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맡겨만 주세요. (87/156)

87화. 맡겨만 주세요.2021.05.01.

“며칠 전부터 칼의 앞으로 오는 편지가 급격하게 줄어든 거 아세요?”

칼베른은 엘리사가 올랜드 공작의 일로 그에게 뭐라고 하는 등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출할 거라고 생각했다.

“편지?”

그런데 뒤이은 엘리사의 말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칼베른이 처음 듣는다는 듯 되묻자 엘리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모르셨군요.”

“대부분 편지는 에드윈의 손에서 처리되니까.”

“그건 그렇죠.”

헤리엇이 칼베른의 앞으로 온 편지를 1차로 확인해서 솔레이에게 건네주면 솔레이가 모아서 2차로 확인한 뒤, 에드윈에게 건네준다. 솔레이가 오기 전엔 엘리사가 솔레이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렇게 편지를 받은 에드윈은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그의 선에서 정리할 수 있는 건 정리하고, 중요하거나 애매한 건 칼베른에게 건네주었다. 그렇다 보니 칼베른의 앞으로 하루에 수십 통의 편지가 와도 정작 칼베른이 확인하는 건 한 통이 될까 말까였다. 일주일 내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니 칼베른이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솔레이 양의 말에 의하면 닷새 전부터 편지가 줄어들었대요. 저한테 와서 말한 건 이틀 전이고요.”

“그래?”

“네. 그래서 묻는 건데, 닷새 전에 귀족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귀족들이 갑자기 편지를 보내지 않을만한 큰일 같은 거요.”

“글쎄.”

닷새 전에 있었던 일이라. 칼베른은 진지하게 고민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시온과 검술 대련을 한 건 나흘 전이었고, 엘리사와 이혼 문제로 법원에 갔던 건 엿새 전이였다. 설마 엘리사와 이혼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편지가 줄었을 리는 없고.

“모르겠군.”

“그럴 것 같았어요. 저도 문제점을 찾아보려고 당신의 스케줄을 쭉 살펴봤는데,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케줄 노트를 보고 있었던 거였나. 칼베른은 그제야 엘리사의 행동을 이해하며 그녀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스케줄 노트를 쭉 살펴봤다. 기사단 회의, 기사단 단체 훈련, 귀족 회의, 분담 회의, 영지 보고, 세금 조정, 이혼 조정일…… 테포라 사교 모임.

“그래도 올랜드 공작이 칼의 행방을 의심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요.”

칼베른은 수첩을 훑던 눈동자를 들어 엘리사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지?”

“올랜드 공작이 저한테 물어봤어요. 당신이 정말로 황태자 전하의 특별 임무를 받은 게 맞냐고요.”

“…….”

“그래서 저는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하니 하긴 다른 귀족들도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겠냐고 비웃더라고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칼베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칼베른은 수첩을 소리나게 덮었다.

“귀족들이 내 행적을 의심하고 있군.”

“공작위 계승식을 미룬 데다가 사교계에도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으니 당연히 의심하겠죠.”

이혼 신청을 취하한 날, 잠깐 모습을 비추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인지라 그것만 가지곤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테레사 부인과 공작……각하께서 짧은 텀을 두고 돌아가셨잖아요.”

엘리사가 공작 각하, 라고 말할 때 잠시 주춤하는 걸 캐치한 칼베른이 눈매를 얇게 접었다. 생각해보면 엘리사는 제르나 남작이 죽은 이후 클라우드 공작을 굉장히 꺼렸다. 그땐 단순히 클라우드 공작이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세간에 클라우드 공작가가 저주에 걸렸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는데, 당신이 돌연 모습을 감췄으니…….”

“뭐?”

엘리사가 갑자기 왜 클라우드 공작을 꺼리는 건지 생각하던 칼베른은 뒤이은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세간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정말인가?”

엘리사가 약간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모르셨어요?”

“전혀.”

“이런.”

