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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의문, 그리고 함정 (3) (93/156)

93화. 의문, 그리고 함정 (3)2021.05.22.

  닉이 왔다는 건 크라임도 왔다는 의미일 테니 칼베른은 크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 어디에도 크라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닉 혼자 돌아온 건가. 성기사이면서 크라임 곁을 지키지 않고 돌아온 이유가 왠지 엘리사 때문일 것 같아 몹시 짜증 났다.

“벌써 돌아갔을 리가 없는데 안 보이길래 한참 찾았습니다.”

닉이 엘리사에게 존댓말을 쓰는 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기도 했고, 저게 맞는 건데 껄끄럽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안색이 아까보다 안 좋아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베른이 뚫어지도록 닉을 쳐다봤지만, 닉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엘리사에게만 말을 걸었다. 자신이 떠나면 칼베른과 엘리사를 떼어놓을 사람이 없어졌다. 솔레이가 있으면 그 역할을 대신해 줬을 텐데, 애석하게도 솔레이는 그새 춤을 추러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에드윈이 있긴 하지만, 그는 그들을 떼어놓을 생각이 전혀 없는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카일!”

칼베른이 자꾸 저를 무시하자 에밀리가 무척 화가 난 듯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꾸 왜 다른 곳을 보는 거야!”

“……미안.”

칼베른은 사과하며 에밀리의 손을 떼어냈다.

“난 너랑 춤 못 춰.”

“뭐?”

“춤 못 춘다고. 그러니까 다른 곳에 가서 알아봐.”

칼베른은 벙한 에밀리를 두고 엘리사와 닉에게 걸어갔다. 닉의 존댓말에 놀란 건 엘리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에게 존댓말을 듣는 건 굉장히 어색하고 불편했다.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더 소름이 돋는 건 자신 역시 그에게 존댓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부인?”

“그, 괜찮아요.”

목소리까지 떨렸다. 엘리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잠깐, 닉에게 에이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해볼까? 엘리사는 잠시 고민했다. 예전부터 닉은 사람을 찾는 걸 무척 잘했다. 성기사가 되지 않았다면 사립 탐정이 돼도 성공했을 것이다. 게다가 닉이라면 이것저것 묻지 않고 에이지를 찾아줄 것이다.

‘좋아.’

닉에게 부탁하려는데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 칼베른이었다.

“왜 여기 있어요?”

그 귀여운 꼬마 숙녀랑 춤을 추러 간 거 아니었나. 의아해서 묻자 칼베른이 닉을 흘겨보곤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솔레이 양이 없으니 제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 솔레이나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했지. 에드윈이 있긴 하지만, 그는 예외였다.

“그래도 여자애가 먼저 춤 신청을 했는데, 거절하고 돌아오면 어떡해요.”

“오, 뭐야. 여자애한테 먼저 춤 신청을 받은 거야? 대단한데?”

닉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칼베른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닉은 칼베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엘리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 제게 부인과 한 곡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탁, 그 손을 칼베른이 쳐냈다. 닉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칼베른을 내려다 봤다.

“뭐 하자는 거지, 꼬맹이?”

“당신이야말로 뭐 하자는 겁니까. 부인의 몸이 안 좋다는 걸 알면서 춤 신청을 하다니. 배려가 없군요.”

“하, 꼬맹이가 뭘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부인이 괜찮다고 했어.”

개와 고양이도 아니고 도대체 왜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건지.

“자자, 싸우지 말아요.”

엘리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닉과 칼베른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진짜 어린애 같다니까. 엘리사는 문득 남자는 나이를 먹을수록 어려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니콜라스 경.”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에드윈이 닉에게 물었다.

“크라임 대주교님은 어디 가시고 혼자 오신 겁니까?”

“대주교님은 신전에서 황녀 전하의 축복 의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곧 의식이 시작되니 저 먼저 연회장에 가도 된다고 해서 온 거고요.”

“그렇습니까.”

에드윈은 고개를 끄덕이며 칼베른을 슬쩍 내려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칼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닉.”

에드윈과 칼베른이 대화하는 사이, 엘리사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닉을 불렀다. 칼베른이 그런 두 사람을 쳐다봤다.

