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Secret (3) (78/156)

78화. Secret (3)2021.03.31.

잠시 후, 응접실에 도착하자 엘리사는 닉과 솔레이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려요.”

칼베른이 어려진 건 비밀이었고,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았기 때문에 크라임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겐 알려줄 수가 없었다.

“네, 그럴게요.”

솔레이가 여기까지 따라온 만큼, 응접실에도 같이 들어가겠다고 우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닉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빨리 나와야 해.”

“그래.”

엘리사와 크라임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을 본 솔레이가 혀를 내둘렀다.

“성기사님은 무례한 데다가 성격까지 나쁘시군요.”

느닷없는 타박에 닉이 눈썹을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솔레이를 돌아봤다.

“성기사님이 부인의 친구분이신 건 알겠지만, 그래도 예법은 지키셔야죠.”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부인께선 엄연히 성기사님보다 신분이 높은데, 그렇게 이름을 막 부르시며 반말하면 안 되죠.”

“…….”.

닉은 솔레이가 비아냥거리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닉이 가만히 있자 솔레이는 의기양양하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앞으론 조심해 주세요. 성기사님과 부인이 친구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 크라임의 방문은 올랜드 공작가의 저녁 만찬 초대를 거절할 좋은 핑곗거리였다. 엘리사는 ‘갑작스럽게 손님이 오는 바람에 저녁 만찬을 갈 수 없어 유감이다. 다음에 꼭 참여하겠다.’라고 올랜드 공작가에 답신을 보냈다. 뒤늦게 외출하고 돌아온 에드윈은 크라임이 온 걸 확인하고 곧바로 아고라 사교 클럽에 사람을 보내 칼베른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칼베른은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공작저로 돌아왔다.

“신이시여.”

사교 클럽에서 돌아온 칼베른을 마주한 크라임은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했다. 엘리사에게 미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충격이 큰 모양이다. 닉도 뒤통수를 해머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라임은 그렇다 쳐도 닉은 왜 저러는 걸까. 혹 저 소년이 어려진 칼베른이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엘리사는 팔꿈치로 닉의 옆구리를 찌르며 슬쩍 물었다.

“왜 그래?”

“그게…….”

“부인, 이분은 누굽니까.”

닉이 대답하려는 순간, 칼베른이 그녀에게 물었다. ‘카일 브리슈’로선 크라임을 처음 보는 거니 알맞는 연기였다. 엘리사는 칼베른의 연기에 맞춰 대답했다.

“성국에서 오신 크라임 대주교님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라임 대주교님. 카일 브리슈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일 군. 신의 미천한 종인 크라임이라고 합니다.”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난 크라임도 칼베른의 연기에 맞췄다. 에드윈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고 보니 카일 군이 평소 신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저녁이 준비될 때까지 대주교님께서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로 칼베른이 신학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닌, 두 사람이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멍석을 까는 거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크라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렇게 하지요. 신학을 공부하는 자는 언제든지 환영하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럼 서재로 가시죠.”

에드윈은 칼베른과 크라임을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따라갈까?’

엘리사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둘이서 이야기를 할 시간을 줘야지. 아까부터 할 말이 많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닉도 그들을 따라가지 않은 이유였다. 원래는 크라임과 대화를 끝내고 닉과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올랜드 공작가에 편지를 보내고, 에드윈이 돌아오면서 이런저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부인!”

그러니 이제라도 닉과 대화를 나누려고 했는데, 솔레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죠?”

“장부를 봤는데 조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부인!”

“장부 문제라면 엘리사보단 가문의 회계사한테 부탁하는 게 나을 텐데요.”

닉이 엘리사를 대신 해서 대답했지만, 솔레이는 무시하고 엘리사에게만 말했다.

“부인께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나보고 무례하다고 해놓고, 정작 자기가 더 무례하네.”

닉이 비아냥거리듯이 말하자, 솔레이가 고개를 훽, 돌려 닉을 노려봤다.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요?”

닉이 얄밉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리가요. 왜요? 찔리셨나요?”

“이봐요!”

“아, 찔리신 거구나. 그러길래 평소에 조심하시지.”

“이익!”

“그만.”

닉과 솔레이가 진짜 싸울 것처럼 으르렁거리자 엘리사가 나서서 중재했다. 애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하는 건지.

“솔레이 양. 닉이 말한 대로 장부 문제라면 전 아는 게 거의 없어요. 그러니 가문의 회계사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 퇴근 안 했을 테니,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부인…….”

솔레이가 섭섭하다는 눈으로 바라봤지만 엘리사는 그녀를 달래거나 자기가 봐주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말한 것처럼 장부에 대해선 그녀도 잘 몰랐고, 버젓이 전문가가 있는데 솔레이가 왜 자신에게 물어보는 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중에 봐요, 솔레이 양. 가자, 닉.”

엘리사는 솔레이에게 인사하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풋.”

그 뒤를 따라가던 닉은 대단히 충격받은 표정을 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 솔레이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본 솔레이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꽉 움켜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 크라임은 신력을 이용해서 신중하게 칼베른의 몸을 훑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칼베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크라임이 크게 숨을 토해내며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죄송하지만 소공작님껜 이미 다른 저주가 걸려 있어, 어려지신 이유가 저주 때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아.”

담담하게 대답하는 칼베른과 달리 에드윈은 눈에 띄게 아쉬워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내일 저와 함께 신전에 가보시겠습니까?”

“신전이요?”

“네. 신전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확실하게 조사할 수 있습니다.”

“음.”

칼베른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자 크라임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압니다. 기존에 걸려 있는 저주 때문에 신전에 가기 힘드신 거.”

“…….”

