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Secret (2)2021.03.27.
엘리사는 점심을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해치우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이른 오후에 할 일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간 에드윈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사용인에게 듣자하니 아예 저택을 나갔다고 했다. 자유의 몸이 된 엘리사는 그녀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에이지가 남긴 단서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투자한 결과, 에이지가 남긴 단서들을 다 찾았다. [난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마.] [또 연락할게.] [가마솥은 내가 빌린다.] 설마 했는데 가마솥을 가져간 사람이 진짜 에이지일 줄이야.
‘그 남자는 그 무거운 가마솥을 어떻게 들고 간 거지?’
이것도 마법의 힘인가? 그런 마법이 존재한다고? 에이지가 어떻게 가마솥을 옮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가마솥을 가져갔는지는 얼추 짐작이 갔다.
‘마법 약을 만들려고 그러는 거겠지.’
그 가마솥엔 엘리사의 마나가 깃들어 있어 다른 사람들은 사용할 수 없지만, 피를 나눈 가족인 에이지는 사용할 수가 있었다. 에이지가 엘리사의 마법진 위에서 마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자유자재로 마법을 사용했던 것처럼. 그러니 에이지가 마법 약을 만들기 위해 가마솥을 가져간 것까진 알겠지만, 그래서 더 괘씸했다. 자신이 며칠 동안 고생해서 만든 마법 가마솥을 홀라당 훔쳐가다니!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가마솥을 가져가 놓고 빌린다고 표현을 한 것도 웃겼다.
‘무사하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나쁜 일이라도 겪은 걸까? 제대로 편지도 남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친 걸 봐서 쫓기는 것 같은데.
‘혹시 집이 그 꼴이 된 게 그 남자 때문인 건가?’
가령 범인이 에이지를 잡기 위해 자신의 집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던가. 그러니 에이지는 범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쓴 것이다. 에이지가 쓴 방법은 확실히 범인이 눈치채지 못할 묘수였지만, 메시지를 받는 엘리사도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큰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도박 수를 두다니.
‘간이 크네. 내가 못 알아봤으면 어쩌려고.’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맞은편에 앉아 저녁을 먹다가 그 소리를 들은 칼베른이 포크를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
헤리엇이 두 사람을 배려해서 사용인들을 전부 물린 덕분에 칼베른은 어색하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편하게 말을 놓았다.
“잃어버린 신분 패랑 가마솥은 반드시 찾아줄 테니까.”
“네?”
“그것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던 거 아닌가?”
“아, 음, 맞아요.”
전혀 아니었지만, 에이지에 대해 말할 수가 없어 엘리사는 대충 얼버무리며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오늘 사교 클럽은 어땠어요? 그 시온이라는 애가 괴롭히지 않았어요?”
“그 애는 오늘 안 나왔어.”
안 나왔다니. 엘리사의 미간 사이가 좁아졌다.
“어제 백작 부인이 크게 안 다쳤다고 했는데……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죠?”
“그건 아니야. 뼈가 부러지지 않게 적당히 때렸고, 급소도 전부 피했으니까. 멍은 좀 들었어도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 거다.”
그 말이 더 무서운데. 엘리사는 어색하게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올랜드 공작가 말이에요. 칼이 그 아이를 혼내준 것 때문에 뭐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잠잠해서요.”
오스카도 그럴 거라고 확신했던 만큼 엘리사는 내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온종일 잠잠했다.
“혹시 공작가에서 아직 모르는 거 아닐까요? 그 아이가 자존심 상해서 말을 안 했다던가.”
칼베른이 빵을 집어들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혹 안다고 해도 올랜드 공작의 성격상 절대 그걸로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좋아.”
“어떻게 장담해요?”
“정당한 경기였고, 그 아이가 먼저 내게 결투 신청을 한 거니까. 올랜드 공작은 질서와 위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 괜찮을 거다.”
“그럼 다행이네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아서 불안했는데, 칼베른이 저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편안해져 엘리사는 환하게 웃었다. 쨍그랑-. 그 순간 칼베른이 들고 있던 잼스푼을 떨어뜨렸다.
“괜찮아요?”
“……어.”
“사용인을 부를게요.”
엘리사가 종을 흔들려고 하자 칼베른이 손을 내저었다.
“됐어. 내가 줍지.”
