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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Secret (8) (83/156)

83화. Secret (8)2021.04.17.

“그나마 에프란이 저주를 풀려고 노력한 덕분에 목숨이 경각에 달아 폭주하기 전까진 수명을 흡수하는 걸 조절할 수 있게 됐다.”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칼베른은 엘리사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 자신을 경멸하는 눈으로 보고 있을 테니까. 그 얼굴을 어떻게 보겠는가.

“끔찍한 저주지만 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수명을 빼앗는 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 여러 사람들에게서 조금씩 가져오면 되니까. 그럼 황녀 때처럼 그 사람은 바로 죽지 않아.”

“…….”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서 가져오는 건 안 돼. 누군가를 마음에 담고, 그 사람을 갈망하는 순간부터 내가 수명을 가져올 수 있는 상대는 그 사람뿐이거든.”

칼베른의 얼굴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난 누군가를 사랑하면 절대 안 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이고 비탄과 절망에 빠져 결국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 테니까.”

젤리아가 원한 건 바로 이거겠지. 그녀의 손을 더럽혀 에프란과 그의 후손들을 죽이기보다 그들 스스로 깊은 절망의 길로 빠져들길 바라며 이런 끔찍한 저주를 내린 게 분명했다. 충격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그들 사이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엘리사는 해머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탁자를 바라봤다. 좋은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부상이 낫는 건 분명 좋은 능력이었으니까. 그러니 칼베른의 부상이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나은 것도 신력과 비슷한 좋은 능력일 거라고 생각해서 캐물은 건데 저런 끔찍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클라우드 공작가의 모든 일들이 하나둘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가령 죽은 클라우드 공작이 엘리사를 칼베른의 짝으로 선택한 이유가 그녀라면 칼베른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과 칼베른이 절대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 칼베른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을 때 클라우드 공작가에 깊게 관여하게 될 텐데 괜찮겠냐고 되물었던 것도 전부 젤리아의 저주 때문이었다.

“테레사 부인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것도 그 저주 때문인가요?”

“그래. 고모님께선 남편인 테레사 경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거든. 테레사 경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마음이 변했다면 뒤늦게라도 다른 사람의 수명을 흡수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미련하게도 테레사 부인은 그러지 못하고 테레사 경에게 빼앗은 수명만큼만 살다가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럼 클라우드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신 이유도……?”

칼베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 부인과 같은 이유라는 의미였다. 테레사 부인의 일기나 클라우드 공작의 이상 행동을 봤을 때부터 얼추 예상했지만 역시 그들의 죽음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럼 붉은 마녀는…… 그 젤리아라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겠네요.”

그제야 칼베른은 고개를 들고 엘리사를 쳐다봤다. 퍽 놀란 얼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테레사 부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일기장에서 봤어요.”

엘리사는 복도에서 칼베른과 클라우드 공작의 대화를 엿들은 사실은 숨겼다.

“단순히 연금술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아니지, 연금술사는 맞지. 젤리아는 뛰어난 마법사이자 연금술사라고 했으니까.

‘대단한 사람이긴 하네.’

연금술과 마법, 모두 마력을 사용하긴 하지만 본질이 완전히 다르므로 두 가지를 모두 다룰 줄 아는 사람은 한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다. 게다가 흑마법에 저주까지 성공했으니, 이 분야에선 단연 일인자라고 지칭할 수 있었다. ……그 이유가 다소 불순하긴 했지만.

‘이해는 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건 그만큼 아프고 힘든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연인이었으니 배신감은 더 심했을 것이다. 젤리아가 그런 잔인한 선택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죄 없는 후손들에게까지 저주를 대물림해주는 건 좀 너무한 것 같은데. 엘리사가 눈을 찡그렸다. 잠깐의 대화가 끝나고 또 침묵이 흘렀다. 칼베른은 흘끗 엘리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이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할까. 이런 저주받은 가문에는 지낼 수 없다고, 자리를 박차며 나갈까? 칼베른은 당연히 그럴 거로 생각했는데, 한참 만에 엘리사가 한 말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났다.

