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아니라니까. (89/156)

89화. 아니라니까.2021.05.08.

“부인?”

“아.”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깊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엘리사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상대에게 물었다.

“이 시간에 아론 남작이 여긴 어쩐 일이죠?”

“소공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소공작님이 돌아가셨다면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는요?”

“…….”

에드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실패했구나.’

그래도 직접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엘리사는 에드윈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막 씻고 나온 건지 칼베른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있었다.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 모습으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절망적이었지만, 아직 절망하기엔 일렀다. 아직 마법 약의 효능이 발동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언제 약을 먹었어요?”

“4시간 전 쯤.”

“전처럼 몸이 뜨겁거나, 뭐 그런 반응이 오나요?”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

저 대답은 상당히 절망적인데. 엘리사는 눈썹을 찡그렸다. 같은 약을 먹었는데, 전과 같은 반응이 없다면 이번엔 실패일 가능성이 다분히 높았다.

“뒤늦게 반응이 올 수도 있으니 일단 점심 때까지 기다려 봐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엘리사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치 않고, 기다렸다. 마음 같아선 칼베른의 옆에 찰싹 달라 붙어 있으며 그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싶었지만, 파티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엘리사는 그녀의 침실로 돌아오자마자 하녀들에게 붙잡혀 욕실로 가야 했다. 목욕을 한 뒤에는 화장대에 앞에 앉아 하녀들에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러면서 칼베른이나 에드윈 혹은 헤리엇이 오기를 기다렸다. 만약 칼베른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면 단걸음에 달려와 알려줬을 텐데, 그들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 말인즉, 아직 칼베른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의미. 그래도 혹시 몰라 엘리사는 메이크업이 끝나자마자 다시 칼베른을 찾아갔다. 역시 칼베른은 여전히 어린 아이 모습이었다.

“반응은요?”

“전혀.”

이번에는 통하지 않은 건가.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는 순간 깊은 절망이 찾아왔다. 엘리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하려다 메이크업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쯤 올렸던 손을 다시 내렸다.

“같이 못 가겠네요.”

“아니, 같이 간다.”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엘리사가 깜짝 놀라며 칼베른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 달리 칼베른은 머리를 말끔하게 올렸다. 몸에서 향유 냄새가 나는 겉 같기도 했고.

“정말로 같이 가시게요?”

“그래. 카일 브리슈도 귀족이니 파티에 참석할 수 있어.”

“그건 그렇죠.”

‘카일 브리슈’ 모습으론 마리아나 황후와 맞설 수가 없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칼베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기도 했고. 여차하면 바로 옆에 있는 칼베른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입고 갈 옷은 있어요?”

“그래. 어제 헤리엇에게 준비해달라고 했어.”

그것까지 계산해서 준비해두다니. 준비성 한 번 철저했다.

“그럼 저녁에 보지.”

“잠깐만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사실 미리 준비를 해둔 건 칼베른 뿐만이 아니었다. 엘리사 역시 마법 약이 들지 않아 혼자 가게 됐을 때를 대비해서 미리 생각해둔 게 있었다.

“당신의 편, 그러니까 클라우드 공작가와 황태자 전하의 편을 드는 귀족들의 약점을 알려주세요.”

“약점?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지?”

“그야 그들이 당신의 행적을 의심하고 공격해올 때 방어하며 오히려 역공을 넣기 위해서죠.”

칼베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런 거라면 같은 편이 아니라 적의 약점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요. 이번에 저희가 조심해야 할 사람은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인 귀족들이에요. 같은 편을 들었던 사람이 돌아서면 가장 무섭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대는 그들이 돌아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완전히 돌아서진 않았지만, 돌아설 준비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해요. 그러니 편지가 급격하게 줄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그것에 대해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죠.”

칼베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설마 전부 돌아선 건가.”

“그렇다기 보다 이 일을 주동하고 있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혹시 누가 주동자인지 짐작 가는 사람 있어요?”

주동자라. 칼베른은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내 생각엔 랑쇼 백작일 것 같다.”

“그럼 랑쇼 백작의 강점과 약점부터 알려주세요. 그가 공격해오면 대응할 수 있게 말이죠. 더불어 랑쇼 백작과 가까운 사람들의 강점과 약점도 말씀해주세요.”

