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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Secret (6) (81/156)

81화. Secret (6)2021.04.10.

엘리사의 얼굴 위로 떨어진 건 피였다. 비 내음과 피 냄새가 뒤섞여 몹시 비리고 역겨웠다.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피 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많이 난다는 건 그만큼 칼베른이 많이 다쳤다는 의미. 그러나 놀라거나 다친 부위를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칼베른의 등 뒤로 피 묻은 날카로운 검이 번뜩였기 때문이다. 허공을 가른 검이 칼베른의 등을 겨냥하고 떨어졌다. 엘리사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보였다.

“안 돼!”

엘리사는 칼베른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손에 잡히는 게 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적을 향해 던졌다. 퍽, 하는 소리가 젖은 빗줄기 사이로 고요히 울려 퍼졌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엘리사가 남자에게 던진 건 주먹만 한 돌멩이였다. 돌멩이는 남자의 코를 정확하게 가격하고 떨어졌다. 순간 퍼지는 충격에 적이 주춤하자 엘리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남자의 중심부를 무릎으로 세게 가격했다.

“컥!”

코에 돌멩이를 맞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적의 얼굴이 구겨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느슨하게 풀리자 칼베른은 적의 손등을 세게 내리쳐 검을 빼앗았다. 칼베른이 검을 쥐자 검날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퍼졌다. 칼베른은 그 검을 적의 복부를 향해 찔러넣었다. 검기가 깃든 검은 쉽게 살갗을 꿰뚫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칼베른의 온몸을 적셨다.

“컥!”

복부가 꿰뚫린 적은 파르르 경련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고 흰 번뜩하게 뜬 모습이 기괴했다.

“!”

태어나서 사람이 검에 찔려 죽는 걸 처음 보는 엘리사는 입을 틀어막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반면 칼베른은 익숙한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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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다다닥-. 동료가 당하자 화가 났는지 다른 적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칼베른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적들을 상대했다. 칼베른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수적으로 너무 불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칼베른은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 힘적으로도 밀렸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피하며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칼베른은 적에게 오른팔을 내주고 말았다. 검에 베인 자리가 움푹 파이고 피가 튀었다. 그 고통이 상당할 텐데 칼베른은 미간을 한 번 찌푸릴 뿐, 침착하게 다음 공격을 막아냈다.

‘어떡하지?’

엘리사는 그런 칼베른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에겐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닉에게 배운 호신술은 검과 검이 부딪치는 피가 튀는 싸움에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칼베른이 당하면 자신 역시 당할 테니, 아까처럼 돌멩이를 던지든 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엘리사가 나서려는 순간, 골목길 안쪽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아!”

처음엔 적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던 엘리사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었다.

“닉!”

구세주처럼 등장한 닉은 엘리사를 향해 옅게 웃어 보인 뒤, 검을 빼 들고 피 튀기는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닉이 왔다곤 하나 수적인 면에선 여전히 적들이 유리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들은 닉이 싸움에 끼어들자마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빠르게 도망쳤다.

“뭐야.”

그 때문에 검을 제대로 한 번 휘두르지 못한 닉이 맥빠진 얼굴로 사라지는 적들을 쳐다봤다. 추적한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랬다가 남아 있는 잔당들이 엘리사를 습격하면 큰일이니 닉은 그러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복부의 상처가 눈에 박혔다.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해서 검으로 꿰뚫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저 꼬마가 했단 말이지…….’

닉은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장검을 쥐고 있는 칼베른을 돌아봤다. 그를 탐색하는 눈동자에 의심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적들이 도망가고 상황이 진정되자 엘리사는 서둘러 다가와 칼베른의 상태를 살폈다.

“상처 좀 봐요.”

“됐습니다.”

칼베른이 시야를 가리는 붉은 물줄기를 닦아내며 대답했다. 이 와중에도 닉이 있는 걸 생각해서 말을 높였다.

“되긴 뭐가 됐어요? 얼른 상처를 보여줘요. 지혈할 수 있으면 지혈해야죠.”

“그래, 꼬맹아.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상처를 보여줘.”

닉이 엘리사를 거들었다.

“완치는 힘들어도 피를 멎게 하는 것 정도는 나도 가능하니까.”

