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의문, 그리고 함정 (1)2021.05.15.
랑쇼 백작 부인이 말하는 역경에는 이혼뿐만 아니라 ‘카일 브리슈’의 등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달라졌다는 건 그 뒤에 칼베른이 장기 휴가를 내고, 공작위 계승을 미루면서까지 잠적한 걸 지적한 거였다. 그냥 정리하기도 힘든 걸, 저렇게 한마디에 담다니 역시 예사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대놓고 칼베른이 어디 갔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고, 감이 익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슬쩍 찔러본 건데 지레 겁을 먹고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죠? 저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엘리사는 전부 다 알아들었지만, 못 알아들은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하게 대답했다.
“이거야 원,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두 분의 금실이 이렇게 좋으니 질투가 나네요. 호호.”
엘리사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랑쇼 백작 부인은 흔들림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소공작님께서 부인을 꼭꼭 숨겨두고 중요한 일이 아니면 보여주지 않으셨던 걸까요?”
“그러게 말이에요.”
다른 귀부인이 맞장구를 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서 소공작 부인과 좀 더 친해지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 참 아쉬워요.”
“저도 항상 그 부분을 아쉽게 생각했어요. 그나마 소공작님께서 계셨을 땐 소공작님에게 부인의 안부를 물으면 됐지만, 이젠 그럴 수도 없으니…….”
“그러고 보니 소공작님은 잘 지내시나요, 부인? 요즘 도통 안 보이시네요.”
이거 봐라. 내가 눈치 없는 척 어물쩍하게 넘기자 바로 대놓고 찔러 대네. 엘리사는 속으로 실소를 터뜨리며 말을 꺼낸 귀부인들의 얼굴을 전부 눈에 담았다. 그들은 칼베른의 편인 척하면서 그를 배신한 배신자였으니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오늘 일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할 생각이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이 남자가 할 거지만.’
엘리사는 곁눈질로 슬쩍 칼베른을 쳐다봤다. 그 역시 엘리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꺼낸 귀부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부인, 왜 말이 없으신가요?”
“아, 죄송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랑쇼 백작 부인을 비롯한 이야기를 주도했던 귀부인들은 물론 뒤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지켜보고 있던 귀부인들도 눈을 반짝이며 엘리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쩐다.’
또 눈치 없이 어물쩍하게 넘어갈까, 아니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줄까. 엘리사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잠시 고민하다가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약간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왕 눈치 없이 군 거, 계속 그렇게 밀고 나가자.
“그게 그이가 잘 지낸다고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못 지낸다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던 거예요.”
“네? 그게 무슨 뜻인가요?”
“말 그대로예요. 그이는 겉으로 봤을 때 잘 지내고 있지만, 속은 아니거든요. 절 무척 그리워하며 예전처럼 저랑 함께 있고 싶다고 하셨죠.”
엘리사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자 칼베른이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녀를 올려다 봤다.
“그러니 잘 지낸다고 하기도, 못 지낸다고 하기도 애매해서 고민했던 거랍니다.”
엘리사는 칼베른의 시선도 무시하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랑쇼 백작 부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제가 잘 지낸다고 대답하는 게 맞나요? 아니면 못 지낸다고 대답하는 게 맞나요?”
“글쎄요…….”
떨떠름한 랑쇼 백작 부인의 모습이 몹시 웃겨서 엘리사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발끝에 힘을 딱 주었다. 그래도 미처 참지 못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걸 본 랑쇼 백작 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슬쩍 바로 뒤에 있는 귀부인에게 눈치를 줬다. 그러자 그 귀부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그럼 부인께선 소공작님과 자주 연락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매일 하고 있답니다.”
“어머나, 그럼 소공작님께서 갑자기 왜 모습을 감추신 건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는 건지 알고 계시겠네요.”
말투나 행동 그리고 눈빛에서 어떻게든 칼베른의 상황을 알아내야겠다는 의지가 확연하게 보였다. 단순히 칼베른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가 걱정돼서 이러는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그러니까 편지를 막는 등 이상한 술수를 부린 거겠지. 이 기회에 클라우드 공작가를 흔들고 위상을 떨어뜨리고 싶어서. 클라우드 공작가는 황태자파를 지탱하는 주축 기둥이었다. 주축 기둥이 흔들리면 지탱하고 있던 것들도 같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같은 황태자파 귀족들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아마 누군가의 달콤한 말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군가는 아마…….
