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의문, 그리고 함정 (4)2021.05.26.
신력은 신에게 부여받은 힘이고, 마나는 자연에서 빌린 힘이라는 걸 제외하면 근본적인 성질은 비슷했다. 하여 신력과 마나가 부딪쳐도 마나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그래서 마법사나 연금술사처럼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신관에게 치료를 받는 등 몸 안에 신력이 들어오는 걸 꺼렸다. 혹 그런 일이 생기면 마나를 ‘마나소’에 꼭꼭 숨겨두고 절대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사는 가지고 있는 마나를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그것도 신력이 강하게 응집된 성검을 쥐고서. 높은 확률로 마나 충돌이 일어나면서 검을 쥔 엘리사의 손에서 강력한 스파크가 일어났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엘리사!”
한발 늦게 상황 파악을 한 칼베른이 성검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닉이 더 빨랐다. 성검을 빼앗긴 엘리사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뒤에 있던 에드윈이 황급히 부축했다.
“부인!”
가장 늦게 정신을 차린 솔레이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순간 눈을 멀게 만들었던 강력한 스파크에 솔레이의 비명까지 더해져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됐다.
“무슨 일이죠?”
“글쎄요. 저도 갑자기 이상한 빛이 번쩍이는 것밖에 못 봐서 잘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칼베른과 닉, 에드윈과 솔레이가 엘리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싸고 있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칼베른은 빠르게 엘리사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은 식은땀으로 젖었으며 손바닥은 새빨갛게 익었다.
“마나 충돌로 화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닉도 손바닥의 상처를 보고 말했다.
“당장 의원을 불러 치료해야 합니다.”
상처를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낫게 해주는 신력도 마나 충돌로 입은 상처에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신력을 가까이하는 것만으로도 상처를 더 악화 시킬 수 있으니, 닉은 엘리사의 곁에 다가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다. 칼베른은 일단 엘리사의 손에 차가운 물을 부어 응급처치했다.
“에드윈, 당장 엘리사를 저택으로 데리고 가라.”
그리고 에드윈에게 명령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반말을 했지만, 다들 엘리사에게 정신이 팔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비켜주겠나?”
칼베른의 명을 받은 에드윈이 엘리사를 안아 들었을 때,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너머가 문득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오스카가 황급히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오스카는 에드윈이 안고 있는 엘리사를 쓱 보곤 에드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마나 충돌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마나 충돌? 아아, 그러고 보니 소공작 부인은 연금술사였지.”
오스카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귀족들이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신력과 마나가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하던데 소공작 부인께선 운이 없는 모양이군.”
“그러게 말이에요. 하필 이렇게 좋은 날에 마나 충돌이 일어나다니…….”
귀족들은 엘리사를 동정했고, 모처럼의 의식이 방해받은 걸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던 황제도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다행이군. 내심 황제의 반응을 걱정하고 있던 오스카는 가슴 깊이 안도했다.
“보아하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치료는 받아야 할 것 같군.”
동시에 칼베른을 안전하게 밖으로 내보낼 좋은 기회라는 걸 깨닫고, 그 기회를 이용하려는데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상하군요.”
데아른이었다.
“아직 축복 의식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마나 충돌이 일어나다니.”
“그러고 보니…….”
“그건 정말 이상한데요.”
동정 여론이 이상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황제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눈썹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된 거지?”
“그…….”
“제 불찰입니다, 폐하.”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주춤하는 에드윈을 대신해서 칼베른이 나섰다. 황제의 시선이 에드윈에게서 칼베른에게로 옮겨졌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황제와 눈만 마주쳐도 겁을 먹고 발발 떨기 마련인데, 칼베른은 담담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칼베른이 이럴 수 있는 건, 진짜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황제는 흥미롭게 칼베른을 바라봤다.
“이름이 뭐지?”
“카일 브리슈라고 합니다, 폐하.”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진짜 날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이군. 황제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래, 카일. 네 잘못이라고?”