닉의 말에 칼베른은 그를 흘겨본 뒤,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괜한 고집 부리지 말아요!”

그렇게 크게 다쳤으면서 왜 고집을 부리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엘리사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무작정 다친 그의 오른팔을 잡았다.

“여기 이렇게 심하게 다쳤……어?”

칼베른의 오른팔을 본 엘리사가 주춤했다.

“뭐야, 다쳤다면서 깨끗하네.”

닉의 말대로 칼베른의 오른팔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살이 움푹 파이고 피가 사방에 튈 정도로 크게 다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설마 다른 곳도 상처가 없어진 건지 확인하기 위해 엘리사는 가장 처음 칼베른이 다쳤던 등을 확인했다.

‘없어!’

옷이 쭉 찢어지고, 그 주변으로 피가 묻어 있지 않았다면 여길 다쳤다는 걸 전혀 몰랐을 정도로 그의 등은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떻게 된 거지? 믿기지 않는 현상에 엘리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칼베른은 거칠게 엘리사에게 잡힌 팔을 빼내며 고개를 돌렸다. 노골적으로 엘리사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뒤에서 물기 젖은 발소리가 들렸다. 설마 또 적인가? 엘리사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닉과 칼베른도 바짝 긴장하며 검을 꽉 움켜쥐었다. 일순간 그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과 긴장감이 흘렀다.

“카일 님!”

다행히 발소리의 주인은 적이 아닌 에드윈이였다. 엘리사는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흙탕물에 구른 것처럼 엉망진창인 에드윈의 상태를 보고 놀랐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는 검과 몸에는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다급하게 달려오던 에드윈 역시 엘리사와 닉을 보고 놀라며 멈춰 섰다.

“부인께서 왜 여기에…….”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아론 경이 왜 여기 있는 거죠? 꼴은 그게 뭐고요?”

“아, 카일 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셔서 찾고 있는데 갑자기 웬 놈들이 공격해오길래 조금 싸웠습니다. 그것보다 카일 님을 못 보셨습니까?”

“여기 있다.”

닉과 엘리사의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칼베른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에드윈은 칼베른을 찾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그보다 더 엉망진창인 칼베른의 상태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카일 님도 습격을 당하신 겁니까?”

“그래. 부인과 함께 있다가 습격을 당했지.”

그 말에 에드윈이 엘리사를 돌아봤다.

“괜찮으십니까, 부인? 다친 곳은요?”

“딱히 없어요. 저보다 카일이 많이 다쳤죠. 아니, 다쳤었다고 해야겠네요. 상처가 지금은 없거든요.”

엘리사의 말에 에드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역시 뭔가 비밀이 있구나.’

그리고 에드윈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칼베른과 그 사이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지 과시하던 그인데, 당연히 알고 있겠지.

“엘리사.”

닉이 엘리사의 팔을 잡고 그녀의 발목을 가리켰다.

“너도 다쳤어.”

치마 아래로 드러난 발목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무릎 부근에서 시큰한 고통을 느낀 엘리사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바닥에 주저앉을 때 쓸렸나 봐.”

“보자. 치료해줄게.”

탁-. 닉이 엘리사의 다리 쪽으로 손을 뻗자 칼베른이 막았다.

“밖에서 할 만한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칼베른은 묘하게 닉을 경계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적들이 다시 공격해올지도 모르니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죠.”

“저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드윈이 칼베른의 편을 들었다. 엘리사도 그게 맞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면서 칼베른을 흘끗 봤다.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칼베른이 대놓고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에드윈 쪽으로 성큼 걸어갔다. 에드윈은 그런 칼베른을 챙기며 모두에게 말했다.

“이 근처에 마차 대여소가 있으니, 다 같이 그곳에 가서 빌리도록 하죠.”

  **** 빗속을 조금 걷자 에드윈이 말한 대로 마차 대여소가 나왔지만, 문제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손님들이 몰려 남은 마차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말 두 필과 방수용 후드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에드윈은 우선 방수용 후드를 사 엘리사에게 건네주었다.

“쓰십시오.”

에드윈이라면 당연히 칼베른에게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에게 주니 약간 당황스러웠다.

“카일부터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요?”

“괜찮습니다.”