칼베른은 잼스푼을 주우려고 했지만, 의자 높이를 맞추기 위해 방석을 쌓아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손이 닿지 않았다. 이에 칼베른이 멈칫하자 엘리사가 물었다.
“제가 주울까요?”
“……아니.”
의자에서 풀쩍 내려온 칼베른은 잼스푼을 주워 식탁에 내려놓은 뒤 돌아섰다.
“어디 가요?”
“방에.”
“저녁은요?”
“다 먹었어.”
칼베른이 식당을 나가고, 엘리사는 그의 그릇을 확인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수프 그릇은 반도 채 비워지지 않았다. **** 오늘도 어김없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칼베른을 배웅하고 집무실에서 일하던 엘리사는 뜻밖의 편지고 미간을 팍 좁혔다.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왜 편지가 온 거야…….”
엘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실링 왁스 위에 찍힌 독수리 문양을 내려다 봤다. 올랜드 공작가의 문양이었다.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이유로 편지를 보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신자가 칼베른이 아닌 엘리사, 그녀였다. 그래서 편지를 확인하기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예감이 확실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후우.”
엘리사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편지를 확인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장황했지만, 요점은 하나였다. 엘리사와 칼베른, 그리고 카일에게 저녁 만찬을 대접하고 싶으니, 오늘 저녁에 올랜드 공작가로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칼베른이 바빠서 오지 못하면 엘리사와 카일이라도 와달라고 적혀 있었다.
“어떻게든 오게 만들려고 수 쓰는 거 봐.”
갑자기 저녁 만찬에 초대한 것도 시온의 일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과 칼베른은 그렇다 쳐도 카일까지 초대할 리가 없었다.
“어떡하지.”
엘리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곰곰이 생각했다.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명분이 없었다. 어쭙잖게 회피하거나 무시했다간 그들이 직접 클라우드 공작가에 오거나 사교계에서 말이 나올 테니 제대로 된 핑계를 대야 했다. 칼베른이 있으면 그에게 상담했을 텐데, 애석하게도 지금 그는 사교 클럽에 가 있었다. 당장 오늘 저녁에 초대받은 거라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꿩 대신 닭이라고, 에드윈에게라도 상담하려고 했지만 하필이면 에드윈은 엘리사가 찾아가기 바로 5분 전에 외출을 했다.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남자야.”
그럼 이 편지는 어떻게 해야 하지. 계단 난간에 서서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부인!”
솔레이였다. 그녀는 특유의 발랄함을 풀풀 풍기며 엘리사에게 다가왔다.
“바쁘신가요?”
“아니요. 무슨 일이죠?”
“아, 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데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말해보세요.”
“혹시 여름이 되면 편지가 줄어드나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영문 모를 말에 엘리사가 말없이 쳐다보자 솔레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통씩 소공작님의 안부를 묻거나 소공작님을 사교 모임에 초대한다는 편지가 왔었는데, 갑자기 확 줄어서요. 날씨가 더워져서 사람들이 활동을 안 하는 건가, 하고요.”
“그럴 리가요. 계절 따지지 않고 사교 모임은 많이 해요.”
엘리사는 꼭 참가해야 하는 모임 말곤 거의 참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꼭 와 줬으면 좋겠다는 초대장과 안부를 묻는 편지가 하루에 몇 통씩 쇄도했었다. 그건 칼베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리사보다 더 많은 양의 편지가 와서 감당이 안 될 정도라고 헤리엇이 우스갯소리로 말할 정도로 그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갑자기 편지가 안 온다니.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사흘 전부터요. 고작 사흘 밖에 안 됐는데 호들갑을 떠는 것 같아 조금 민망하네요.”
“아니에요. 진짜 문제가 있는데, 몰랐다가 늦게 발견하는 것보단 일찍 발견하는 게 낫죠.”
그것보다 사흘 전부터 갑자기 편지가 오지 않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설마 시온과 칼베른이 싸운 걸로 올랜드 공작가에서 횡포를 부린 건가?’
그래서 귀족들이 눈치를 보고 편지를 보내지 않는 걸까, 싶었지만 칼베른과 시온이 싸운 건 이틀 전이었다. 사흘 전부터 편지가 오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혹시 편지가 누락된 건 아닌가요?”
“저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총괄 집사에게 확인해봤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그래요…….”
