 작지만, 여전히 철문 너머에서 비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고문하면, 두꺼운 철문을 뚫을 정도로 비명을 지른단 말인가. 게다가 이야기하는 걸 들어봤을 때, 지금 그 제자를 고문하는 사람은 에드윈인 것 같았다. 고문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눈을 뜨고 지켜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한 경우가 많은 터라, 대체로 전문 고문관이 담당했다. 그런데 평범한 보좌관인 에드윈이 고문까지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사실을 자신 빼고 모두가 알고 있다는 건 더 놀라웠고.

“이만 돌아갑시다, 부인.”

엘리사가 멍하니 철문을 바라보자 칼베른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엘리사는 순순히 칼베른을 따라갔다. 그 제자를 만나서 이것저것 묻고 싶긴 하지만, 그렇다고 잔인한 고문 현장을 보고 싶진 않았다. 광장에서 한 번씩 흉악범을 공개 처형할 때도 근처에 얼씬하지 않을 만큼, 엘리사는 그런 쪽에 무척 비위가 약했다.

‘나중에 고문이 끝나면 다시 가봐야겠네.’

그때 제자의 상태가 온전했으면 좋겠는데. 만약 피범벅 된 끔찍한 상태면 제대로 물어보기 힘들뿐더러, 그 제자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할 테니 엘리사는 부디 제자가 무사하길 바랐다. ****

“엘리사.”

엘리사가 경비병 숙소에서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닉이 불쑥 나타났다. 칼베른은 닉이 엘리사 쪽으로 다가오자 교묘하게 그 앞을 가로 막고 서서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올려다봤다.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안 자고 돌아다니는 겁니까, 니콜라스 경.”

닉이 몹시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칼베른을 내려다 봤다.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은데, 꼬마야. 얼른 가서 안 자면 키 안 큰다?”

“안 자도 당신보다는 클 겁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

“혜안이라고 해두죠.”

“무슨 말도 안 되는…….”

“두 사람, 제발 그만 싸웁시다.”

엘리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말이지, 눈만 마주치면 싸워대니 말리는 처지에선 몹시 피곤했다. 얼굴을 마주보고 하하호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발 만났을 때 싸우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닉?”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길래 네가 걱정돼서. 괜찮아?”

“보다시피 멀쩡해. 그러니까 얼른 가서 자. 내일 떠나야 하잖아.”

괜히 저 때문에 잠이 부족해서, 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니 엘리사는 얼른 닉을 보냈다. 그런 엘리사의 마음은 알지만, 그래도 섭섭한 닉은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계속 그녀 쪽을 돌아봤다. 하지만 엘리사는 닉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칼베른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계속 그들을 따라다녔던 헤리엇은 더 이상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눈치채고 작은 소동의 뒷정리를 하기 위해 조용히 물러났다. 타박, 타박,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저택에 내려앉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엘리사는 칼베른 방 쪽으로 걸음을 돌렸지만, 칼베른은 3층 계단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걸음이 엇갈리자 엘리사가 멈춰 서서 칼베른을 쳐다봤다. 칼베른이 턱 끝으로 3층을 가리켰다.

“침실까지 데려다주지.”

내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그도 같은 생각을 했구나. 엘리사가 설핏 웃었다.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칼도 얼른 들어가서 쉬어.”

주변에 자신들의 대화를 듣는 귀는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 어디서 어떻게 훔쳐 들을 수도 있으니, 엘리사는 말을 놓았다. 칼베른도 그제야 경계심이 생겼는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양쪽 복도를 곁눈질로 봤다가 3층으로 올라갔다.

‘기어코 데려다줄 생각인가 보네.’

하여간 이상한 데 고집을 잘 부린다니까. 엘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칼베른을 따라 올라갔다. 침실로 가는 내내 그들 사이엔 아무런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내려앉은 어둠보다 더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이럴 거면 혼자 오는 게 더 나았는데.’

오늘따라 침실로 가는 길이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건지. 얼른 도착하기를 바라며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칼베른이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춰 선 엘리사는 익숙한 문을 보고 그제야 자신의 침실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마터면 복도 끝까지 갈 뻔했다.

