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Secret (4) (79/156)

79화. Secret (4)2021.04.03.

“으음.”

닉이 엘리사를 이상한 눈으로 봤던가? 에드윈은 닉과 엘리사와 같이 있었을 때를 떠올렸지만, 두 사람 사이에 딱히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어리둥절해하는 에드윈과 달리, 칼베른의 표정은 심각했다. 닉이 어떤 마음으로 엘리사를 보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에드윈은 흘끗, 칼베른의 심각한 표정을 확인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어째 일이 상당히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그 성기사를 성국으로 돌려보내요. 아니면 저택 밖에서 지내게 하던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는 대주교님을 호위하고 있는 성기사니까요. 그를 저택에서 내보내려면 대주교님도 함께 내보내야 합니다.”

에드윈의 차분한 설명에 솔레이는 불만스레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소공작님이라도 어서 돌아오시라고 하세요! 그래야 저 성기사가 부인께 꼬리 치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하하.”

에드윈은 차마 ‘제 옆에 있는 이 꼬마가 소공작님이십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소공작님도 참, 이혼할 뻔했다가 겨우 다시 붙잡았으면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옆에 딱 달라붙어서 잘해줄 생각을 하셔야지, 밖에 돌아다니시다니.”

설마 ‘카일 브리슈’가 칼베른일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솔레이는 입을 삐죽 내밀며 칼베른의 험담을 했다.

“이대로라면 또 이혼을 당하실 거예요! 그 남자가 부인을 홀라당 채갈 거라고요!”

“알겠습니다. 잘 알겠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만 퇴근하세요, 솔레이 양.”

솔레이가 계속 떠들게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에드윈은 황급히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 이른 아침. 크라임과 닉, 그리고 에드윈이 합류하면서 식당은 사람들로 북거렸다. 긴 식탁이 처음으로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칼베른이 공식적으로 자리를 비운 지금, 저택의 주인은 소공작 부인인 엘리사였다. 그래서 엘리사가 가장 상석에 앉고 그 곁자리에 어려진 칼베른과 크라임이 각각 앉았다. 크라임의 옆에는 닉이, 칼베른의 옆에는 에드윈이 앉았다.

“오늘 칼이랑 신전에 가신다고요?”

크라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계획을 듣게 된 엘리사가 되묻자 크라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카일 군과 신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있어, 신전에 직접 데리고 가 이것저것 알려주려고 합니다.”

숨겨진 속뜻을 바로 알아낸 엘리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칼을 잘 부탁드립니다.”

“네, 부인.”

그 뒤로 아침 식사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말을 하는 건 크라임과 엘리사 뿐이었고, 이따금 에드윈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가 끝나고, 저마다 볼일을 보러 흩어졌다. 엘리사는 에드윈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가 방으로 향했다. 그런 엘리사의 옆으로 다가온 닉이 물었다.

“엘리사, 그 꼬마도 칼이라고 부르는 거야?”

“응. 왜?”

“너, 클라우드 소공작도 칼이라고 부르잖아. 두 사람의 애칭이 똑같은 게 이상해서.”

음, 그런가. 지금까지 지적해준 사람이 없어 몰랐는데, 듣고 보니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앞으론 조심해야겠네.

“진짜 그 꼬마, 클라우드 소공작의 아들 아니지?”

다행히도 닉은 ‘카일 브리슈’가 칼베른, 본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헛다리만 계속 짚었다.

“아니라니까.”

“정말로? 창피한 일이라서 숨기는 게 아니고?”

“아니야. 그리고 너한테 이런 걸 숨길 이유가 뭐가 있겠어? 이혼하는 것도 상담했는데.”

“아,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닉의 얼굴에 미묘한 만족감이 서렸다.

“그럼 오늘 나랑 외출하자.”

“응? 외출이라니? 대주교님의 호위는 어쩌고?”

“대주교님이 오늘은 공작가의 호위가 있으니 여독도 풀 겸 푹 쉬라고 하셨어. 한마디로 휴가지.”

닉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엘리사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수도 구경시켜 줘. 오랜만에 아저씨한테도 인사하고 싶고.”

병으로 세상을 등진 부친의 이야기가 나오자 엘리사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표정을 본 닉이 바로 사과했다.

