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용해볼까.2021.05.05.
황후가 크라임 대주교에게 초대장과 선물을? 칼베른은 그에게 보냈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더 의아해하며 헤리엇을 바라봤다. 크라임도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황후 폐하께서 제게 무슨 일로 선물을 보내셨을까요?”
“지금부터 확인해보죠.”
칼베른이 손짓하자 헤리엇이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트레이에는 선물 상자가 잔뜩 실려 있었다. 한 개가 아니었나. 칼베른은 트레이에 실린 상자들을 쭉 훑어보다가 크라임에게 말했다.
“어서 편지를 확인해보시죠.”
“아, 네.”
크라임은 다소 얼떨떨해하며 헤리엇이 내민 금박의 초대장을 받았다. 실링 왁스 위엔 황후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누가 봐도 황후가 보낸 초대장이 맞았다. 칼베른은 크라임이 초대장을 읽을 동안 가장 위에 있는 선물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건 화려한 금박 문양이 박힌 새하얀 신발이었다. 황후가 크라임에게 왜 신발을 선물한 거지? 칼베른은 의아해하며 다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황금색 영대가 있었다. 가장 큰 상자에 든 건 대축일 같이 특별한 날에 입는 순백의 예복이었다.
“허어.”
다른 상자도 확인하고 있던 칼베른은 크라임이 깊은 탄식을 뱉자 그를 돌아봤다.
“무슨 일입니까?”
“그게 황후 폐하께서 내일 있을 스란 왕국 사절단 환영 파티에 절 초대하신답니다.”
그래서 이런 선물을 보낸 거였군. 칼베른은 비로소 이해가 되면서도 의아해서 크라임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초대하는 건지 이유는 안 적혀 있습니까?”
“적혀 있습니다. 저보고 마리아 황녀 전하의 결혼을 축복해달라고 하십니다.”
“황궁 신전에 대주교가 있을 텐데 굳이 당신에게 말입니까?”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나 제 명성을 익히 들었다며 제게 꼭 축복을 부탁한다고 하십니다.”
“흐음.”
흠 잡을 곳 없는 변명이었다. 황궁 신전에 있는 대주교보다 크라임의 능력이 더 뛰어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석연치 않아 칼베른은 크라임에게 다시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그 초대장을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크라임은 흔쾌히 편지를 넘겨주었다. 칼베른은 마침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독했다. 편지에는 크라임이 말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마침표 하나까지 빠짐없이 전부 읽어봤지만 달리 이상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찝찝해서 칼베른은 턱을 쓰다듬으며 편지 내용을 곱씹어 읽었다. 크라임도 같은 생각인지 칼베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소공작님? 파티에 참석할까요?”
“일단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의 초대였다.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거절할 수 없었다. 만약 황후가 예복을 보내지 않았다면,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도 아니어서 더더욱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이것도 계산한 거겠지.’
치밀하기는. 칼베른은 혀를 내두르며 초대장을 다시 크라임에게 넘겨주었다.
“내일 저희와 함께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공작님께서도 파티에 참가하시는 겁니까?”
“일단은요.”
“확실하게 정하신 건 아니군요.”
칼베른은 흐리게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엘리사가 만든 약이 효과가 있다면 어른 모습으로 파티에 참가하겠지만, 만약 효과가 없다면…….
“…….”
칼베른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헤리엇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헤리엇, 자네가 준비해줘야 할 게 있다.”
****
“으아, 죽겠다.”
재료를 준비하느라 밤새도록 약사발을 붙잡고 씨름했더니 지독한 근육통에 걸린 것처럼 팔목과 어깨가 아팠다. 마음 같아선 아무것도 안 하고 푹 쉬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일단 재료들을 섞어야지.”
섞어서 마나를 부여한 다음에, 마나가 스며드는 동안 다음 재료도 준비해야지. 엘리사는 머릿속으로 조합법을 되짚으며 밤새도록 빻거나 즙을 낸 재료들을 오목한 그릇에 순서대로 넣었다. 약간의 오차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단순히 재료를 섞는 일인데도 굉장히 신중을 가해야 했다.
“부인!”
“악.”
그래야 하는데 솔레이가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여는 바람에 엘리사는 한 티스푼만 넣어야 하는 재료를 왕창 넣고 말았다. 과하게 들어간 재료는 기존에 있던 다른 재료들과 반응해서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안 돼…….”