칼베른이 주변에 무심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엘리사는 약간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그녀 역시 결혼식 전날, 제르나 남작이 알려줘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소문이 어떻게 돌고 있지? 이상하게 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에요. 그저 클라우드 공작가의 일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찍 죽는다, 뭐 그런 식으로 돌고 있을 뿐이죠.”

말하고 보니 실제로 젤리아가 클라우드 공작가에 건 저주와 비슷해서 엘리사는 입술을 일자로 그리며 칼베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괜히 말했나.’

편지가 갑자기 줄어든 이유를 찾으려면 말할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래도 후회가 됐다. 엘리사는 괜히 셔벗 컵을 만지작거리며 칼베른의 눈치를 살폈다. 칼베른은 뭔가 생각하는 듯 물끄러미 수첩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군.”

“뭐가 그렇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긴.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엘리사는 궁금했지만, 물어봤자 알려줄 것 같지 않으니 구태여 묻지 않았다.

“하여간 올랜드 공작이 그런 말을 한 것도 그렇고, 귀족들이 갑자기 편지를 보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저들이 칼의 행방을 의심하는 건 확실해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그러니 얼른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셔서 당신이 건재하다는 걸 그들에게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건 나 역시 바라는 바다.”

칼베른은 꽉 움켜쥔 제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 손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런 볼품없고 연약한 몸뚱이로 지내는 건 그 역시 사양이었다.

“문제는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모른다는 거지.”

“그건 그렇죠.”

엘리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크라임 대주교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저주는 확실히 아니래요?”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확실한 건 아니야. 갑자기 주기가 오는 바람에 확실하게 확인하지 못했거든.”

“그래요…….”

크라임 대주교가 오면 칼베른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찾긴 커녕 오히려 일이 이상하게 더 꼬여버렸다. 그 사실이 몹시 답답한 엘리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에드윈에게 말해서 귀족들의 동향을 파악하라고 해야겠군. 황태자 전하께도 부탁해야겠어.”

“저도 솔레이 양에게 사교계를…… 아, 필요가 없겠네요. 당장 내일 모레 스란 왕국 사절단 환영 파티가 있으니까.”

한 발 늦게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엘리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짚었다. 파티에 참석하면 필시 칼베른의 행적을 궁금해하는 귀족들이 이것저것 물어올 텐데 그들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중에 올랜드 공작처럼 제 속을 뒤집어 놓는 놈들이 분명 있을 테니 더욱 짜증이 치솟았다.

“미안하다.”

의도치 않게 엘리사에게 또 짐을 짊어주게 된 칼베른이 한숨을 내쉬며 사과했다.

“환영 파티 때만이라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잠깐이라면 방법이 있어요.”

절망과 짜증으로 물들어 있던 엘리사의 눈동자에 밝은 빛이 감돌았다.

“왜, 이혼 숙려 기간이 끝나고 법원에 가야 했던 날, 잠깐이지만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었잖아요. 그러니 같은 약을 쓰면 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요?”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에게 짐이 아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어두웠던 칼베른의 표정도 약간 밝아졌다.

“가마솥이 없어도 그 약을 만들 수 있나?”

“물론이죠. 제조법도 알고 있고, 재료도 충분하니 내일 안에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부탁하지.”

“맡겨만 주세요.”

엘리사가 주먹을 옴팡지게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럴 게 아니라 얼른 만들러 가야겠어요. 그럼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엘리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빠르게 사라졌고, 그녀가 있었던 자리엔 거의 녹은 셔벗과 그의 스케줄 노트만 남아 있었다. **** 칼베른은 헤리엇에게 엘리사가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건 뭐든 지원해주라고 말해둔 뒤, 에드윈을 침실로 불렀다. 잠시 후, 에드윈이 서류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칼베른이 결재해줘야 할 서류였다. 에드윈은 가지고 온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보고했다.

“소공작님을 습격한 놈들은 잡지 못했습니다만, 절 습격한 놈들은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추궁했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뜻밖의 사실?”

“네. 그들은 소공작님을 습격한 놈들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 말인즉 두 패거리의 배후가 다르다는 의미. 칼베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배후가 누군지 알아냈나?”