“부탁 하나만 하자.”

닉은 칼베른을 향해 승리의 미소를 날리며 엘리사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커다란 부채에 두 사람의 얼굴이 가려졌다.

“무슨 부탁인데?”

“사람 좀 찾아 줘.”

“어떤 사람?”

“나한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좀 찾아 줘.”

닉이 잠시 생각하더니 뜬금없는 걸 물었다.

“혹시 클라우드 소공작이나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부탁을 했어?”

“아니, 안 했는데.”

“그럼 나한테만 하는 부탁이라는 거네. 내가 특별해서, 그리고 믿음직스러워서 부탁하는 거 맞지?”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왜 이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는 거지? 엘리사가 이상하게 바라보자 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데?”

“그게…….”

엘리사는 예전에 봤던 에이지의 모습을 말할지, 아니면 아까 봤던 모습을 말할지 잠시 고민했다가 후자를 선택하고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가 찾는 사람이 스란 왕국의 사람이야?”

“일단은.”

정말 스란 왕국의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겉모습은 그렇게 보였다.

“그런 거라면 쉽지. 알았어. 축복 의식이 끝나는 대로 바로 찾아볼게.”

“부탁할게.”

긴 이야기가 끝나자 엘리사는 부채를 내렸다. 그러자 살벌하게 자신과 닉을 보고 있는 칼베른이 보였다. 엘리사는 칼베른에게 왜 그렇게 보냐고 물어보려는데 댕, 댕,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멈추고 춤을 추던 사람들이 저마다 흩어졌다. 마리아와 데아른도 자리로 돌아갔고, 비어 있던 황좌의 주인도 돌아왔다. 오스카 역시. 춤을 추러 갔던 솔레이도 돌아왔다.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죠. 정신없이 춤추다 보니…….”

“괜찮아요. 제가 다녀와도 된다고 했는 걸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부인. 그나저나.”

솔레이가 눈썹을 치켜들며 닉을 노려봤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죠? 다른 성기사들은 밖에서 연회장을 지키고 있던데.”

“지키는 게 아니라 의식을 준비하는 겁니다, 레이디.”

살벌한 시선에도 닉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 전 여기 신전의 성기사가 아닌 손님으로 온 거니, 이곳에 있는 거고요.”

“손님이기 전에 대주교님을 지키는 성기사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놀고 있다니.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아까워지려는군요.”

“이건 제례용 성검입니다. 사람을 베는 검이 아닙니다.”

닉이 픽 웃었다.

“그것도 모르시다니. 아직 배움이 부족하시군요.”

“이익……!”

솔레이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움켜쥐는 순간,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새하얀 신관 복을 입은 신관들이 들어왔다. 가장 앞에서 신관 행렬을 이끄는 사람은 바로 크라임이었다. 그 뒤에 황궁 신전 소속인 라할 대주교가 있었다. 크라임은 황제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보통 귀족들은 황제의 앞에서 허리를 굽히거나 부복했지만, 신관들은 제외였다. 그들은 오로지 신의 앞에서만 허리를 굽혔다.

“신의 미천한 종이 위대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가 기분 좋게 소리 내서 웃었다.

“어서 오게, 크라임 대주교. 그래, 순례하러 제국에 방문했다고?”

“네, 폐하.”

“허허, 시기가 이렇게 맞는군. 덕분에 우리 마리아가 크라임 대주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됐으니 말이야.”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폐하.”

황후가 웃으며 대화에 참여했다. 그녀는 다정한 눈으로 마리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신께서 우리 마리아를 어여쁘게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훈훈한 이야기를 나누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크라임 대주교를 보고 있는데, 한 시종이 조용히 엘리사에게 다가와 작은 쪽지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스카가 칼베른이 아닌 나한테? 엘리사는 의아해하며 쪽지를 펼쳤다. [빨리 도망쳐.] 간결한 문장에서 다급함이 보였다. 오스카가 왜 이런 걸 보낸 건지 몰라 빤히 보고 있는데 에드윈이 뒤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이걸 보내셨어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직접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에드윈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쪽지는 에드윈의 손을 거쳐 칼베른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솔레이와 닉도 쪽지의 내용을 보게 됐다.