“미안. 내가 실수했네.”

“아니야. 괜찮아.”

그러고 보니 부친에게 안 가본지 제법 오래됐다. 예전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찾아갔었는데, 칼베른이 어려진 이후론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그래. 같이 가자.”

닉을 인사시켜줄 겸 오랜만에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닉이 환하게 웃으며 뭐라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엘리사의 팔을 잡아끌었다. 칼베른이었다.

“부인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괜찮습니까?”

칼베른은 닉을 의식해서 존댓말을 썼다.

“그럼 1시간 뒤에 홀에서 보자, 엘리사.”

닉이 눈치껏 자리를 비켰다. 칼베른은 점점 그를 지나쳐 가는 닉을 일별한 뒤, 엘리사에게 물었다.

“저 남자랑 어디 가는 모양이지?”

“아빠의 무덤에 가기로 했어요. 오랜만에 인사하고 싶다길래.”

“제르나 남작과도 아는 사이인가?”

“그럼요. 말했잖아요, 어릴 때부터 친했다고. 아빠가 친아들로 삼고 싶다고 했을 만큼 닉을 예뻐했어요.”

“그래?”

칼베른이 눈썹을 살짝 올리며 닉이 사라진 복도를 흘겨봤다.

“그래서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냥.”

칼베른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어제 올랜드 공작가에서 초대장이 왔다길래.”

칼베른이 엘리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서 엘리사의 팔을 붙잡을 때까지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저 엘리사와 닉이 딱 붙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게 눈꼴셔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그랬는데, 엘리사가 닉과 외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주 핑계를 대며 닉이 아닌 자신과 신전에 가자고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칼베른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제르나 남작의 무덤에 간다는대. 그래서 대신 꺼낸 말이 올랜드 공작가의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엘리사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거요. 일단 크라임 대주교님이 오신 걸 핑계로 거절을 하긴 했는데, 또 초대가 올까 봐 약간 무섭네요.”

“그 부분이라면 에드윈에게 확실히 처리하라고 해뒀다. 다시 초대장이 날아올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다행이고요.”

안도한 듯 엘리사가 웃는 모습에 칼베른은 가슴 깊은 곳이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또다. 그때 식당에서 느꼈던 느낌과 비슷했다. 칼베른은 엘리사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건지 의아하면서도 알 것 같았다. 알면 안 될 것 같기도 했고.

“카일 군. 어서 준비하시죠. 곧 떠나야 합니다.”

“대주교님이 부르시네요.”

칼베른의 뒤로 나타난 크라임을 본 엘리사가 웃으며 인사했다.

“잘 다녀오세요. 꼭 실마리를 찾았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나와 이혼할 수 있을 테니까?”

무심코 나온 질문에 엘리사는 물론 칼베른도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 사이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카일 군.”

크라임이 한 번 더 그를 재촉한 후에야 정신을 차린 듯 칼베른이 돌아섰다. 엘리사는 우두커니 서서 점점 멀어지는 칼베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방으로 향했다. **** 닉은 엘리사와 단둘이 외출하고 싶어 했고 엘리사 역시 그러는 쪽이 편했지만, 헤리엇과 경비 대장이 반대했다. 그래서 타협을 본 게 그나마 말이 통하고 친한 엔트를 호위로 데리고 가는 거였다.

“…….”

이전에 닉에게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엔트는 닉의 눈치를 봤다. 엘리사는 그런 엔트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했다.

“괜찮아. 나쁜 놈은 아니니까, 그렇게 무서워 하지 마.”

“네에.”

엔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다시 한 번 엔트의 어깨를 두드리고 말에 올라탔다. 마차보단 말이 다니기 편하고 눈에 띄지 않아서 말을 타기로 했다. 뒤따라 닉과 엔트가 말에 올라타고, 그들은 우선 제르나 남작이 잠들어 있는 공동 묘지로 향했다.

“비가 쏟아질 것 같네.”

엘리사가 시커먼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자 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바람에 물 내음이 가득 나는 걸 봐서 한바탕 쏟아질 것 같아.”

“뭐야, 개 코도 아니고 그런 것도 맡아?”