“미안해요.”

엘리사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칼베른을 바라보며 사과했다.

“이런 심각한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알려달라고 고집을 부려서 정말 미안해요.”

자색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왜 사과를 하는 거지?”

칼베른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묻자, 이번엔 엘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니. 아픈 부분을 파헤쳤으니 당연히 사과해야죠.”

당연하다고? 아니, 당연할 리가 없다. 우연히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경멸하고 도망쳤으니까. 에드윈이나 헤리엇처럼 드물게 모든 걸 알고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아니면 오스카처럼 그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거나. 하여간 엘리사처럼 사과를 하는 사람은 여태껏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사과를 들으니 당황스럽고 얼떨떨했다. 칼베른은 어떻게 반응을 하면 좋을지 몰라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엘리사가 약간 놀라며 물었다.

“울어요?”

운다고? 누가? 내가? 칼베른은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축축한 물이 만져졌다.

‘진짜 우는 건가.’

도대체 왜? 뭐가 슬퍼서? 아니면 기뻐서? 칼베른은 눈물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했지만,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이 너무 복잡해서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파헤치려고 하면 할수록 눈물이 더 많이 흘러나와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칼베른이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자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리고 칼베른의 옆으로 옮겨와 앉아 그를 안고 등을 다독였다.

“울지 마요.”

칼베른이 어른 모습이었다면 다 큰 어른이 왜 우냐고 핀잔을 주거나, 그냥 말로만 울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린아이 모습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게다가 눈물이 고인 자색 눈동자가 너무 외롭고 지쳐 보여서 엘리사는 그를 꼭 안고 다독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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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르나 남작이 그녀가 힘들어할 때 그래 줬던 것처럼.

“저주는 금방 풀릴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엘리사의 갑작스러운 포옹과 다정한 위로에 놀란 칼베른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정처 없이 표류하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으면서 깨닫지 못했던, 아니 깨닫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사의 수명을 얻은 건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 자신이 그녀에게 마음이 있어서, 였다. ****

“정말로 그 꼬마가 클라우드 공작가의 검법을 사용했단 말이지?”

데아른의 질문에 그의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우드 공작가의 검법은 무척 정교해서 웬만한 기사들은 흉내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은 클라우드 공작가의 사람들만 쓸 수 있었다. 물론 카일 브리슈도 클라우드 공작가의 사람이지만, 방계였다. 검법이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방계는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몇몇을 제외하고 검법을 배우지 못했다. 게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카일 브리슈는 검술을 전혀 배우지 않았다. 그런데 그 꼬마가 클라우드 공작가의 검법을 사용했다면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역시 그 꼬마가 칼베른 클라우드였군.”

검술을 배운 적이 전혀 없는 꼬마가 대련에서 시온을 이기고, 칼베른과 글씨체가 똑같다는 것부터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진짜 그 꼬마가 칼베른일 줄이야. 황당하고 놀랍고 신기하면서도 재미있었다. 그 오만하던 남자가 꼬맹이가 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몹시 웃기도 했고.

‘그런데 그 자식은 왜 갑자기 어려진 거지?’

젤리아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기엔 역대 클라우드 공작가 사람 중에서 어려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저주 때문에 어려진 건 아니었다.

‘설마 마리아가 먹인 약 때문인가?’

칼베른이 갑자기 모습을 감춘 시기를 따져봤을 때, 그를 죽이려고 먹였던 약이 잘못돼서 칼베른이 어려졌을 가능성이 무척 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재미있네.”

칼베른을 죽이려고 무던히 공을 들였는데 실패한 건 안타까웠지만, 대신 더 재미난 결과가 나왔다.

“그래, 이대로 죽이기엔 아쉽지.”

지금까지 날 방해한 대가를 치러야지, 칼베른 클라우드. 그 전에 평안한 죽음의 안식을 선물하는 건 너무 아쉬웠다. 데아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 입술이 조소를 머금으며 한껏 비틀어졌다.

“편지지를 가져와라.”