“…….”

엘리사의 요구에 칼베른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절 보세요?”

“그대의 판단력이 놀라워서.”

칼베른은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을 세세히 짚어내는 엘리사가 대단하게 느껴지면서 안심이 됐다.

“그대가 내 부인이라서 정말 다행이군.”

옅은 미소와 함께 나오는 칭찬에 엘리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미쳤어.’

이게 뭐라고 심장이 뛰는 건지. 엘리사는 혹 심장 박동 소리가 칼베른에게 들릴 새라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얼른 알려주세요. 저도 암기해야하거든요.”

“그래. 그럼 랑쇼 백작부터 말해주지. 그는…….”

엘리사는 미리 준비해 온 종이와 펜을 들고 칼베른이 말한 것들을 마침표 하나 놓치지 않고 전부 기록했다. **** 엘리사는 파티에 갈 준비를 하면서 기록한 내용들을 달달 외웠다. 기록한 내용들이 생각보다 많아 제때 못 외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제 시간에 암기를 끝냈다.

‘나중에 마차에서 복습해야지.’

마차를 타고 공작저에서 황궁까지 가는데 무려 30분이나 걸리니 복습할 시간은 충분했다. 엘리사는 종이를 작게 접어 레티큘에 넣은 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푸른색 수가 놓인 오프숄더 드레스는 지금 날씨에 입기엔 다소 얇은 감이 있었지만, 캐시미어 숄을 걸치면 되니 괜찮았다. 파티장이 덥기도 했고. 게다가 엘리사는 이 드레스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님, 다른 분들도 준비가 다 되셨다고 합니다.”

“그래.”

이제 나가봐야겠네. 엘리사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 뒤, 밖으로 나왔다. 긴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내려갔을 때였다.

“엘리사!”

뒤에서 닉의 목소리가 들렸다. 별 생각없이 뒤를 돌아 본 엘리사는 닉의 옷차림을 보고 멈칫 했다. 닉의 외투에 박힌 푸른색 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에 놓인 수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아 누가 봐도 한 쌍으로 맞춰 입은 것 같았다.

“뭐야.”

닉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왜 옷이 비슷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누가 너한테 그 옷을 줬어?”

“주긴 누가 줘. 갑자기 파티에 간다길래 어제 황급히 부티끄에 가서 미리 만들어 놓은 옷 중 제일 괜찮은 걸로 사온 건데.”

설마 이 드레스를 만든 부티끄에 간 건가? 그래도 이렇게 비슷한 옷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하필 그런 옷을 닉이 사왔다는 건 더 놀라웠고, 곤란하기도 했다. 누가 봐도 닉과 특별한 사이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정말 우연하게 의상이 겹친 것뿐이지만, 이런 분류의 가십을 좋아하는 귀족들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리아에게 칼베른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인 것처럼 연기해야하기 때문에 이런 옷차림은 더욱 곤란했다. 어쩔 수 없지. 옷을 갈아입는 수밖에. 엘리사는 뒤따라오는 하녀에게 말했다.

“잠시 문제가 생겨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다른 분들에게 잠시 기다려달라고 말해 줘. 그리고 옷을 갈아 입을 거니까 다른 드레스를 준비해 줘.

“네, 부인.”

하녀가 그녀의 명령을 듣기 위해 빠르게 물러났다. 닉이 콧잔등을 찌푸리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뭐야. 나랑 비슷한 옷 입는 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곤란한 거야. 이 차림새로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연인이라고 착각할 테니까.”

“……난 착각해도 상관없는데.”

“뭐?”

“아니, 아무것도.”

뭔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엘리사가 물어보려는 그때, 닉의 뒤로 연보라색 옷을 입은 칼베른과 파란색 옷을 입은 에드윈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

근처에 다가와 선 칼베른은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엘리사와 닉을 번갈아 쳐다봤다. 에드윈도 무척 놀라며 그들을 바라봤다.

‘맙소사.’

하필 저 두 사람이 나타날 게 뭐람. 엘리사는 난감해하며 머리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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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곤란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인……?”

위층으로 올라오던 솔레이도 닉과 엘리사의 옷이 한 쌍의 커플처럼 비슷하다는 걸 발견하고 당황하며 우뚝 멈춰 섰다.