“그래도 제대로 확인해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부인께서 만드신 약을 먹고 일시적으로 돌아왔다면 저주보단 마법에 걸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사람 일은 혹시 모르는 거니까요.”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지만, 칼베른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한 건 크라임의 말대로 기존에 걸려 있는 저주 때문이었다. 클라우드 공작과 공작부인, 그리고 테레사 부인을 죽음으로 이끌고, 지금도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끔찍한 저주. 이 저주 때문에 칼베른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받는 세례도 받지 못했다. 그뿐일까, 클라우드 공작이 칼베른의 아내로 엘리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

문득 엘리사를 떠올린 칼베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손으로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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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신전에 가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 때문에 희생하고 있는 엘리사를 생각하면 가는 게 맞았다. 그래야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공작위를 계승 받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칼베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가도록 하죠.”

  **** 엘리사는 그녀의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닉을 타박했다.

“쓸데없이 다른 사람이랑 싸우지 마.”

“나도 싸우고 싶어서 싸운 게 아니야. 그 여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솔레이 양이 너한테 시비를 걸었다고? 그럴 리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럼 난 그럴 사람이냐?”

닉이 서운하다는 듯 말하자 엘리사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니고…… 하여간 저택 내에서 문제 일으키지 마. 내 입장만 난처해진단 말이야.”

“뭐, 그래. 네가 난처하다면 안 그래야지. 최대한 참아볼게.”

“착하다.”

“뭐야, 그건. 내가 어린애인 줄 알아?”

닉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은지 표정은 밝았다.

“그런데 엘리사, 아까 봤던 꼬마 뭐야? 클라우드 소공작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던데.”

당연히 똑같이 생겼겠지. 칼베른, 당사자니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엘리사가 침묵하자 닉은 굳게 닫힌 문을 흘끗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꼬마, 클라우드 소공작이 밖에서 데리고 온 아들이야?”

아하, 그래서 아까 어려진 칼베른을 봤을 때 멍청한 표정을 지었던 거군. 그제야 닉이 왜 그랬는지 이해한 엘리사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완전 똑같던데. 친아들이 아니면 그렇게 똑같을 리가 없잖아.”

“진짜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마. 그 아이랑 칼은 먼 사촌 관계니까.”

“칼?”

닉의 미간이 좁아졌다.

“뭐야, 너. 그 자식의 애칭을 부르는 거야?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건데? 설마 그래서 갑자기 이혼 안 한다고 마음을 바꾼 거야?”

“그만.”

닉이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내자 엘리사는 손바닥으로 닉의 입을 막았다.

“궁금한 게 있으면 하나씩 물어. 그렇게 한꺼번에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

“……그렇네.”

닉은 크게 심호흡하며 정신없는 머릿속을 정리한 뒤, 가장 궁금한 걸 물어봤다.

“이혼한다더니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야?”

“바꾼 거 아니야. 잠시 미뤄둔 거지.”

“왜? 그 남자가 갑자기 이혼 못 해주겠대?”

“그건 아니고, 사정이 있으니까 묻지 마.”

엘리사가 비밀을 만드는 게 섭섭한 닉이 불만스레 입을 툭 내밀자 엘리사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혼은 꼭 할 거야.”

“……정말이지?”

“그래.”

닉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풀었다.

“그나저나 편지에 답장을 안 하길래 바쁜 줄 알았는데, 직접 만나러 올 거라 안 한 거였어?”

“응? 아니야. 한참 전에 답장 보냈는데 아직 안 왔어?”

“응. 못 받았어.”

“제국의 남쪽 지방에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려서 운송길이 막혔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에 편지도 늦어지는 모양이네.”

“그럼 넌 어떻게 온 거야?”

성국에서 제국의 수도로 오려면 제국의 남쪽 지방을 지나야 했다. 빙 둘러서 오는 방법도 있지만, 그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런데 닉과 크라임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그 말인즉슨, 남쪽 지방을 지나왔다는 건데 신기해서 묻자 닉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그야 내 실력이 뛰어나니까.”

“…….”

“알았어. 똑바로 이야기할 테니까 정색하지 마.”

닉이 조금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도 뒤늦게 몬스터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상하게도 여기까지 오면서 단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어.”

  **** 크라임이 먼저 서재를 나가고, 칼베른과 에드윈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서재를 나왔다.

“아론 남작님!”

“솔레이 양?”

솔레이가 서재 앞에서 에드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억울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그것보다 이미 퇴근할 시간일 텐데 왜 여태 퇴근하지 않고 있는 겁니까?”

“그 남자가 신경 쓰여서 퇴근 못 하겠어요!”

“그 남자요?”

“대주교님과 함께 온 그 재수 없는 성기사 말이에요!”

“아.”

그제야 솔레이가 말하는 사람이 닉이라는 걸 안 에드윈이 솔레이에게 되물었다.

“그 남자가 솔레이 양에게 이상한 짓이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당연히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그럼 솔레이가 왜 이러는 건지 몰라 에드윈이 어리둥절하며 쳐다보자 솔레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그 성기사, 소공작 부인에게 꼬리 치고 있어요!”

“…….”

에드윈은 반사적으로 칼베른을 내려다 봤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칼베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쩜, 제가 알아듣게 설명했는데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계속 부인에게 꼬리 치는 거 있죠? 진짜 그런 사람이 성기사라니. 말도 안 돼요!”

“자자, 진정하세요. 솔레이 양.”

에드윈이 어색하게 웃으며 흥분한 솔레이를 말렸다.

“제가 보기엔 솔레이 양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요?”

“네. 그 성기사는 소공작 부인의 오래된 친구입니다. 그래서 사이가 좋은 건데 그걸 꼬리를 친다고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요!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솔레이가 딱 잘라 부정했다.

“물론 부인께선 그 남자를 단순한 친구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지만, 그 남자는 아니에요!”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야 눈빛이 달랐는걸요! 그건 단순한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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