그는 편지지에 글을 적어 봉투에 넣은 뒤, 실링왁스로 단단히 봉인해서 부하에게 건네주었다.

“올랜드 공작에게 직접 전해주도록.”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받는다고, 쓸모 있는 패가 있는데 구태여 제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다. 자신은 그저 그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걸 지켜보다가 나오는 콩고물만 주워 먹으면 됐다. **** 해일처럼 몰려왔던 슬픔에서 벗어나니 깊은 절망과 막막함이 밀려왔다. 엘리사를 마음에 담은 이상, 이제 그가 수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엘리사뿐이었기 때문이다. 부친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건만, 결국 이렇게 되다니. 칼베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힘없이 숨을 토해내며 두 손을 꼭 마주 쥐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지금 할 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말해야 해.’

내가 그대를 좋아한다고.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사랑 따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그래서 허락도 없이 그녀의 수명을 흡수한 걸 사과하고, 얼른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말해야 했다. 한 번 준 마음을 정리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래야 엘리사가 살 수 있으니 무조건 정리해야 했다. 클라우드 공작과 테레사 부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보내는 참극을 맞이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수명을 흡수하지 않고 참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면 에프란이 처음 저주를 마주했을 때처럼 폭주하게 된다. 폭주하면 야금야금 수명을 취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엘리사를 계속 마음에 둔다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수명을 흡수해야 했다. 빌어먹을 ‘축복’ 때문에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니까.

“수명을 가져오는 대신 그 사람은 물론 그 사람의 부모 혹은 자식들을 죽을 때까지 책임져주고 있다.”

칼베른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멍석부터 깔았다.

“한 사람당 1년 이상 수명을 빼앗지 않을뿐더러 그들도 동의한 일이다. 나한테 수명을 빼앗긴다는 걸 그들도 알고 있어.”

“그 말은 그들도 클라우드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거네요?”

“아니. 그들은 클라우드 공작가가 아닌 내게 저주가 걸렸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만약 수명을 가져올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계약이 끝나면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여 저주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 이 역시 그들도 동의한 일이야.”

“그래요.”

뜨뜻미지근한 엘리사의 대답에 칼베른이 쓰게 웃었다.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마음에 안 든다기보다……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람도 사고파는 세상이니, 사고팔지 못하는 게 무에 있겠느냐마는 설마 수명까지 그럴 줄은 몰랐다.

‘뭐, 이해는 되지만.’

수명을 1년 바치는 대신 자신의 가족들이 죽을 때까지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면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한때 제르나 남작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결심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럼 저도 공작가를 나갈 때 기억을 지우는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좀 싫은데. 엘리사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연금술사인 만큼 그녀는 기억을 잃는 약의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약 자체에 부작용이 있다기보다 약을 먹고 기억을 잃고 난 뒤 부작용이 생기는 거였다. 기억을 잃는 약은 원하는 부분만 지우는 게 아니라 일정 기간의 모든 기억을 지웠으니까. 갑자기 기억이 사라지는 바람에 날씨, 시간, 사람 관계 등 많은 것에 괴리감을 느끼고 우울증이 생기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그럴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덜컥 앞섰다. 먹기 싫다고 버틴다고 해서 칼베른이 안 먹일 것 같지도 않으니, 안 먹는 쪽으로 조율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니.”

“정말 안 먹어도 돼요?”

“그래.”

구겨졌던 엘리사의 얼굴이 다리미질이라도 한 것처럼 환해졌다.

“진짜 안 먹어도 된다고 했어요.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예요.”

“못 믿겠다면 그대가 좋아하는 각서라도 써주지.”

“아니에요, 믿어요. 믿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한바 칼베른은 그가 뱉은 말을 지키는 편이었다. 앞에선 다 해줄 것처럼 말해놓고 뒤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그의 부친과는 달랐다. ……정말로 다른 건가? 한 번 배신을 당했던 터라 의심이 불쑥 치솟았지만, 엘리사는 애써 꾹 눌렀다. 부디 칼베른은 그의 부친처럼 자신을 배신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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