“두 분, 옷이 왜……?”

“우연이에요.”

엘리사는 두 손을 어깨까지 들고 변명했다.

“정말 우연히 비슷한 옷을 입은 거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네요.”

엘리사의 말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들 말없이 엘리사와 닉을 주목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칼베른이었다.

“설마 그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갈 생각이십니까?”

“그럴 리가요. 갈아 입을 거예요.”

때마침 하녀가 돌아오자 엘리사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얼른 갈아입고 올게요.”

그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 침실로 돌아온 엘리사는 벽에 기대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진짜 운도 지지리 없지.”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로 열심히 만든 마법 약은 효과가 전혀 없었고, 모처럼 마음에 든 드레스는 전혀 달갑지 않은 우연 때문에 갈아 입어야 했다.

‘게다가 그 남자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지.’

지금까지 본 칼베른의 표정 중 가장 안 좋았던 것 같았다. 논란 거리가 될만한 일이니 기분이 안 좋은 건 이해했지만, 그렇게까지 인상을 써야 했는지 약간 의문이 들었다.

“마님, 어떤 걸로 갈아입으시겠어요?”

“글쎄.”

엘리사는 하녀가 가지고 온 드레스들을 쭉 훑어봤다. 일단 푸른색이 들어간 드레스는 전부 제외였다. 약간 겹치는 것도 제외하고 나니 남은 드레스는 몇 개 되지 않았다. 그 중 뭘 입을지 고민하며 드레스들을 살펴보던 엘리사는 하나를 선택했다.

“저걸로 입을게.”

  **** 첫 번째 마차엔 칼베른과 엘리사가 탔고, 그 뒤를 따르는 두 번째 마차엔 닉과 크라임이 탔으며 마지막 마차에는 솔레이와 에드윈이 탔다. 마차에 타고, 공작저를 나설 때까지 아무 말도 없던 칼베른이 입을 열었다.

“왜 그 드레스를 선택한 거지?”

역시 물어보는 구나. 하긴, 물어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사가 선택한 드레스는 칼베른의 정장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연보라색 드레스였다. 만약 칼베른이 어른 모습이었다면 그와 한 쌍의 커플처럼 보였겠지만, 어린 아이 모습을 하고 있다 보니 커플이라기보다 사이 좋은 남매 느낌이 강했다.

“제가 왜 이 드레스를 선택했을 것 같아요?”

엘리사가 질문을 되돌려주자 칼베른의 눈썹이 올라갔다. 칼베른이 기분 나쁜 티를 냈지만 엘리사는 꿋꿋하게 다시 물었다.

“대답해주세요. 제가 왜 이 드레스를 선택했을까요?”

칼베른은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엘리사를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인가?”

“제가 칼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드레스를 입어서 기분이 좀 풀어지셨어요?”

“…….”

칼베른은 또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말문을 닫았다. 정곡인가 보네. 엘리사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드레스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카일 브리슈’가 사실 브리슈 백작의 손자가 아닌 ‘칼베른 클라우드’의 사생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당신과 이혼하려 했다고 생각하죠.”

대대적으로 화해한 걸 보여주고, 이혼 신청을 취하했지만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엘리사가 ‘카일 브리슈’가 아고라 사교 클럽에 입학할 때 혼자 보낸 탓에 의심은 더욱 가중됐다.

“그렇다 보니 저랑 당신이 다시 이혼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그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이 드레스를 선택한 거예요. 의심의 근원인 카일 브리슈와 비슷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는 건 모든 걸 용서하고 포용했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요.”

“……그런 깊은 뜻이 있을 줄은 몰랐군.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이 옷을 보고 문득 떠올린 거라서 말해 줄 틈이 없었어요.”

칼베른이 이해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요.”

엘리사는 약간 짓궂게 웃으며 칼베른에게 물었다.

“정말로 제가 이 드레스를 입고 와서 기분이 풀리셨어요?”

“아니.”

“에이, 풀리신 것 같은데요. 아까보다 표정이 훨씬 좋은 걸요.”

“아니라니까.”

“맞는 것 같은데.”

엘리사가 끝까지 주장하자 칼베른이 콧잔등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러니 이 일은 더 이상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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