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벽을 넘어서면. (4) (101/156)

101화. 벽을 넘어서면. (4)2021.06.19.

  엘리사가 부른 필적 감정사는 제르나 남작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유명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감정사였다. 그만으로 충분히 필적 감정이 되겠지만, 좀 더 공정하고 확실한 판정을 위해 엘리사는 유명한 필적 감정사를 두 명 더 불렀다.

“이걸 판별하면 된다.”

엘리사는 그들을 각각 다른 방에 부른 뒤, 이중장부와 클라우드 가문의 주치의가 쓴 의료서를 주며 필적 감정을 부탁했다. 그렇게 그들이 필적을 감정하는 동안, 엘리사는 니케와 주치의에게 제르나 남작의 치료제로 쓰인 약초와 이중장부, 그리고 듄에 대해서 상세하게 물어봤다. 니케의 대답은 뒷마당에서 했던 것과 똑같았다. 그녀는 이중장부의 존재는 물론 듄이 상단장인 척 연기하며 엘리사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주치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치의는 엘리사가 이중장부를 보여주며 따지자,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격하게 저었다.

“이건 제가 작성한 장부가 아닙니다. 맹세코 마님의 부친께서 드실 약에 장난질을 한 적도, 클라우드 공작 각하께 그런 명령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저렇게까지 펄쩍 뛰며 말하는 걸 보면 사실인 것 같은데, 지금까지 주치의가 부친의 약에 장난질을 했다고 생각했던 터라 엘리사는 선뜻 주치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필적 감정을 해보면 알겠지.’

그 이중장부가 주치의가 작성한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일단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었다.

‘듄, 그 남자에게도 왜 거짓말을 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하지만 니케가 말하길 그는 엘리사에게 거짓말을 한 그다음 날, 상단을 그만두는 바람에 연락 두절이 됐다고 했다.

“그 남자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나?”

“글쎄요. 저도 듄과는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돼서…….”

엘리사의 질문에 니케는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 떠올린 듯 탄성을 뱉었다.

“클라우드 소공작님께선 듄의 행방을 아실지도 모릅니다.”

칼베른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뜻밖의 사람이 거론되자 엘리사는 눈을 크게 깜빡였다.

“그이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부인께서 듄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듄의 인적사항을 받아가셨거든요. 소공작님 정도면 사람 한 명 찾는 건 문제도 아니니 분명 듄을 찾았을 겁니다.”

“그게 언제쯤이지?”

“음, 제 기억으론 부인께서 듄을 만나고 정확하게 닷새 후입니다.”

꽤 오래전의 일이었다. 칼베른이 듄을 찾아 이야기를 백 번은 나누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당연히 듄이 한 거짓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겠지? 그런데 왜 자신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

‘혹시 그 남자도 공범인 거 아니야?’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당시 칼베른에게 이중장부에 대해 물어봤을 때,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게다가 칼베른이 듄과 한패였다면, 니케에게 듄의 인적사항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칼베른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엘리사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칼베른이 자신을 배신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믿는다고?’

내가 그 남자를? 도대체 왜? 칼베른은 클라우드 공작과 똑같이 계약을 한 사람 중 한 명일 뿐인데 왜 그 남자는 믿을 수 있는 거지? 문득 든 생각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엘리사가 인상을 쓰며 미간을 짚자 주치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마님?”

엘리사는 작게 실소하며 주치의에게 되물었다.

“이 상황에서도 내 걱정을 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저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주치의고 마님께선 공작가의 안주인이시니까요.”

주치의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서글프게 웃었다.

“그동안 마님께서 제게 치료받는 걸 거부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요.”

“…….”

“어서 빨리 오해가 풀려서, 마님이 아프실 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엘리사는 올곧은 주치의의 시선을 마주하니 괜히 양심이 찔려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럼 필적 감정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려보지.”

완벽하게 맞췄다고 생각했던 퍼즐이, 사실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를 조금씩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 약 2시간 뒤, 모든 필적 감정이 끝났다. 필적 감정사들이 하는 이야기는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결론은 똑같았다. 이중장부와 의료서의 글씨는 같은 사람에 쓴 게 아니며, 누군가 한쪽의 글씨체를 교묘하게 따라 했다.

‘정말로 이중장부를 만든 사람이 주치의가 아니었다니.’

엘리사는 당황하며 멍하니 이중장부를 바라봤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서 다른 사람이 쓴 글이라고 하니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 클라우드 공작은 왜 이중장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거지? 그는 분명히…….

‘……잠깐만.’

클라우드 공작은 분명 이중장부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 장부가 제르나 남작과 관련된 장부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엘리사가 제르나 남작에게 쓰는 돈이 아까우냐고 물었을 때도, 아깝다고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뿐일까. 엘리사를 협박했을 때도 ‘어떤 짓’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을 뿐, 제르나 남작의 약에 장난을 치거나 제르나 남작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 혹시 자신이 말한 이중장부와 클라우드 공작이 말하는 이중장부가 달랐던 게 아닐까?

“주치의!”

또 다른 의문에 도착한 엘리사는 주치의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혹시 내가 보여준 이중장부 말고 또 다른 이중장부가 있지 않나?”

“네, 네?”

“돌아가신 공작 각하의 명령을 받고 작성한 이중장부가 있지 않냐고 물었네!”

엘리사의 격한 행동에 당황한 건지, 아니면 그녀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건지 주치의는 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말해! 당장 말하라고!”

“진정하십시오, 마님.”

엘리사가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주치의를 잡아먹을 것처럼 재촉하자 보다 못한 헤리엇이 엘리사를 말렸다.

