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맹랑한 계집.2021.04.28.
올랜드 공작이 찾아왔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에 엘리사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하녀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 거지?”
“소공작님을 보러 오셨다고 합니다.”
칼베른은 공식적으로 부재중이었다. 올랜드 공작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 구태여 찾아와 칼베른을 찾는다는 건 고의였고, 다른 목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미치겠네.’
왜 하필 이럴 때 칼베른이랑 에드윈이 없는 건지. 엘리사는 차오르는 불안감과 긴장감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솔레이도 올랜드 공작의 등장에 긴장했는지 초조해하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어떡하죠, 부인?”
“어떡하긴요. 일단 맞이해야죠.”
여기까지 찾아온 손님을 얼굴도 보지 않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하물며 상대는 클라우드 공작가와 권력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올랜드 공작이었다. 나중에 괜한 말이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성심성의껏 맞이해야 했다.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하며 하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각하께선 어디 계시지?”
“총괄 집사님께서 바로 응접실로 안내하셨습니다.”
“그래.”
올랜드 공작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으니 엘리사는 솔레이와 헤어지고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로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다리에 쇠고랑을 찬 것처럼 무거웠다. 혼자서 올랜드 공작을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현재 귀족들은 오스카를 미는 황태자파, 2황자인 데아른을 미는 2황자 파, 그리고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중립 파, 이렇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올랜드 공작은 중립 파의 수장으로 대외적인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전에 저녁 식사 때 칼베른이 말한 것처럼 질서와 위계를 중요시하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엘리사가 느낀 올랜드 공작은 굉장히 오만하고 권위적인 사람이었다. 공작이라는 타이틀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오만한 건 클라우드 공작도 마찬가지였지만, 올랜드 공작은 그보다 더 심했다. 그는 하급 귀족이나 평민들을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 하찮게 여기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안에는 고위 귀족과 결혼해서 신분 상승한 사람들, 바로 엘리사 같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
문득 올랜드 공작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린 엘리사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엘리사가 올랜드 공작을 처음 본 건 그녀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올랜드 공작은 결혼식에 초대된 중요한 귀빈 중 한 명으로, 엘리사는 칼베른과 함께 직접 그에게 인사를 갔었다.
“이렇게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공작 각하.”
엘리사의 인사에 올랜드 공작은 곁눈질로 그녀를 쓱 한 번 훑어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각하?”
혹시 못 들은 건가 싶어 엘리사가 다시 그를 불렀지만, 이번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완벽한 무시였다.
“다들 잘 지냈나?”
그런 와중에 다른 귀족들과는 반갑게 인사했다. 전부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이었다. 그나마 그의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쓸모’가 있으므로 도구로서 상대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사는 그게 아니니 무시한 것이다. 그녀가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 됐어도 출신이 남작가의 영애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미치겠네.’
그런 혼자서 올랜드 공작을 상대하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이런저런 생각하는 사이 어느덧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옷맵시를 다듬은 뒤, 응접실 문을 두드렸다.
“마님.”
헤리엇이 안쪽에서 문을 열었다. 엘리사는 눈짓으로 헤리엇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올랜드 공작은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람이 왔으면 쳐다보기 마련이건만, 그의 시선은 응접실의 넓은 창을 통해 보이는 넓은 정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각하.”
엘리사가 불러도 올랜드 공작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도 무시하는 건가.’
예상했던 일인지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숨은 나왔다. 엘리사는 헤리엇에게 이만 나가보라는 눈짓을 한 뒤, 올랜드 공작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올랜드 공작은 그녀를 돌아봤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난 클라우드 소공작을 불렀는데, 왜 네가 앉는 거지?”
소공작 부인이나 엘리사 양도 아니고 ‘너’라니. 마치 자신을 그의 사용인 취급하는 듯한 하대에 엘리사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겉으론 웃으며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소공작님께선 지금 부재중이십니다.”
“요 며칠 기사단에도 안 나온 것 같던데. 어딜 간 거지?”
“글쎄요. 저도 황태자 전하께 특별 임무를 받아 나갔다는 것 말고 자세한 건 모릅니다.”
“정말 황태자 전하께 특별 임무를 받은 게 맞나?”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엘리사를 바라보는 푸른색 눈동자가 굉장히 날카롭고 예리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긴장이 되고 입안이 바짝 말라 엘리사는 차를 마시며 어떻게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올랜드 공작이 진짜 뭔가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떠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틈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거였다. 틈을 보이는 순간 집요하게 파고들 테니까. 사냥감을 노리는 야수에게 틈을 보여주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왜 대답이 없지?”
“죄송합니다, 각하. 공작 각하께서 그리 물어보시니 잠깐 제가 아는 게 있는지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역시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제가 소공작님께 들은 건 그게 전부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웃는 얼굴로.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게. 지난 5년간 갈고 닦은 연기 실력이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엘리사의 수준급 연기에 넘어간 올랜드 공작이 픽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하긴 다른 귀족들도 모르는데 일개 남작 가문의 영애 따위가 알 리가 없지.”
사실 올랜드 공작이 오늘 찾아온 이유가 내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올랜드 공작은 엘리사의 성격을 자꾸 긁었다.
“하, 하하…….”
마음 같아선 불같이 쏘아붙인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상대가 공작인 만큼 엘리사는 그러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인내심이 남아 있어 참을 수가 있었다.
“소공작님께 하실 말이 있으시다면 제게 대신 말씀해주세요.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됐다. 내가 뭘 믿고 너한테 말하지? 말해줘봤자 내 말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할 게 뻔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남아 있던 인내심이 완전히 증발했다.
“그러시군요.”