“소공작님께선 지금 어디 계신가요? 어디 계시길래 오늘처럼 뜻깊은 날에도 오지 않으신 거죠?”
“말씀해주세요, 부인. 소공작님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시죠?”
조용히 구경하던 귀부인들까지 나서서 아우성쳤다. 랑쇼 백작 부인이나 앞서 나섰던 귀부인들과 달리 그들은 진심으로 걱정돼서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걱정하는 게 칼베른의 안위일지, 아니면 그들의 안위일지는 모르겠지만.
“부인, 말씀해 주세요!”
조용히 지켜보던 칼베른이 나서려고 하자 엘리사는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리고 귀부인들을 바라보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는 건 그이가 황태자 전하의 특명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랑쇼 백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일 소공작님과 연락하신다면서 아무것도 모르신다는 게 조금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안 될 건 뭐가 있나요?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대도 남편이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엘리사는 그리 말하며 몇몇 귀부인들을 쳐다봤다. 남편이 바람이나 도박 등 사고를 친 전적이 있는 귀부인들이었다. 그중에는 랑쇼 백작 부인도 있었다. 랑쇼 백작은 바람은 물론이고 도박에 술주정, 심지어 마약까지 한 최악의 남자였다. 칼베른이 말한 랑쇼 백작의 약점이 바로 마약이었다. 백작 부인이 친정의 힘까지 빌려 그 사실을 묻으려고 노력한 덕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칼베른의 눈까지 가리진 못했던 모양이다. 엘리사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흘리듯이 말했다.
“백작께서 악마의 장난에 빠져서 참 걱정이 많겠어요, 부인.”
악마의 장난은 마약을 일컫는 속어로 단번에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백작 부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국에서 마약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는 만큼 랑쇼 백작이 마약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물론 가문도 위태로워졌다. 최악의 경우엔 귀족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었다.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랑쇼 백작 부인이야 친정이 있으니, 그곳으로 도망가면 되지만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자식들은 평민으로 살아야 했다. 랑쇼 백작 부인이 걱정하는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래서 랑쇼 백작이 그렇게 패악을 쳐도 이혼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신이 빠져나가면 랑쇼 백작가는 망할 테니까. 자식들을 데리고 가고 싶어도 랑쇼 백작이 놓아주지 않아 그러지 못한다고 들었다.
“사람들이 메인 요리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 그 요리가 맛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곁들인 사이드 디쉬나 음료 덕분이기도 하죠.”
너무 채찍만 휘두르면 상대가 반발심을 가지고 더욱 엇나갈 수 있으니 적당히 당근도 줘야 했다. 엘리사는 힘줄이 설 정도로 부채를 꽉 쥔 랑쇼 백작 부인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도 그리고 그이도 그 점을 항상 명심하고 있답니다.”
랑쇼 백작 부인이 약간 혼란스러운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봤다.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듯한 눈이었다. 엘리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
랑쇼 백작 부인은 그런 엘리사를 탐색하듯 보다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칼베른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옷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걸 그제야 발견한 랑쇼 백작 부인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흐리게 웃었다.
“달이 잠시 구름에 가려져 있었을 뿐인데, 사라진 줄 알고 제가 바보처럼 날뛰었군요.”
뭐지, 이 의미심장한 말은. 마치 ‘카일 브리슈’가 칼베른이 어려진 모습인 걸 안다는 듯한 말투라서 엘리사는 속으론 놀랐지만, 겉으론 전혀 아닌 척 웃었다.
“그럼요. 달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달이 다시 세상을 밝혔을 때를 대비해서 지금은 잠시 쉬고 계세요.”
**** 그들은 엘리사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칼베른이 타이밍 좋게 다리가 아프다며 끼어들었다.
“아이 때문에 먼저 실례할게요.”
덕분에 엘리사는 칼베른을 핑계로 무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임시 칸막이를 치고 커튼으로 가린 휴식 공간에 들어온 엘리사는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후아, 긴장돼서 죽을 뻔했어요.”