“하아.”

그제야 진정한 엘리사는 주치의의 어깨를 놓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헤리엇이 주치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해도 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마님께선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거든요.”

주치의의 눈이 한순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정말입니까?”

“네. 소공작님께서 전부 말씀하셨습니다.”

“아아.”

주치의는 왜인지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엘리사에게 말했다.

“그 장부는 제가 작성한 게 아니지만…… 네. 공작 각하의 명령을 받아 이중장부를 쓰고 있었던 건 맞습니다.”

역시 다른 이중장부가 있었어. 엘리사는 눈을 치켜뜨며 주치의에게 물었다.

“무슨 이중장부지? 아니, 말하지 마. 내가 그 이중장부를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

  **** 사교 클럽에서 돌아온 칼베른은 저택 분위기가 평소보다 어수선하다는 걸 느끼고 지나가는 하인에게 물었다.

“저택에 무슨 일이 있었나?”

“딱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도련님.”

“그래?”

내가 착각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칼베른은 좀 더 확실하게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헤리엇을 찾았다.

“칼.”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헤리엇이 아니라 엘리사였다. 엘리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슬퍼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아주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칼베른은 엘리사가 저런 표정을 하는 걸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에게 이혼 요구를 했을 때였다.

‘설마 그 성기사 놈이랑 함께 떠나겠다고 말하려는 건가?’

파티에 참석했을 때, 닉에게만 뭔가 부탁한 것도 그렇고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터라 불안했다.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선고나 다름없는 말에 불안감이 더 커졌다. 칼베른은 도와달라는 의미로 엘리사의 뒤에 서 있는 헤리엇을 쳐다봤다. 하지만 헤리엇은 칼베른이 보낸 시선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는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엘리사가 돌아서서 성큼 걸어갔다. 따라오라는 의미였다. 칼베른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오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칼베른은 엘리사를 따라가는 동안 어떻게 하면 그녀를 붙잡을지 고민했다.

‘……붙잡지 말까?’

엘리사를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이대로 보내주는 게 맞았다. 자신의 곁에 있어봤자 불행해질 뿐이었으니까.

“…….”

칼베른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엘리사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했으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욕심을 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엘리사.

“……가지 마.”

목적지인 그녀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엘리사는 뜬금없이 나온 말에 칼베른을 돌아봤다. 칼베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결연하게 말했다.

“가지 마.”

“그럼 여기 말고 칼의 방으로 갈까요? 아니면 응접실?”

칼베른의 말을 단순히 자신의 집무실에 들어가지 말라고 해석한 엘리사가 되묻자, 칼베른은 작게 실소하며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아니, 들어가지.”

그리고 엘리사보다 먼저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왜 저런담? 칼베른의 이상한 행동에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칼베른은 소파에 앉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지만, 엘리사에게만 닿지 않았다. 역시 이상하단 말이지. 엘리사는 칼베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앉아요.”

칼베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그답지 않은 조신한 행동에 엘리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어요?”

“안 했어.”

“한 것 같은데요.”

“안 했다고.”

반항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에 엘리사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자꾸 웃는 걸 보니, 그녀에게 나쁜 이야기가 아닌 건 확실했다. 그럼 역시 저택을 떠나겠다고 말하려는 걸까. 가능성이 조금씩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칼베른의 표정도 점점 딱딱하게 경직됐다. 웃음기를 머금었던 엘리사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엘리사는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잠시 심호흡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부 다…… 들었어요.”

전부 다 들었다니. 공작저를 나가겠다는 말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에 칼베른은 눈썹을 찡그리며 엘리사를 바라보다가, 곧 그녀가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했는지 짐작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엘리사는 자신이 그녀의 수명을 흡수한 걸 알아챈 모양이다.

“왜 여태 말을…….”

“미안하다.”

그 부분에 대해선 변명할 여지가 없는 터라, 칼베른은 변명하기 전에 사과부터 했다.

“전부 다 말하려고 했었다. 말하려고 했었는데…….”

칼베른은 차마 엘리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아직 정리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요.”

그러자 엘리사가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갑자기 공작 각하께서 쓰러지셔서 정신이 없었고, 그 뒤로도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상황이 여의치 않았으니 저한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도 이해해요.”

“……무슨 소리지?”

엘리사가 하는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칼베른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대의 수명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나?”

“수명이요?”

이번엔 엘리사가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제 수명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거예요?”

그제야 자신이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깨달은 칼베른이 입을 다물었다. 엘리사도 말을 하지 않으면서 그들 사이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칼베른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정적을 깨뜨렸다.

“그대가 말하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게 뭐지?”

엘리사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다 알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몰라. 아무것도.”

“아.”

엘리사도 비로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작게 탄성을 뱉었다. 클라우드 공작과 이야기를 나눴을 때와 상황이 똑같았다.

“공작 각하가 쓰러지셨을 당시, 전…….”

그때처럼 오해로 만든 퍼즐 조각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가 다소 길어지더라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엘리사는 주치의의 책상 서랍에서 이중장부를 발견한 일부터 차근차근 말했다. 그러면서 칼베른의 눈치를 계속 살폈다. 이야기하는 내내 칼베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남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소공작님에게 이혼하자고 말했던 거예요. 아버지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 사람과 같은 성을 가지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곳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도 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앞으로가 더 힘들고 어려웠다. 엘리사는 고개를 조금씩 아래로 떨어뜨리며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손을 꽉 쥐였다.

16639020308995.jpg

  “그랬었는데……제가 바보 같이 오해하고 있었던 거였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