“잘자.”

침실로 들어간 엘리사가 문을 닫으려고 하자, 칼베른이 문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발이 문에 끼면 어쩌려고 저러는 건지. 엘리사가 깜짝 놀라며 문을 다시 열자, 칼베른이 그 틈으로 들어왔다.

“뭐…….”

“아까 이 저택에 그대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냐고 물었었지.”

뭐 하는 거냐고 따지려는데, 칼베른이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질문을 했었지. 엘리사는 가짜 이중장부를 만든 놈을 드디어 찾았다는 사실에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마터면 대답을 듣지 못하고 그냥 잘 뻔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떠올리고 후회했겠지.’

엘리사는 칼베른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준 걸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제 자리가 남아 있나요?”

자색 눈동자가 흔들렸다가 이내 굳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칼베른의 머리칼이 가볍게 흩날렸다. 한참 동안 말없이 엘리사를 바라보던 칼베른이 약간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그대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남아 있냐고 물어보는 거지?”

대답이 아닌 질문이 돌아왔지만,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럼 나도 결심한 걸 보여줘야지. 엘리사는 주머니에 꾸깃꾸깃하게 접어 넣어두었던 종이를 꺼내 칼베른에게 주었다.

“!”

엘리사가 준 걸 확인한 칼베른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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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는 안개꽃처럼 옅지만 만개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이제 제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 돌려드릴게요. 그걸 어떻게 할지는 소공작님이 정해주세요.”

  **** 침실로 돌아온 칼베른은 문에 기대서서 엘리사가 준 종이를 다시 펼쳐봤다. 종이에는 1년 안에 무조건 이혼해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엘리사가 이걸 자신에게 줬다는 건 이혼할 마음이 사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엘리사가 칼베른과 이혼하려고 했던 건, 거짓 이중장부로 빚어진 오해 때문이었다. 그 오해가 풀린 지금, 그녀가 마음을 바꾸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솔레이가 엘리사를 대신해서 가문의 안살림을 돌보고 있지만, 말 그대로 대신이었다. 언제까지 솔레이에게 안살림을 맡길 수는 없으니, 엘리사가 마음을 바꾼 건 분명 환영할 일이었지만 칼베른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사에게 마음을 줘버린 탓이었다. 그녀와 이혼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고 훌훌 털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난감하면서도 그녀가 자신과 계속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해준 게 기뻐서 혼란스러웠다. 마음 속에서 상반되는 감정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원래 계획했던 대로 그녀를 보내 줄 것인가. 아니면 제 욕심만 챙기고자 그녀를 계속 붙잡고 있을 것인가. 똑똑-.

“…….”

거센 파도처럼 일렁이는 고민 속에 허우적거리던 칼베른은 노크 소리가 들리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에드윈이었다. 소파에 앉은 칼베른은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반. 그 제자가 잡힌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벌써 자백을 받아낸 건가?”

“네. 제대로 뭔가 하기도 전에 전부 다 털어놓아서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게 뭔가 하기 전이었나. 칼베른은 굳게 닫힌 철문을 뚫을 정도의 비명을 떠올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배후가 누군지 알아냈나?”

“아니요.”

“자백을 받아냈다면서 배후를 알아내지 못했다고?”

“그게 그 남자도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킨 상대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칼베른은 팔짱을 끼고 계속 말해보라는 듯 에드윈을 쳐다봤다.

“그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로만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보수도 우편으로 받았고요. 뭐,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해봤자 그 남자가 정체불명의 배후에게 편지를 받은 건 딱 두 번뿐이지만요.”

“얼굴도 모르는 놈이 보낸 편지에 적힌 지시 사항을 따라 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이었습니다.”

“……그래?”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에드윈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틀림없는 사실일 터. 사용한 꼭두각시를 내버려 뒀길래 허술한 놈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붙잡혀도 들키지 않을 테니 구태여 죽이지 않은 것이다.

‘듄이라는 그 남자는 그게 아니라서 죽인 거겠군.’

역시 그때 듄의 죽음을 자세히 조사해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몹시 후회돼서 칼베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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