칼베른이 픽 웃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긴장한 것치고 잘하던데.”
임시 벽이 굉장히 얇았기 때문에 혹 다른 사람들이 들을 걸 우려해서 목소리가 굉장히 작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엘리사는 다시 묻는 대신 칼베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러자 칼베른이 당황하며 소파 끝자리에 딱 달라붙었다.
“뭐, 하는 거지?”
목소리도 살짝 끊기자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옆에 나란히 앉는 게 처음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라요?”
“…….”
칼베른은 조금 머쓱한 듯 팔을 만지더니 고개를 돌렸다.
“……네가 갑자기 옆으로 옮겨서 조금 놀란 것뿐이다.”
“아아, 목소리가 안 들려서요. 아까 뭐라고 했어요?”
“긴장한 것치고 잘했다고.”
“아아, 당신이 미리 랑쇼 백작가에 대해 알려준 덕분이에요.”
만약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들이 거세게 질문 공세를 던졌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버버 거렸을 것이다.
“그것보다 연회는 언제 시작하는 거죠? 들어온 지 한참 지난 것 같은데.”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가 오셔야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늦는군.”
“황태자 전하나 다른 분들도 안 보이시네요. 스란 왕국의 사신들도 안 보이고요.”
“아마 같이 올 거다.”
“그래요.”
대화가 잠시 끊겼다. 어색한 정적 속에 멀뚱멀뚱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데 칼베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랑쇼 백작 부인이 뭔가 알아챈 것 같던데.”
“아, 당신도 그렇게 느꼈어요?”
엘리사가 한숨을 내쉬며 다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꺼림칙하다고 생각했지만, 물어보기 애매해서 그냥 넘겼어요. 괜히 물어봤다가 찔린다는 걸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고.”
“잘했어.”
칭찬에도 웃을 수가 없는 건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엘리사는 크게 마른세수를 하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하아, 잠깐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아차, 속으로 생각하려던 걸 입 밖으로 말하고 말았네. 엘리사는 황급히 칼베른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좋을 리가. 뜻하지 않게 칼베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걸 사과하려는데,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음악이 사라졌다. 오케스트라 연주가 멈췄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 왔다는 의미기에 엘리사와 칼베른은 곧바로 휴식 공간을 나왔다. 오로지 황족만 드나들 수 있는 황금색 문이 열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오스카, 데아른, 마리아 등 황족들이 순서대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황태자비가 없네.’
신년제나 건국제 등 중요한 행사에 황태자비가 참석하지 않는 것도 의아했지만, 그걸 가지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게 더 의아했다. 뭔가 알고 있거나, 아니면 황태자비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거나, 그도 아니면 황태자비가 있는 걸 모른다는 건데 과연 어느 쪽일까.
‘하여간 클라우드 공작가나 황실이나 온통 의문투성이야.’
뭐 하나도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엘리사는 의문을 삼키며 무릎을 굽히고 황족에 대한 예를 갖춰 인사했다.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앉고, 황제의 왼쪽에 황태자인 오스카가, 그리고 황후의 오른쪽엔 데아른과 마리아 그리고 다른 황족들이 앉았다. 그 직후,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바로 스란 왕국의 사신들이었다. 엘리사는 가장 앞에 있는 사신부터 뒤에 있는 사신까지 쭉 훑어봤다. 스란 왕국은 영토의 절반이 사막이고, 1년 내내 무더운 여름이라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 하나같이 피부가 구릿빛이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도 인상적이었다. 저 모자 이름이 터번이라고 했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그런 이름이었다.
‘총 9명이네.’
미신이지만 홀수는 불길하다고 해서 결혼같이 좋은 일에는 보통 짝수를 맞추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홀수로 왔다니. 특이했다. 한 명이 연회에 참여하지 않은 걸까? 신기해서 빤히 바라보고 있던 엘리사는 가장 뒤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머리카락 색도, 얼굴 모양도, 피부색도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이었지만 딱 하나, 은색 눈동자를 보고 알 수 있었다.
‘에이지?’
저 남자는 바로 에이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