칼베른은 에드윈에게 물어보긴 했지만 기대하진 않았다. 거기까지 알아내기엔 시간이 부족했을 테니까.

“네.”

그런데 에드윈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칼베른은 약간 놀라며 에드윈에게 물었다.

“누구지?”

“그 남자입니다.”

불분명한 대명사였지만, 누굴 말하는 지 알아들은 칼베른의 표정이 와장창 구겨졌다.

“내가 생각하는 그 남자가 맞는 건가?”

“네, 맞습니다.”

“하?”

칼베른이 헛웃음을 지으며 팔짱을 끼고 소파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었다.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다가 안 될 것 같으니 이빨을 드러내는 건가.”

“2황자의 추적을 우리가 한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2황자가 그 남자를 추적하는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까요.”

“그럴 수도 있지.”

칼베른은 잠시 생각했다가 물었다.

“설마 내가 어려진 걸 그 남자가 알아챈 건 아니겠지?”

“좀 더 확실한 건 알아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반응을 살펴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남자를 쫓을까요?”

“그래. 추적을 재개하지. 습격을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알겠습니다.”

에드윈이 칼베른의 명령을 꼼꼼하게 수첩에 기록했다. 칼베른은 말없이 에드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가 수첩을 안주머니에 넣는 순간 입을 열었다.

“닷새 전부터 내 앞으로 오는 편지가 급격하게 줄었다고 하던데. 알고 있나?”

“네?”

에드윈이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예상했지만 역시 그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알았다면 엘리사가 그에게 말하기 전에 에드윈이 먼저 말했을 것이다. 에드윈은 잠시 멍하니 칼베른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요즘 다른 일로 바빠서 편지에 관한 건 솔레이 양에게 거의 맡겨뒀는데, 그런 일이 생겼을 줄이야. 지금 당장 솔레이 양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겠습니다.”

“됐다.”

솔레이에게 물어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면 엘리사가 진작 알아냈을 것이다.

“솔레이보단 귀족들의 동향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아. 특히 올랜드 공작을 파헤쳐 봐라.”

중립파 귀족인 올랜드 공작이 클라우드 공작가까지 찾아와 자신의 행적을 파헤치는 건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내 예상이지만 2황자가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사람을 붙여 주시해.”

“알겠습니다.”

에드윈이 나가고, 칼베른은 한숨을 쉬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예상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느닷없이 어려지는 바람에 발목이 묶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올랜드 공작이 데아른과 손을 잡는다면 여러모로 굉장히 힘들어졌다. 자칫 황태자의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부디 올랜드 공작이 단순한 호기심 혹은 시온의 일로 복수하고 싶어 그런 것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 다음 날, 엘리사는 아침 식사에 불참했다. 약을 만드느라 동이 틀 무렵에 자는 바람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탓이었다.

“저도 오늘은 속이 안 좋아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오지 않자 닉도 아침 식사를 먹지 않고 바로 식당을 나갔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칼베른은 닉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숨을 쉬고 있다는 것조차 싫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닉을 내쫓고 싶었으나, 크라임이 있으니 그러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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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베른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크라임과 작은 응접실에서 잠시 대화를 나눴다.

“다시 신전에 가서 확인해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안 그래도 이상한 모습을 보였는데, 또 가는 건 소문이 날 위험부담이 있어 그 신전에는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전에 가지 않으면 소공작님이 이렇게 되신 이유가 저주 때문인지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엘리사가 만든 마법 약이 들었던 걸 보면 마법일 가능성이 높으니 거기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요.”

“그러시군요.”

“여기까지 오시게 했는데 죄송합니다.”

칼베른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크라임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순례를 하려고 했는데, 이참에 하면 되니까요.”

“좋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라임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불현 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리엇이었다. 그는 꽤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든 칼베른이 일어서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황후 폐하께서 초대장과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황후가 초대장과 선물을? 결코 흔치 않은 일에 칼베른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나에게 말이냐?”

“아니요.”

헤리엇은 칼베른이 아닌 크라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크라임 대주교님께 보내는 선물과 초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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