“네. 제가 니콜라스 경이 차고 있는 성검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칼베른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혔다. 그는 눈물을 바로 닦지 않고 살짝 고개를 돌리며 주변에 보였다가 손등으로 꾹 눌렀다.
“어쩜 좋아.”
“불쌍하게도.”
칼베른의 눈물을 본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며 그를 동정했지만, 그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에드윈과 오스카는 경악하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데아른의 시선도 곱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황제 폐하. 저 때문에 부인이 다치신 게 너무 미안해서, 그래서, 치료해주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을지 몰라서…….”
칼베른은 말을 더듬는 등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됐다.”
그 연기에 껌뻑 속아 넘어간 황제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무슨 일인지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도 된다. 시종장”
“네, 폐하.”
“소공작 부인이 편히 쉴 수 있게 방으로 안내하고 궁의에게 진찰을 보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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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기다리시면 궁의를 불러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이만.”
시종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에드윈은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바깥 동태를 살폈다.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에드윈은 엘리사의 곁을 지키고 있는 칼베른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아.”
칼베른은 그제야 안도하며 엘리사를 돌아봤다.
“이제 눈을 떠도 된다.”
그 말에 꼭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매끄럽게 올라갔다. 초점이 또렷한 눈동자가 화려한 천장 무늬를 짚다가 칼베른에게 옮겨졌다.
“…….”
마주친 칼베른의 눈동자가 살벌했다. 눈빛으로 누군가를 찌를 수 있었다면 이미 몇 번이고 찔렸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절 보는 거예요?”
칼베른의 눈썹이 올라갔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네.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들을 줄 알았는데, 원수를 보는 것처럼 쳐다보니 화가 나네요.”
엘리사가 당당하게 제 의견을 말하자, 칼베른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화를 내야 하는 건 그대가 아니라 나다. 누가 그렇게 다치면서까지 도와달라고 했지? 왜 그대의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거냐.”
외모와 목소리는 어린아이인데, 말투는 어른스럽고, 거기에 버럭 화까지 내고 있으니 보는 입장에선 웃겼다. 약간 치밀어올랐던 화가 가라앉는다고나 할까.
“잘못 알고 계신 게 있는데, 제 몸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이런 짓을 한 겁니다.”
덕분에 엘리사는 아까보다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함정에 빠져 위험해지면 곁에 있는 저 역시 위험해질 테니까요. 그렇게 되는 것보단 손을 잠시 희생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그런 거예요. 손은 치료하면 되지만, 당신이 위험에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잖아요.”
구구절절 맞는 말인지라 칼베른은 아직 화가 들끓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칼베른을 대신해서 에드윈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부인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카일 브리슈가 사실 칼베른 클라우드 소공작이라는 사실을 들켰을 겁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인데, 제가 깨어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심장 소리입니다. 기절한 사람치고 빠르게 뛰길래, 기절한 척하신다는 걸 알았죠.”
심장 소리로 그런 게 구별이 가능하구나. 처음 알았다. 잠시 후, 황제가 보낸 궁의가 도착했다. 궁의는 꼼꼼하게 엘리사의 상태를 살피고, 손바닥의 상처를 치료했다.
“상처가 아물 때까진 손바닥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마나 충돌로 생긴 상처라 마나를 쓰시는 것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연금술도 못 하는 건가요?”
“간단한 재료 연성은 가능하지만 마법진을 발동하는 건 안 됩니다.”
그 말은 복잡한 마법 약은 만들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예를 들면 칼베른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약이라던가.
‘가마솥이 올 때까지 나아야 할 텐데.’
만약 다 낫지 않더라도 가마솥이 도착하면 무조건 약을 만들어야 했다. 조금 있으면 공작위 계승식인 만큼 손이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궁의가 나가고, 에드윈도 연회장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방을 나갔다. 엘리사와 칼베른, 두 사람만 남은 방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엘리사는 붕대 감은 손을 만지작거렸고, 칼베른은 창문을 활짝 열고, 그 앞에 앉아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지만, 아직 밤공기는 쌀쌀했다. 얇은 드레스만 입고 있어서 더욱 추운 것 같았다.