“검술 훈련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쪽에 민감해졌어.”

“그래?”

그럼 칼베른도 개 코이려나. 엘리사는 문득 궁금해졌다. 칼베른과 닉이 붙으면 누가 이길지도 궁금했고.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거짓말. 방금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는데.”

그랬나. 엘리사는 멋쩍게 웃으며 뺨을 쓸었다. 오스카도 그렇고, 하나같이 제 속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알아채니 놀라우면서도 신기했다.

“무슨 생각 했는데?”

“그냥 너랑 칼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지 문득 궁금해져서.”

“칼이라면 그 꼬맹이? 아니면 클라우드 소공작?”

“당연히 후자지.”

칼베른이 어렸을 때 검술 대회에서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을 했을 만큼 실력자라고 해도 어린 칼베른과 닉이 싸우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고. 엘리사가 보기엔 그건 아동 학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흐음.”

닉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사에게 물었다.

“그게 궁금하면 클라우드 소공작이 돌아오는 대로 결투 신청을 할까?”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아니, 하고 싶어.”

유쾌하게 올라간 입술과 달리 엘리사를 바라보는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서 내가 이긴 뒤에, 지금 당장 널 자유롭게 풀어달라고 요청할래.”

  **** 칼베른과 크라임이 향한 곳은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신전이었다. 황궁 안에도 신전이 있지만, 그 신전은 황족과 황실을 위한 신전이었다. 공작이라도 사사롭게 이용할 수가 없었다. 물론 오스카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이용할 수 있었지만 황궁 안에 있는 신전을 이용하는 건 여러모로 눈에 띄었다. 그래서 칼베른은 일부러 수도 외곽에 있는 작은 신전에 찾아왔다. 대주교는 커녕 고위 신관도 한 명 뿐인 작은 신전은 난데없이 대주교인 크라임이 방문하자 발칵 뒤집혔다. 크라임의 시중을 맡은 어린 신관들은 경외의 눈빛으로 크라임을 바라봤다. 잠시 후, 이 신전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신관이 찾아와 크라임에게 공손히 보고했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대주교님.”

“갑작스럽게 요청해서 당황하셨을 텐데 힘껏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대주교님의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들어드려야지요.”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정확히 말해서 칼베른만 빼고 다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칼베른은 그들을 일별한 뒤, 창밖을 내다봤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그의 기분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이 안 좋기도 하지만, 몸 상태도 상당히 나빴다. 몸에 걸린 저주가 신전에 응집된 강력한 신력에 반발해서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칼베른이라서 이만큼 버티고 있는 거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 고통에 허덕이며 굴러다녔을 것이다.

“이만 가시죠, 카일 군.”

“네.”

고통을 참을 수 있다고 해서 고통 속에 계속 있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신전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기 때문에 칼베른은 곧바로 크라임을 따라 기도실로 향했다. 그 뒤를 에드윈이 따라왔지만, 기도실엔 같이 들어가지 않았다. 작은 기도실의 중앙에는 아틸론 주신의 동상과 성수를 담은 수반, 그리고 제단이 있었다. 크라임은 주신의 동상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기도했다. 칼베른은 크라임의 옆에 서서 주신의 동상을 물끄러미 올려다 봤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신의 동상은 이런 쪽에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근사하고 위엄이 넘쳤다. 기도실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이따금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마침내 기도를 마친 크라임이 무릎을 꿇은 채 칼베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제보다 조금 더 힘드실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크라임은 칼베른의 머리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칼베른도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쥐며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곧 칼베른의 머리에 댄 크라임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나오더니 칼베른의 몸을 감쌌다.

‘생각보다 별로 안 아프군.’

고통에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그냥 참을 만했다. 칼베른이 안도하며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을 때였다. 우르르, 쾅-.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뜬 크라임은 칼베른의 상태를 보고 눈을 더 크게 떴다.

“소공작님……!”

심상치 않은 크라임의 반응에 칼베른도 눈을 떴다. 그러자 경악으로 물든 크라임의 얼굴이 보였다.

“왜…….”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칼베른은 눈 부근에서 흘러나온 무언가가 뺨을 흘러내리자 무심코 손등으로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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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식은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색이 붉었다. 이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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