절망한 엘리사는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끼듯 말했다. 힘차게 엘리사를 부르며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본 솔레이가 주춤했다. 그리고 당황한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뭐가 잘못된 건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저, 부인. 괜찮으세요?”
한참 고민하던 솔레이가 약간 겁먹은 듯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사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솔레이에게 버럭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노크를 하지 그랬어요, 솔레이 양.”
“아, 노크 했는데 부인께서 대답이 없으셔서 혹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요…….”
그랬던가. 집중하느라 듣지 못한 모양이다. 솔레이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화를 내선 안 되기 때문에 엘리사는 깊은 한숨과 함께 끓어오르는 짜증을 꾹 눌렀다.
“무슨 일인가요?”
“내일 마리아 황녀 전하께 드릴 결혼 축하 선물이 도착해서요.”
솔레이가 가지고 온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황족에게 줄 선물이라서 그런지 상자부터 고급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2황자가 황녀의 선물에 대해 이상한 말을 했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아, 맞아. 황녀가 칼베른을 포기할 수 있게 그런 의미가 담긴 선물을 주라고 했었지. 잠깐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녀가 준비한 선물이 아니기에 상자 안에 든 게 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솔레이는 알 터.
“상자 안에 뭐가 들어 있나요?”
“귀걸이예요.”
귀걸이라. 특별한 의미없이 축하 선물로 주기 딱 좋은 선물이었다. 데아른이 요구한 것 역시 들어줄 수 없었고.
‘애초에 불가능한 요구였어.’
마리아는 칼베른이 주는 거라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좋아했으니까. 데아른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뿐, 꼭 그렇게 해달라고 강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꼭 데아른이 원하는 대로 해줄 필요는 없지만 자꾸만 신경 쓰였다.
“왜 그러세요, 부인?”
“아니, 아무것도요.”
솔레이에겐 말할 수 없는 내용인지라 엘리사는 고개를 저은 뒤, 다른 걸 물었다.
“그래서 이 선물을 제게 가지고 온 건 저보고 황녀 전하께 선물을 드리라는 거죠?”
“네. 소공작님이 안 계시니 부인께서 그 역할을 대신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요.”
약이 효과가 있어 칼베른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도 파티에 참석하겠지만 아직까진 미정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받아두는 게 맞는 것 같아 엘리사는 솔레이에게 선물 상자를 받았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곱게 달린 리본 틈 사이에 작은 카드가 있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부인. 아까 놀라게 한 건 정말 죄송해요.”
솔레이가 나가고, 엘리사는 카드를 확인했다. 카드에는 『축하드립니다.』라고 아주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칼베른이 직접 적었는지 그의 글씨체였다.
“흐음, 이걸 이용해볼까.”
잘 이용하면 황녀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서 마리아가 칼베른을 향한 마음을 접는다면 칼베른에게도, 데아른에게도 이득이었다. 자신 역시.
“……난 왜 이득이지?”
마침표를 찍은 생각에 꼬리표가 붙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왜 그런 결론을 내린 건지 곰곰이 생각해봤자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가끔 칼베른과 관련들이 생각이 이런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똑똑-.
“깜짝이야.”
난데없이 노크 소리가 들리자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문을 쳐다봤다. 솔레이가 다시 돌아온 걸까?
“누구죠?”
“접니다, 부인.”
앳된 목소리. 칼베른이었다. 마침 그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잘됐다 싶어 엘리사는 냉큼 대답했다.
“들어와요.”
칼베른은 들어오다 엘리사가 들고 있는 선물 상자를 보고 멈칫 했다.
“왜요?”
“왜 그대가 선물 상자를 들고 있지?”
“솔레이 양이 주고 갔어요. 당신이 없으니 저보고 황녀 전하께 전해달라고 말이죠.”
“…….”
엘리사는 응당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받은 건데 칼베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아니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지 눈썹 사이를 좁혔다. 뭐야, 왜 저러는 거지? 엘리사는 의아해하며 칼베른에게 되물었다.
“솔레이 양에게 다시 선물을 돌려줄까요?”
칼베른은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닫고 대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그리고 엘리사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마법 약 제조는 잘 되고 있나?”
마법 약 이야기가 나오자 엘리사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잘 안 된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 실수를 좀 해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 시간엔 끝낼 수 있어요.”
그러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재료들을 빻아야 했다. 그걸 생각하니 팔목이 더 아파오는 것 같았다. 누가 도와주면 좋으련만.