안 그래도 에이지 일이랑 올랜드 공작가에서 온 초대장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기다니. 엘리사는 미간을 짚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공작님께 말씀드려야 할까요?”
“일단 하루만 더 기다려 보죠. 내일도 편지가 오지 않으면 그때 고민하도록 해요.”
“그럼 부인께서 말씀해주시겠어요? 전 소공작님을 못 본 지 제법 돼서…….”
아, 맞아. 지금 칼베른은 공식적으로 부재중이었지. 그나마 엘리사는 칼베른과 마법 전령새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가짜 설정을 해두었기 때문에 솔레이가 엘리사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부인! 아, 그러고 보니 부인께서도 고민이 있으셨죠. 무슨 고민인가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움을 드릴게요!”
어쩐다, 말할까. 엘리사는 잠시 고민했다가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혹 솔레이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건 아니고, 저녁 만찬 초대를 거절하고 싶은데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냥 안 간다고 하면 안 되나요? 웬만한 귀족들은 그렇게 해도 그렇구나, 하고 불만 없이 넘어갈 텐데요.”
“상대가 올랜드 공작가인데도요?”
“음, 그건 안 되겠네요.”
혹 그래도 되진 않을까, 희망을 품었는데 솔레이의 반응을 보니 역시 그건 안 되는 모양이다. 이에 아쉬워하는 엘리사의 곁으로 하녀가 다가왔다.
“마님,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오늘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온 거지?”
“엘리사!”
그 순간, 1층 홀 쪽에서 누군가 엘리사를 크게 불렀다. 이 목소리는 설마.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며 난간 너머로 홀을 내려다 봤다.
“오랜만이야, 엘리사!”
“닉?”
그러자 홀 중앙에 서서 그녀를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는 닉이 보였다.
‘닉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당황하며 닉을 내려다보던 엘리사는 그 뒤에 서 있는 크라임을 보고 바로 이해했다.
‘크라임 대주교를 여기까지 호위한 모양이네.“
대주교가 혼자 올 리가 없으니 성기사 중 누군가 크라임을 호위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설마 닉일 줄이야.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저 남자는 누구죠?”
솔레이도 닉을 보고 인상을 팍 찌푸리며 물었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일개 성기사인 것 같은데, 부인의 성함을 함부로 부르다니. 무례하군요.”
“아, 제 친구예요. 어릴 때부터 아주 친한 친구라서 그런 거니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엘리사, 어서 내려와!”
또다시 닉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닉이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얼른 내려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엘리사는 계단을 내려갔다.
“……저 남자는 부인을 단순한 친구로 생각지 않는 것 같은데요.”
솔레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엘리사의 뒤를 따라 내려왔다. 엘리사가 홀로 내려오자 닉이 환하게 웃으며 성큼 다가왔다. 마치 엘리사를 껴안으려는 듯 양 팔을 벌리고서.
“가만히 있어.”
엘리사는 그런 닉을 밀어내고, 그의 뒤에 서 있는 크라임에게 인사를 했다.
“클라우드 공작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크라임 대주교님.”
뚱하게 서 있던 솔레이도 대주교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인사했다. 크라임 대주교는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종이처럼 선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먼길을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소공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칼베른이 크라임을 부르긴 했지만, 무슨 일때문에 부른 건지는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편지에 적을 만한 일은 아니지.’
혹 누군가 편지의 내용을 볼 우려도 있었고, 편지에 내용을 적는다고 해서 크라임이 믿을 리가 없었다. 분명 장난 편지라고 생각하겠지.
‘무슨 일인지 미리 말해두는 게 좋겠지?’
그래야 크라임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둘 테니까. 아무 준비도 없이 어려진 칼베른과 마주하면 크라임도 무척 놀랄 것이다.
“애석하지만 지금 소공작님께선 저택에 안 계십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일하실 시간이군요.”
“그런 것도 있고…… 안 그래도 이 일에 대해 대주교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그럼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엘리사와 크라임이 응접실로 향하자 자연스럽게 닉과 솔레이가 따라붙었다. 닉은 그렇다 쳐도 솔레이는 왜 따라오는 거지. 엘리사는 흘끗 솔레이를 쳐다봤다. 엘리사와 눈이 마주친 솔레이가 눈매를 단호하게 굳혔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눈동자에서 보였다.
‘왜 저러는 거지?’
엘리사는 솔레이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접실로 향했다.