“도망치라니. 무슨 의미일까요, 부인?”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론 경은 뭔가 떠오르는 게 있나요?”

“…….”

심각한 표정을 보니까 있는 것 같은데. 엘리사는 재차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보다 에드윈이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니콜라스 경, 혹시 오늘 축복 의식에 라할 대주교님도 참여하십니까?”

“그렇습니다.”

닉의 대답에 에드윈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에드윈은 쪽지가 구겨질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칼베른에게 말했다.

“당장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칼베른 역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엘리사가 에드윈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요?”

“설명은 나중에 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이곳을 나가야 합니다.”

“저도 말인가요?”

“아니요. 이분만…….”

에드윈이 칼베른의 어깨를 잡는 순간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크라임과 신관들이 들어왔던 거대한 문이 닫힌 것이다. 다른 작은 문도 전부 닫히고, 발코니도 꽉 닫혔다. 그리고 어느새 들어온 성기사들이 연회장을 크게 에워쌌다. 성기사들은 저마다 성검을 빼 들고 경건하게 서 있었다.

“……늦은 건가.”

그걸 본 에드윈이 절망스럽게 중얼거렸다. 칼베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짚었다. 여전히 그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엘리사는 어리둥절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칼베른에겐 젤리아의 저주가 걸려 있다. 그리고 저주는 신력과 크게 반발하며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신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상 반응은 강하게 일어났고, 심한 경우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혹시 칼베른이 긴장한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엘리사는 자신이 생각한 게 맞는지 확인하고자 칼베른에게 물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그래요?”

엘리사가 정확하게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저주라는 걸 알아들은 칼베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베른이 오늘 축복 의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파티에 참석한 건, 간단한 축복 의식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이상 반응은 참을 수 있기도 했고. 하지만 대주교가 무려 두 명이나 주관하는 축복 의식이라면 말이 달라졌다. 피를 토하고 쓰러질 만큼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피해야 했는데, 사방이 막혀 있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축복 의식을 할 땐, 신력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사방을 틀어막는 경우가 자주 있는 터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모처럼 크라임 대주교의 축복을 받을 기회인데, 황녀만 그 기회를 독차지하는 건 아닌 것 같아 모두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한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게다가 황제가 명령과 다름 없는 말을 하니 핑계를 대고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칼베른은 문득 이쪽을 보고 있는 데아른과 눈이 마주쳤다. 데아른이 입술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웃었다.

‘다 알고 있는 건가.’

자신이 ‘카일 브리슈’가 아닌 ‘칼베른 클라우드’라는 걸. 아니, 이런 계획을 세운 걸 보면 아직 의심 단계일 수도 있었다. 브리슈 백작가는 클라우드 공작가의 방계로 에프란 클라우드의 후손이 아니라서 젤리아의 저주에 걸리지 않았다. 그건 카일 브리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만약 진짜 카일 브리슈라면 축복 의식에 영향을 받지 않을 테고, 칼베른 클라우드라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테니 데아른은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였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뭐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데아른이 파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렸다는 것이다. 오스카도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채고 저런 쪽지를 보낸 게 분명했다. 데아른에게 정체를 들키면 여러모로 일이 복잡해지니,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무슨 수로 이곳을 벗어나지?

“……닉.”

엘리사가 닉을 부르자 닉은 물론 칼베른도 그녀를 쳐다봤다. 엘리사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하며 닉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가 허리에 차고 있는 성검, 나한테 줘.”

느닷없는 요구에 닉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순순히 성검을 넘겨줬다. 엘리사는 들고 있던 부채를 솔레이에게 넘겨주고 두 손으로 성검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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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그리고 마치 중요한 결투를 앞둔 기사처럼 비장하게 심호흡했다.

“아론 경.”

엘리사가 검에 시선을 둔 채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에드윈에게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말고, 잘 잡아주세요.”

“무슨……?”

파지직, 에드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검을 쥔 엘리사의 손에서 보라색 스파크가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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