“…….”
엘리사가 양팔을 감싸 안으며 어깨를 잘게 떨자 칼베른은 말없이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쪽에 준비된 담요를 가져와 엘리사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엘리사는 짤막하게 인사하며 담요로 어깨를 덮었다. 그녀의 말을 끝으로 또 침묵과 함께 어색한 정적이 찾아왔다. 엘리사는 칼베른에게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자꾸 그를 흘겨봤다. 그러다 칼베른과 눈이 마주쳤다. 엘리사는 자색 눈동자에 비친 제 모습을 보는 순간 파드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하하.”
그 모습이 웃겼는지 칼베른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덕분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풀렸다.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엘리사가 약간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당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황궁은 불편해요.”
“이상하군. 보통 사람들은 황궁에 오고 싶어서 난리던데.”
“그럼 전 보통 사람이 아닌 모양이죠.”
“좀 특이한 편이긴 하지.”
“……그거 칭찬 아니죠?”
“글쎄. 어떨까.”
하는 말이나 표정을 봤을 때 칭찬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여간 못됐다니까.’
엘리사가 애꿎은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삐죽거리자 칼베른이 옅게 웃었다. 그 미소가 사라진 건 붕대 감긴 그녀의 손을 봤을 때였다. 그녀가 저렇게 다친 건 순전히 저 때문이니 칼베른은 몹시 화가 났다. 그녀가 아닌 자신에게.
“오늘 일은 정말 고맙지만 두 번 다시 그런 짓 하지 마.”
칼베른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하게 엘리사를 바라봤다.
“그대가 나 때문에 다치는 건 원하지 않는다.”
화를 내지 않고 진지하게 말해서일까.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확연하게 느껴져 엘리사는 아까처럼 당당하게 제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깃털로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간질간질하다가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숨을 쉬기가 약간 버거울 정도였다.
“표정이 안 좋군. 손이 아픈 건가?”
“아, 니요.”
엘리사는 고개를 저은 뒤, 크게 심호흡했다.
“그냥 갑자기 숨을 쉬기가 버거워져서 그런 거예요.”
“마나 충돌의 여파가 폐까지 전해진 건가?”
칼베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 주치의의 진찰을 받도록 하지.”
“괜찮아요.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그래도 진찰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정말로 괜찮아요.”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설령 괜찮지 않더라도 아버지를 죽이는 데 일조한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을 생각은 전혀 없어 엘리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진찰은 절대 받지 않을 거예요.”
단순히 괜찮아서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는 듯한 말투에 칼베른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제 머릿속과 속마음을 전부 꿰뚫어 볼 것 같은 강렬한 눈빛에 엘리사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다시 찾아온 정적을 가르며 연회장에서 새어 나온 오케스트라 음악이 들렸다. 경쾌한 왈츠 음악이 귀에 익었다.
“아, 내가 좋아하는 곡이다.”
“이 곡을 좋아하나?”
아차, 혼자 생각한다는 걸 또 말해버렸네. 엘리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네. 가장 좋아하는 곡이에요. 부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요.”
“그건 처음 알았군.”
“제가 말 안 했으니 당연히 모르죠.”
엘리사는 부모님을 떠올리니 자연스럽게 에이지도 떠올렸다.
‘닉은 잘 하고 있으려나.’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엘리사가 곁눈질로 창밖에 보이는 연회장을 쳐다보자 칼베른이 물었다.
“춤을 추고 싶은 모양이지?”
“네?”
“춤을 추고 싶어서 연회장을 본 거 아닌가?”
음,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완전 헛다리를 짚은 거지만, 그걸 지적하면 사실대로 말해줘야 하니 엘리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춤을 추고 싶었는데 못 춰서 조금 아쉽네요.”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은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사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춤출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