‘아, 닉이 있지!’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는 재료를 즙이 날 정도로 과하게 빻는 등 망칠 위험이 있어 맡길 수 없었지만 닉은 아니었다. 그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엘리사는 칼베른과의 볼일이 끝나는 대로 닉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며 칼베른에게 방금까지 보고 있던 카드를 보여주었다.
“이거, 칼이 쓴 거죠?”
“그런데? 문제가 있나?”
“딱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이번 기회에 황녀 전하께서 당신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게 다른 내용을 쓰면 어떨까 싶어서요.”
칼베른이 흥미롭다는 듯 엘리사를 바라봤다.
“예를 들면 어떤?”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황족들은 클라우드 공작가와 당신에게 걸린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죠?”
“그래.”
“그리고 황녀 전하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신과 제가 서로 사랑하는 척 연기하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거고요.”
칼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렇게 적는 건 어때요? 제가 부인 없이 못 사는 몸이 된 것처럼, 황녀 전하 역시 그분과 애틋한 관계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이죠.”
칼베른이 미묘하게 굳었지만, 그 얼굴을 보지 못한 엘리사는 계속 말했다.
“물론 그것만 적으면 또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슬쩍 언급하면 생각이 달라지실 거예요.”
마리아는 칼베른이 진짜 엘리사를 사랑하게 돼서, 그래서 그녀의 수명만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엘리사에게 공작가의 저주를 알려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저 역시 제 수명을 기꺼이 줄 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연기할…… 왜 그래요?”
뒤늦게 칼베른의 굳은 얼굴을 본 엘리사가 물었다. 칼베른은 크게 마른 세수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제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좋아요.”
“그게 아니라…….”
칼베른은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의 생각대로 하지. 만약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파티에 참석한다면, 카드에 적는 게 아닌 황녀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그것도 좋네요.”
“그럼 바로 카드를 작성해서 보내주도록 하지. 그리고 내일 크라임 대주교도 함께 가기로 했으니 알아두도록.”
“대주교님도 가신다고요?”
갑자기 왜? 예정에 없던 사람이 갑자기 끼어들자 엘리사가 당황하며 물었다.
“황후가 황녀의 결혼을 축복해달라며 크라임 대주교를 파티에 초대했다.”
“정말 그 이유뿐인가요?”
황후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마리아의 모친이고, 전에 경매 파티에서 본 게 있어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나도 의심되는 게 많지만, 표면적인 이유가 완벽해서 거절할 수가 없어.”
“파티에 입고 갈 예복이 없다고 핑계되는 건 어때요?”
“초대장과 함께 예복도 보냈더군.”
아. 엘리사는 짧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역시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똑같았다.
“그럼 나중에 보지.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도와줄 테니까.”
**** 칼베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헤리엇을 통해 새로 작성한 카드를 보냈다. 카드에는 엘리사가 말한 대로 적혀 있었다. 엘리사는 그것들을 서랍 깊숙한 곳에 넣은 뒤 닉을 찾아갔다. 애석하게도 그는 크라임과 함께 외출 중이었다. 왜 다들 꼭 필요할 땐 보이지 않는 건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엘리사는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재료 준비를 다시 했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밤이 깊어지기 전에 마법 약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엘리사는 곧바로 약을 들고 칼베른을 찾아갔다.
“전에 보니까 효과는 반나절 밖에 안 되는 것 같으니, 동이 틀 무렵에 마시면 시간적으로 딱 맞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아침에 상태를 확인하러 올게요.”
‘이번에도 제발 마법 약이 통하기를.’
마리아에 이어 황후까지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여차하면 귀족들과도 기싸움을 해야 할 수 있기 때문에 엘리사는 잠들기 전, 이름을 아는 온갖 신들에게 간절히 빌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을 못 이루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렇게 숙면을 취한 엘리사는 눈을 뜨자마자 칼베른을 찾아갔다. 지난 번 경험을 들어봤을 때, 마법 약이 제대로 먹혔다면 지금 쯤 어른이 됐을 것이다.
‘과연 성공했을까?’
엘리사는 기대 반, 걱정 반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칼베른의 침실 문을 노크했다. 그러자 안쪽에서부터 문이 열리면서 커다란 그림자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림자만 봤을 땐 어른이었기 때문에 엘리사는 기대하며 문을 열고 나온 상대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