“괜찮다는데 얼른 써, 엘리사.”

닉까지 가세하면서 결국 방수용 후드는 엘리사의 차지가 됐다. 에드윈은 아쉬운 대로 말 두 필도 빌린 뒤, 닉과 엘리사에게 물었다.

“비가 많이 와서 말을 타기 힘들긴 하지만, 계속 여기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론 경의 말에 동의해요.”

“저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저와 카일 님이 함께 타고, 부인과 니콜라스 경이 함께 타는 거로 하죠.”

에드윈이 말한 대로 둘씩 나뉘어 각각 말에 올라탔다.

“같이 쓸래?”

엘리사가 방수용 후드를 가리키며 묻자 닉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너나 써.”

“하지만 너 감기 걸릴 텐데…….”

“괜찮아. 이것보다 더한 일도 겪어봤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것보다 더한 일은 도대체 어떤 일인 걸까. 빠르게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빗길에 미끄러질까 봐 속력을 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세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그렇게 클라우드 공작가에 거의 도착했을 땐, 아예 비가 그쳤다. 먹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니 비가 그렇게 쏟아진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비에 홀딱 젖다 못해 피투성이인 칼베른과 에드윈을 본 헤리엇과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기함했다.

“얼른 목욕물을 준비하거라. 주치의도 데리고 오고.”

“네.”

헤리엇의 지휘 아래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참, 엔트 경.”

그제야 엔트를 두고 온 게 생각난 엘리사는 지나가는 하인을 붙잡고 엔트를 데리고 와달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방으로 돌아가 방에서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젖은 옷을 벗었다. 바로 씻을 거니 옷을 입는 대신 맨몸에 샤워 가운을 걸쳤다. 그 직후,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하녀가 주치의가 온 걸 알렸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는 미간을 좁히며 보고한 하녀에게 물었다.

“밑에 조수가 아니라 주치의가 나한테 직접 왔다고?”

“네, 마님.”

“…….”

시간을 봤을 때 주치의는 다른 곳에 들리지 않고 엘리사에게 가장 먼저 온 거였다. 소공작과 소공작 부인이 똑같이 다쳤다면 가문의 주치의는 당연히 소공작부터 돌봤다. 그게 맞는 순서였다. 물론 주치의는 ‘카일 브리슈’가 칼베른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그가 아닌 자신에게 먼저 온 게 이해가 됐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에드윈과 헤리엇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누가 봐도 칼베른이 가장 많이 다쳤는데 주치의에게 왜 그를 먼저 치료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왜 그러십니까, 마님?”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주치의는 필요 없으니까 돌려보내도록 해.”

“하지만 무릎이…….”

“괜찮아. 내 방에도 상처에 바르는 약이 있거든.”

설령 약이 없다고 하더라도 엘리사는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세상을 등진 클라우드 공작의 명령을 받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주치의가 만든 약 따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엘리사는 기어코 주치의를 돌려보낸 뒤, 목욕 시중을 들어주겠다는 하녀들도 물리고 홀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욕조에 허브로 만든 입욕제를 넣은 뒤, 몸을 담갔다. 상처에 따뜻한 물이 닿으니 좀 더 쓰렸지만 참을 만했다. 애초에 상처가 그렇게 깊지도 않았고. 엘리사는 따뜻한 물로 얼굴을 크게 훑어내리며 잠시 잊고 있었던 이상한 일을 떠올렸다. 눈앞에서 크게 다쳤던 칼베른의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었던, 그 일. 칼베른이 다쳤던 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살갗이 파이고 피가 튀었었다. 얼굴에도 그의 피가 떨어졌었고.

‘그런데 어떻게 깨끗하게 상처가 나은 거지?’

칼베른에게 신력을 썼다면 스스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 닉이 올 때까지 신력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대주교 정도의 신력이 있다고 흔적도 없이 상처를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낫는 건 불가능했다. 그 외에 신전에 간 그들이 유곽에 있는 것과 칼베른이 다쳤었는데 상처가 없다는 말에 에드윈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던 것, 그리고 주치의가 자신을 먼저 찾아온 것 등 마음에 걸리는 게 많았다.

‘알아봐야겠어.’

이번만큼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리라. 그렇게 생각한 엘리사는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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