엘리사가 산뜻하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무시하고 깎아내렸는데, 화를 내긴커녕 웃으니 올랜드 공작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엘리사를 주시했다. 엘리사는 그런 올랜드 공작을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뒤, 종을 흔들었다. 응접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헤리엇이 냉큼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마님.”
엘리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올랜드 공작 각하께서 이만 돌아가신다고 하니 마차를 준비하렴.”
“뭐라?”
올랜드 공작의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다. 올랜드 공작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지금 날 경시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제게 말씀을 안 하신다고 하시니 더는 나눌 대화가 없는 것 같아 배웅해드리려고 한 것뿐입니다.”
“그걸 왜 네가 정하지? 건방진 것.”
올랜드 공작이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이게 클라우드 공작가가 손님을 대하는 방식인 모양인가? 아니면 안주인이면서 배운 게 없는 건가?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지……!”
“무례한 건 제가 아니라 공작 각하이십니다.”
엘리사가 올랜드 공작의 말허리를 가로채자, 공작의 푸른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마님.”
그 눈을 본 헤리엇이 약간 당황하며 엘리사를 만류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오히려 헤리엇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한 뒤, 올랜드 공작을 똑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했다.
“공작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 클라우드 공작가의 안주인입니다. 일개 남작 영애가 아닌 클라우드 소공작 부인이고, 클라우드 공작가의 일원이지요.”
“!”
“그런데 공작 각하께선 거듭 절 무시하시고, 제게 무례한 언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공작 각하를 손님 대접하며 존중해드리겠습니까?”
점점 표정이 굳는 올랜드 공작과 달리 엘리사는 따뜻한 봄날에 만개하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으며 드레스 자락을 잡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공작 각하께서도 저 같은 사람의 배웅 따위를 원하지 않을 테고, 저도 일이 바빠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부디 조심해서 돌아가시길.”
****
“하, 맹랑한 계집 같으니.”
엘리사가 맹랑한 성격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떨 줄은 몰랐다.
“감히 남작가의 영애 주제에 공작인 날 능멸하려고 들다니!”
올랜드 공작은 엘리사를 떠올라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대접이었기에 기가 차고 짜증이 났다. 그것도 칼베른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감히 제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을 남작가의 영애한테 무시당했다는 게 몹시 화가 났다. 더 화가 나는 건 엘리사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냥 클라우드 공작가를 나왔다는 것이다. 그뿐일까. 하나뿐인 귀한 손자가 흠씬 얻어맞고 돌아왔다. 그것도 고작 사생아 따위에게. 정당한 검술 대련이고, 손자가 먼저 대련 신청을 한 거라 그 부분에 대해선 뭐라고 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화는 났다.
“그 계집이랑 사생아 놈에게 주제 파악을 시켜줬어야 했는데.”
올랜드 공작은 그러지 않을 걸 후회하며 미간을 짚었다. 시선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밖의 풍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눈은 풍경을 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리는 다른 생각을 했다. 푸른 눈동자를 무서울 정도로 차갑게 굳히며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올랜드 공작이 마차 창문을 열었다. 달그락-. 그러자 마차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고 있었던 호위 기사가 옆으로 바짝 붙었다. 올랜드 공작은 쓱 주변을 한 번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호위 기사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2황자 전하께 가서 그리 하겠다고 전해라.”
****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이른 오후.
“올랜드 공작이 찾아왔었다고?”
에드윈과 함께 외출했다가 돌아온 칼베른은 헤리엇에게 뜻밖의 소식을 듣고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마님께서 잘 대처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올랜드 공작의 꼬장꼬장한 성격을 알기에 걱정됐다.
“엘리사는 어디 있지?”
“정원에 계십니다.”
칼베른은 곧바로 엘리사가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왔어요?”
엘리사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긴 벤치에 앉아 달콤한 과일 셔벗을 먹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올랜드 공작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일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거나 무척 분개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태연하니 칼베른은 다른 의미로 황당해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요?”
“……괜찮은 건가?”
“뭐가요?”
“올랜드 공작이 찾아왔다고 들었는데.”
“아아.”
그제야 칼베른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엘리사는 보고 있던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두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거라면 잘 해결됐어요. 아니지, 올랜드 공작이 무척 화를 내면서 돌아갔으니 잘 해결된 건 아닌가?”
“올랜드 공작이 무척 화를 냈다고?”
“네. 제가 좀 열 받게 했거든요.”
“뭐?”
칼베른이 놀란 듯 되묻자 엘리사는 약간 멋쩍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올랜드 공작이 먼저 절 무시하고 화나게 했다고요.”
“올랜드 공작이 그대에게 뭐라고 한 건가?”
“했죠.”
엘리사는 올랜드 공작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칼베른에게 말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칼베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는 미간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때문에 괜히 그대만 곤욕을 치렀군. 미안하다.”
“괜찮아요. 갑자기 찾아와서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말했다시피 저도 복수를 했거든요.”
“이 일에 대해선 나 역시 올랜드 공작에게 이야기해두지.”
“그러려면 얼른 원래 몸으로 돌아오셔야겠네요. 그 몸으론 올랜드 공작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요.”
정곡이 찔린 칼베른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눈에 엘리사가 읽고 있던 책의 표지가 들어왔다.
“?”
그건 평범한 책이 아니라 수첩, 그것도 칼베른의 스케줄 노트였다.
‘왜 이걸 읽고 있는 거지?’
칼베른은 의아해하며 엘리사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엘리사가 옆으로 옮겨 앉으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일단 좀 앉을래요?”
엘리사가 안 좋은 소리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기우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긴장이 돼서 칼베른은 말라오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의자에 앉았다.
“할, 말이 뭐지?”
말도 약간 끊겼다. 누가 봐도 이상해 보였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